117화
“갈비뼈 두 대로 끝난 걸 다행인 줄 알아.”
루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병상에 누운 아스틴에게 말했다.
“너, 그 목걸이 아니었으면 몸속 장기들도 죄다 망가졌을 거야.”
한마디로 죽었을 거라는 소리였다.
끄응. 루드의 거친 치료에 병상에 누워 끙끙거리던 아스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 살살 해 주십시오.”
“살살은 무슨. 에스테르 영애 돌아오시면 혼날 준비나 해.”
그러자 아스틴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헤헤,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살아 있지 않습니까?”
“자랑이다.”
“윽!”
루드가 붕대를 힘껏 묶자, 아스틴이 신음을 참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 하십니…….”
그때, 막사의 천막을 걷으며 카르세스가 들어왔다.
루드가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전하.”
아스틴도 루드를 따라 몸을 일으키려 하자, 카르세스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누워 있어.”
“송구합니다.”
아스틴이 시무룩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후우. 카르세스가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군.’
카르세스와 루드, 아스틴은 로시안트 제국을 떠나 서쪽에 위치한 데리사 제국에 머물고 있었다.
악시덤과 귀족파의 음모를 파헤치다 보니 바다를 건너 데리사 제국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
적대 세력의 중요한 근거지를 발견했고 은밀히 잠입하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흑마법사들과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살아 있는 적들은 흑마법을 사용했고 겨우 처리한 시체에서는 자폭환이 터졌다.
그 일대가 초토화가 되었다.
약품을 정리하던 루드가 말했다.
“에스테르 영애와의 약속을 잊은 거지.”
그러자 아스틴이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닙니다! 정말, 진짜 계속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른 제국에서 흑마법사들과 마주칠 줄은 몰랐지.
-전장에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라는 소리가 들리면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으니까 일단 물러서요. 특히, 북동쪽 세네르타 영지 쪽이라든가. 세네르타 영지에서도 비타르 마을이라든가.
아델리아의 소원은 제법 구체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기억해 두려고 노력했다.
외우고, 또 외우고.
지도에서 세네르타 영지가 어딘지, 세네르타 영지 안에서도 비타르 마을이 어딘지 확인까지 했었다.
카르세스가 옆 병상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세네르타 영지만 아니면 될 줄 알았겠지.”
“……네, 그렇습니다.”
“그래도 무모했다. 에스테르 영애가 그렇게까지 당부하지 않았었나.”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날 이길 수 있을 때까지 흑마법사와 마주치면 무조건 도망치기.
이마를 긁적거리던 아스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린아이였습니다…….”
흑마법사라면 모두가 성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새카만 망토에 후드를 푹 눌러쓴 음침한 얼굴.
전형적인 흑마법사의 모습만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경계 대상이었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 어린아이까지 흑마법을 사용할 줄은…….”
달아나는 흑마법사들 사이, 바닥에 엎어진 채 울고 있던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순간.
아이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아스틴의 가슴을 강타했다.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그 즉시 아스틴은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아스틴이 당시를 회상하며 괜히 가슴 위를 문질렀다. 그때의 고통이 다시금 떠올랐던 탓이다.
카르세스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방심했다는 소리군.”
“죄송합니다, 전하…….”
아스틴이 곧 눈물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눈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전하와 루드 경을 두고 혼자 달아날 순 없었습니다.”
“…….”
카르세스는 그런 아스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델리아의 경고가 있었다지만, 아스틴의 성격상 위험에 빠진 주군과 전우를 두고 홀로 달아나지 못했을 테니까.
‘나라도 그랬을 거다.’
하지만 이로써, 악시덤과 자폭환이 크게 연관이 있다는 증거를 잡았다.
“내일은 카이쟈르 영지로 이동한다.”
카이쟈르 영지는 데리사 제국의 수도였다.
지난밤, 일부러 살려 보낸 흑마법사들의 일부가 카이쟈르 영지로 숨어든 것을 확인했다.
비록 아스틴이 부상당한 상태이긴 하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그들이 또 은신처를 옮기기라도 한다면 돌아가는 시일이 더 늦춰지게 될 테니까.
카르세스가 말했다.
“아스틴은 숙소를 잡아 휴식을 취하고, 루드는 나와 함께 이동한다.”
“예, 전하.”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저도 함께…….”
그러자 카르세스의 단호하고 서늘한 시선이 아스틴에게로 향했다.
“그런 몸으로는 짐밖에 되지 않아.”
“전하, 하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다, 아스틴.”
“……예, 전하.”
“충심도 살아 있을 때나 유용한 것이다. ……죽어 버린 뒤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그러자 아스틴이 시선을 떨구며 침울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카르세스가 아스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은빛이었던 목걸이는 조금 전 전투에서 흑마법을 막아 낸 뒤로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마치,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는 듯이.
“돌아가면 다시 신전에 들러. 같은 걸로 사든가, 아니면 더 성능 좋은 게 있으면 그걸로 사.”
“예, 전하.”
아스틴이 목걸이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부식된 쇳가루처럼 검은 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에스테르 영애께 감사 인사도 드려야겠습니다.”
이게 아니었으면 정말 죽었을 테니…….
“그래. 그렇게 해.”
카르세스가 몸을 일으켰다.
“쉬어. 회복에만 집중하도록.”
“예, 전하.”
카르세스는 루드와 아스틴을 뒤로한 채, 막사를 빠져나왔다.
제법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데리사 제국에도 가을은 찾아왔다.
‘겨울이 끝나면 곧장 로샤크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로샤크 연합군의 준비가 막바지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물론, 로시안트 제국 역시 만반의 준비를 이미 해 둔 상태였다.
이번 로샤크 전쟁은 황태자 카르세스가 공식적으로 출정하는 첫 번째 전투가 될 것이다.
그러니 로샤크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일단, 내일 카이쟈르 영지에서 흑마법사들의 흔적을 쫓는 게 우선이다.’
아스틴이 전투에서 빠지게 된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그들의 흔적을 쫓다 보면 분명 악시덤과 연관된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다시금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카르세스의 앞머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달빛을 머금은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돌아가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카르세스는 자연스레 아델리아를 떠올렸다.
축제처럼 소란스럽고 폭죽처럼 정신없던 아이를.
‘꿈 같다.’
아델리아와 함께했던 그 시간들이 꿈처럼 아득했다.
조금 특별한 아이의 등장만으로 반듯하고 고요했던 제 삶 전체가 흔들렸다는 것도 조금 우스웠다.
난데없고 뜬금없었으며 황당하고 야단스러운 아이.
‘아델리아 에스테르.’
-누가 알아요? 다음번에 만나면 전하께서 깜짝 놀랄 정도로 제가 변해 있을지?
2년이 지나도 또렷한 아이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카르세스가 피식, 옅게 웃었다.
아마, 깜짝 놀랄 정도로 변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뭐…….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지도.’
***
바라크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아델리아는 마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흐음.’
그리고 아델리아의 맞은편에는 휴시안이 앉아 있었다.
“날 앞에 두고 잠이 와?”
“……심심하면 마차나 몰아.”
치.
휴시안이 재미없다는 듯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졸고 있는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어.”
“……듣고 있어.”
아델리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눈은 감은 상태였다. 그러자 휴시안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나 한동안 어딜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그러자 그제야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어딜?”
아델리아가 졸린 눈을 비비며 짧게 하품했다.
“궁금해?”
휴시안이 히죽거리자 아델리아가 입을 악다물었다.
이 자식이 진짜.
아델리아는 다시 눈을 꼭 감고서 자는 시늉을 했다. 말을 섞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휴시안이 작게 키득거리며 말했다.
“여동생이 있거든?”
휴시안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말을 정정했다.
“아니, 여동생 같은 아이가 있어.”
그러자 아델리아가 다시 눈을 떴다.
“여동생 같은 아이는 또 뭐야.”
“가족 같은데, 피가 이어지지는 않았어. 그런데 보살펴 줘야 해. 내가 없으면 힘들 거야.”
“그런데 2년간 디크레드 영지에 있었다고?”
“자주 다녀왔어. 알잖아. 난 마차 같은 거 안 타고 다녀.”
“아.”
순간이동 마법이 있었지.
‘엄청 편하겠네, 그건.’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응. 뭐 알아봐 줄까? 예를 들면 에스테르 공작가의 소식이라든가.”
“됐어. 한창 바쁘실 텐데 괜히 집적거려서 신경 쓰이게 하지 마.”
“집적거린다니.”
“에스테르 영지에, 특히 우리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 지금의 아빠라면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검부터 휘두르실 거야.”
그만큼 예민하고 감각이 곤두서 있는 시기니까.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휴시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틀이면 될 거야. 그동안은 밤 나들이 가지 마.”
“마차 없어도 혼자 다닐 수 있거든?”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잖아. 쬐끄만 게.”
하……. 그래, 내가 쬐그만 건 사실이니까 참자. 참아.
짧게 한숨을 내쉬던 아델리아가 말했다.
“차라리 여동생 같은 그 아이를 디크레드 영지로 데려오는 건 어때?”
“음?”
“보살펴 줘야 한다며. 가까이에 두고 보살피면…….”
“안 돼!”
휴시안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뺨을 긁적였다.
아델리아가 눈썹을 들썩였다.
“……왜 소리를 질러.”
“미안.”
“그런데 왜? 함께 지낼 집은 할아버지께 마련해 달라고 할게.”
휴시안이 아델리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냥……. 걔는 거기에 있는 게 나아.”
“…….”
아델리아가 잠시 휴시안을 바라보았다.
‘쟤도 말 못 할 사정 같은 게 많나 봐.’
[음흉한 놈이니 비밀이 많겠죠.]
‘음흉한 놈 치고는 사고도 안 치고 얌전한걸?’
[바로 그 점입니다, 누님! 오랜 시간 동안 본능을 억누르고 살고 있다는 그 점이 더 문제가 된다고요!]
그런가…….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휴시안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 왔네.”
그리고 퐁— 다시 연기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내 마차가 백작저 앞에 섰다.
마부석에서 내린 휴시안이 마차 문을 열었다.
“내려, 공녀님.”
“응.”
휴시안의 손을 잡고 내린 아델리아가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휴시안과 아델리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
“어?”
디크레드 백작저의 문 앞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저 문양은…….’
아델리아가 마차에 새겨진 문양을 알아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우리 가문 문양이잖아!’
설마, 혹시.
아델리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빠가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