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저택 안팎으로 고용인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 분주한 분위기에 아델리아도 덩달아 설레었다.
‘정말, 아빠가…….’
오셨나? 정말? 진짜?!
그때.
“저 자식이 왜 여길…….”
응?
뒤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백작저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휴시안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얘는 또 왜 이래?’
[겁이라도 먹은 거 같은데요? 마탑주가 세상에 무서운 것도 있나?]
아델리아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휴시안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델리아의 질문에도 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당황한 얼굴로 백작저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날 죽이려 들 거야…….”
“뭐라고?”
휴시안의 뭉개지는 듯한 발음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한 아델리아가 되물었다.
그러자 휴시안이 아델리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이마로 희미한 땀방울이 반짝거렸다.
“고, 공녀님은 어서 들어가. 어쨌든, 한동안 난 안 보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휴시안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휴시안?”
“헉.”
백작저에서 나온 누군가가 휴시안을 불렀다. 휴시안이 숨을 급히 들이켜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멈춰 섰다.
휴시안을 쳐다보던 아델리아가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어……?
“오빠?”
아델리아가 부르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데릭이 다시 휴시안의 등을 쳐다보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휴시안을 바라보는 데릭. 그리고 달아나려 몸을 돌린 휴시안.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아델리아까지.
세 사람은 묘한 대치 상황이 놓였다.
그러기를 잠시.
삐걱대며 몸을 돌린 휴시안이 오른손을 올려 가볍게 흔들었다.
“안녕, 친구.”
“…….”
“…….”
친……, 구?
그 한마디에 세 사람 사이로 흐르던 공기는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
디크레드 백작저 내의 오래된 대장간.
사용하는 이가 없어 멈춘 지 오래되었던 용광로가 다시금 뜨겁게 타올랐다.
노베트는 마차 한가득 옮길 수 있는 도구와 장비들을 싣고 왔다.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뵐 겸 호위를 해 주시겠다고 따라오셨지요. 덕분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노베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전쟁 준비 때문에 바빴을 텐데…….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까 너무 좋네요.”
아델리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실, 조금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오빠가 와서 실망한 게 아니라, 아빠가 오신 줄 알고 잠깐이라도 기대했었어…….’
[알아요, 누님. 제가 그 마음 다 알아요.]
‘……웬일로 기특한 말을 하네, 릭.’
[제가 그랬거든요. 신전에 갇혀 있을 때, 창고 문이 열릴 때마다 누님이 오셨나! 하고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었죠!]
‘아…….’
그래, 그 감정이랑 비슷할 것 같아. 아델리아가 씁쓸하게 눈꼬리를 내려 웃었다.
깡, 깡, 까앙—!
노베트가 비어 있는 모루 위로 몸을 풀며 장비들을 두드렸다.
맑고 경쾌한 소리가 잠들었던 대장간을 깨웠다.
후우, 망치를 고쳐 잡으며 노베트가 몸을 바로 세웠다.
“다행스럽게도 도구나 장비들이 멀쩡합니다. 공작저 장비들과는 비교하기 힘들지만, 원래 열악한 환경에서 걸작이 탄생하는 법이지요.”
노베트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어쩐지 그의 등 뒤로 후광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노베트가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고해하듯 말했다.
“사실, 겁이 나서 시도할 생각조차 못 했었습니다.”
아델리아는 그 부담감을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되는 건 사실이죠. 무려 성석이니까요.”
“예, 아가씨. 두 번의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더욱 망설여지더군요.”
노베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아가씨께서는 저를 믿고 맡겨 주셨습니다.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이셨겠지요.”
노베트가 자신이 무지하여 그 뜻을 늦게 깨우쳤노라 사과했다.
“죄송해요. 부담을 드린 것 같아서.”
“아닙니다. 지금 기분으로는 성석 하나로 성검을 두 개, 세 개까지 만들어 낼 것 같습니다! 으하하하하!”
[뭐, 뭐라고?! 누님! 저 인간이 미쳤나 봅니다! 감히 같은 하늘 아래 성검이 두 개, 세 개라니!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검계의 질서를 무너트리려 하는 저 괘씸한 놈을 처단하셔야 합니다!]
어서요! 리그하르트가 흥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진짜 해내면 어쩌려고요!]
‘널 강하게 만들어 줄 거야. 네 반쪽 힘을 되찾게 해 줄 거라고.’
[지금 절 다시 녹이시겠다는 거잖아요!]
싫어요! 안 해요! 아프다고요! 무서워!
리그하르트가 아델리아의 허리춤에서 펄쩍펄쩍 튀어 올랐다.
그러자 노베트가 신기하다는 듯 리그하르트를 내려다보며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과연, 신비롭고 성스러우며 기품이 넘치는 검이로군요.”
“그렇게 보여요?”
“예, 아가씨. 아가씨와 정말 잘 어울리는 검입니다.”
노베트가 진심 어린 어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날뛰는 걸 멈췄다.
[어……? 이 인간, 보는 눈이 있는데요? 저의 진면목을 꿰뚫어 봤어요, 누님!]
들으셨죠? 신비롭고 성스러우며 기품이 넘친대요! 검 좀 볼 줄 아는 인간이었구먼!
깔깔! 리그하르트가 금세 노베트를 칭찬했다.
‘하여간 변덕하고는…….’
아델리아는 우쭐해하는 리그하르트를 무시하고 노베트에게 물었다.
“그럼 성석과 성검을 모두 녹여서 합치는 건가요?”
아델리아의 말에 신나 떠들어 대던 리그하르트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켜며 또다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노베트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아니라고요?”
아델리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옮기시려고요? 저도 여러 방법을 써 봤는데 소용이 없었거든요.”
성석을 갖다 대거나, 표면을 살짝 긁어 떨어져 나온 가루를 발라 본 적이 있었다.
-어때, 릭? 느낌이 와? 막, 강해지는 그런 느낌 말이야.
-으음, 간에 기별도 안 와요. 구석구석 잘 발라 보시라고요.
끓는 물에 성석을 우려내어 그 물에 리그하르트를 담가 놓기도 했고, 오러를 흘려 보내 강제로 검날 옆에 붙여 보기도 했다.
-이, 이게 뭐예요! 혹이 난 것 같잖아요! 안 멋있어! 흉측해! 떼 주세요! 어서요!
어찌나 싫어하던지. 리그하르트는 그 뒤로 한 이틀은 삐져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외 여러 방법을 더 써 봤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아델리아가 궁금하다는 듯 반짝이는 눈빛으로 노베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베트가 쑥스러워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성검은 그대로 두고 성석만 녹일 생각입니다.”
[휴우.]
리그하르트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노베트의 말이 이어졌다.
“일전에 성검을 잠시 살폈을 때, 손잡이의 크로스 가드 부분이 조금 부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 네 이노옴! 감히 완벽하기 그지없는 내 외모에 허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이 천벌을 받을……!]
‘릭. 조용히 하고 들어. 용광로에 던져 버리기 전에.’
보이지? 지금 눈앞에서 뜨겁게 이글거리는 저 용광로.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알지?’
[…….]
리그하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노베트가 이어 설명했다.
“성석을 녹여 크로스 가드에 딱 맞는 부속품을 만들 생각입니다. 성검과 결합한 뒤, 맞붙는 부분만 녹여 이어 주면 성석의 힘이 성검과 합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덤으로 손잡이의 가드가 더욱 견고해지기도 하겠지요.”
오, 역시 대장장이다운 발상! 아델리아가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노베트가 웃으며 말했다.
“단 한 방울의 쇳물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아가씨!”
“그런 걱정은 안 해요. 그냥, ……고마워서.”
“아직 성공한 것이 아니니, 감사 인사는 성공한 뒤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네, 기다릴게요!”
아델리아는 열기로 뜨끈해진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찬 바람이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을 스쳐 지나갔다.
아델리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백작저 옆, 작은 별채를 바라보았다.
데릭과 휴시안이 그곳에 있었다.
‘대체 저 두 사람 무슨 사이야?’
[친구랬죠.]
‘응. 그러니까 이해가 안 돼.’
이전 생에서도 로샤크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친구로 지낸 모양인데, 휴시안은 한참 뒤 아델리아를 전장에서 만났을 때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에스테르 공작가? 알지. 로시안트 제국에 관심깨나 있는 사람 중에 그 공작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
당시의 휴시안은 친우의 동생을 전장에서 만나 놓고도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더 수상하네.’
[음흉합니다. 역시, 처리하시는 게…….]
‘그건 네가 힘을 다 찾고 나서 생각해 볼게.’
지금 이 대륙에 마탑주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고.
아델리아는 한동안 별채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백작저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
“말해. 너 대체 여기에 왜 있는 거야?”
데릭이 팔짱을 낀 채, 책상에 걸터앉아 휴시안을 쏘아 보았다.
휴시안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테이블 위로 다리를 올리고 있었다.
꽤 난처해하던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어느 정도 뻔뻔한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휴시안.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
그러자 휴시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여동생 일이라서?”
“맞아.”
“거참. 옛날부터 그랬지만, 너 좀 유난스러워.”
내가 네 여동생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마차 좀 태워 주고 끼니 좀 챙겨 준 거밖에 없는데?”
하아. 그러자 데릭이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리곤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내 여동생 옆에 얼쩡거리면 죽여 버린다고 했지?”
“…….”
그러자 휴시안의 고개가 데릭을 향해 느릿하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