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여동생이 은발이라고? 너처럼 밀색이 아니라?
-응, 어머니를 닮았거든.
휴시안 앞에서 아델리아의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날이었다.
휴시안의 취미가 은색 장신구 모으는 것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취미가 사람에게까지 해당될 줄은 몰랐다.
데릭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데릭은 곧장 휴시안에게 걸어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가 분명 경고했지. 허튼짓할 거면 마탑에나 처박혀 살라고.”
휴시안은 데릭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너무하네. 진짜 나 서운해지려고 해.”
그럼에도 데릭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우리 친구 아니었어?”
“네 대답에 따라 달라질 거야.”
“…….”
데릭의 서슬 퍼런 시선을 오롯이 받아 내던 휴시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2년 전, 건국제에 마탑의 거울을 전시했었어.”
“그래서?”
“알잖아. 난 그런 축제 재미없어하는 거.”
“……그런데 재밌는 걸 찾았다? 그게 내 여동생이고.”
데릭의 말에 휴시안이 싱긋 웃었다.
“정답.”
“이 새끼가.”
데릭이 멱살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러자 휴시안이 다급히 말했다.
“오, 오러!”
“…….”
휴시안의 외침에 데릭이 천천히 옷깃을 놓았다. 휴시안이 목을 매만지며 콜록콜록, 작게 기침을 했다.
“성년이 되려면 한참은 멀어 보이는 아이가 오러를 가지고 있으니까 궁금하잖아! 너라도 그랬을 거 아냐?”
“…….”
물론, 휴시안은 거울에 비쳤던 아델리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냥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 난리를 피우는데, 그걸 말하면 정말 날 죽이겠다고 덤빌지도.’
아직은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되니까. 휴시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에스테르 공작저로 들어가더라고.”
“그게 디크레드 영지로 쫓아온 이유가 될 순 없어. 내 여동생인 걸 알았으면 내게 물어봐도 되는 일이었고.”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어. 그냥 신기해서 조금 지켜본다는 게 좀 오래 걸렸어.”
“2년이나.”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휴시안이 데릭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디크레드 영지에 볼일이 있어서 온 김에 눌러앉았을 뿐이야.”
“무슨 볼일?”
그러자 휴시안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마탑 일이야. 마탑 일까지 내가 너한테 보고해야 해?”
“지금은 그래야 할 거야. 내 여동생이랑 그 볼일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내가 확인해야 하니까.”
“하, 거참.”
안 통하네. 마탑 일을 거론하면 어지간해서는 그냥 넘어가던 데릭이었다.
‘그만큼 화가 단단히 났다는 거겠지.’
휴시안은 어쩔 수 없이 그냥 털어놓기로 했다. 다만, 그게 아델리아 이야기라는 소리는 하지 않기로.
“거울에 이상한 게 비쳤어.”
“이상한 거라니?”
“악마도 아니고, 마물도 아니었거든. 그래서 그 뒤를 쫓아오다 보니 디크레드 영지까지 오게 된 거지.”
“뭐라고? 그걸 왜 이제 말해! 그럼, 여기가 위험하다는 말이잖아!”
데릭이 다시 화를 내자, 휴시안이 진정하라며 손짓했다.
“데릭, 진정하고 내 말 들어 봐. 그래서 내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야. 나, 마탑주잖아. 나 꽤 능력 좋아. 네가 친구니까 멱살 정도 웃으면서 잡혀 주는 거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날 건들지도 못했어.”
알잖아? 하며 휴시안이 천진하게 웃었다. 데릭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찾았어?”
으음. 침음하던 휴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찾았는데, 일단 지켜보고 있어.”
2년간 지켜보고 있다는 소리를 하면 데릭이 바로 알아차릴 것 같아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자 데릭이 어금니를 사리물며 말했다.
“처리해야지.”
서늘한 데릭의 목소리에 휴시안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아니,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네 여동생이라고, 인마……. 휴시안이 난처하다는 듯 웃자, 데릭이 재차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야. 악마나 마물은 아니거든.”
“이상한 게 비쳤다고 했잖아.”
“그게 악마나 마물이라고는 안 했어, 데릭.”
그러면서 휴시안은 더는 말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마탑 일이기도 했고 극비로 진행되는 일이라며 에둘러 말했다.
“어쨌든, 분명한 건. 그 존재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러자 데릭이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휴시안이 데릭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내 모든 마력을 걸고 약속할게. 때가 되면 말해 주겠다고.”
마력을 걸고 약속하겠다는 휴시안의 말에 데릭의 매서운 기세가 한결 누그러들었다.
마법사가 마력을 걸고 약속한다는 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가진다. 서류를 따로 작성하지 않아도 말이다.
휴시안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 존재가 네 여동생은 물론, 이 영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마탑주인 내가 보장할게!”
휴시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데릭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마력을 건 약조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은 표정을 지었다.
휴시안이 속으로 안도했다.
‘어휴, 만날 때마다 여동생 자랑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래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친우로서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데릭은 여동생 일 앞에서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처럼 굴었다.
‘괜히 서운하네.’
목적이 있어 의도적으로 접근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휴시안이 크흠, 목을 가다듬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자자, 어서 나가자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여동생이랑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
나가자, 데릭! 휴시안이 데릭의 등을 떠밀자, 데릭이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
“어……? 데리러 왔다고?”
“응, 아델.”
데릭과 마주 앉은 아델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정말?! 나 다시 돌아가도 되는 거야?!”
“맞아. 돌아가자, 아델. 우리 집으로.”
데릭이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어쩐지 조금 지쳐 보였지만.
‘휴시안이랑 무슨 일이 있었나?’
별채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좋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된 사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휴시안은 곧장 디크레드 영지를 떠나 버렸다. 어쩐지, 사고를 쳐 놓고 달아나는 모양새였지만.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가자는 데릭의 말에 휴시안의 꺼림칙한 뒷모습은 순식간에 잊혔다.
‘집으로……, 갈 수 있어!’
아델리아가 기대감에 눈동자를 반짝이자, 데릭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께서는 조금 바쁘셔서 함께 못 왔어.”
“응…….”
알고 있다고, 이해한다고. 아델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데릭의 눈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이미 예고된 로샤크 연합과의 전쟁 이외에도 제국 각 경계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로시안트 제국과 로샤크 연합의 전쟁이 얼마 남지 않자, 그 불안한 정세를 이용해 제국을 흔들어 보려는 세력들이 늘어났던 탓이다.
‘사실, 조금 더 디크레드에 있길 바랐는데.’
휴시안이 아델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이대로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거울에 비친 그 존재도 어쩐지 꺼림칙하고.’
거울에 비친 존재가 무해한 존재라던 그의 말은 진실이겠지만, 그럼에도 디크레드 영지에 아델리아를 두고 돌아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지금이야 잠시 떠났다고는 하지만, 휴시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디크레드 영지로 돌아올 거야.’
그러니 더더욱 아델리아를 디크레드에 둘 수 없어. 아버지께서도 아델리아 곁에 마탑주가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면 분명 달갑지 않게 생각하실 테고.
‘계속 아델을 보고 싶어 하셨으니, 오히려 반겨 주실지도 몰라.’
마음을 굳힌 데릭이 아델리아에게 말했다.
“노베트가 작업을 끝내면 떠나기로 하고, 미리 짐 정리해.”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만큼 아델리아의 물건도 많이 늘어났을 테니까.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
이틀 뒤, 아침.
서둘러 식사를 마친 아델리아는 짐 가방을 옮겨 싣고 있는 하녀들을 쳐다보았다.
‘고작 2년인데 내 짐이 왜 저렇게 늘어난 거야?’
디크레드 영지로 들어올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델리아는 족히 열 배로 늘어난 마차들을 질린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대장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깡, 깡, 깡! 제법 거리가 있었던 탓에 대장간에서 들려오는 망치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직 멀었나 봐.’
이틀 전, 노베트는 리그하르트를 가지고 갔다.
-무조건 이틀 안에 완성해 보겠습니다.
-[누, 누님! 저 혼자 보내지 마요! 네?!]
-‘네 반쪽이랑 한 몸이 되기 전까지는 얌전히 있어. 힘을 되찾기 전까지는 돌아올 생각 하지 마.’
-[누니이임…….]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잘 부탁해요, 노베트.
-믿어 주십시오, 아가씨.
-[누니이이임—!]
누님! 누님!! 흐앙―! 가기 싫어! 곁에서 손이라도 잡아 줘요! 네?! 혼자 보내지 마요! 네에?!
노베트에게 붙들려 대장간으로 들어가던 리그하르트가 아델리아를 애절하게 부르며 징징거렸다.
‘이틀이라…….’
무조건 이틀 안에 완성할 수 있다는 소리에 미리 짐을 정리하고는 있지만, 시일이 조금 더 걸려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짐마차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미리 공작가로 짐만 보내 놔도 되고.’
그럼에도 초조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델리아가 짧게 한숨을 폭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뭐, 뭐야?!’
대장간이 있는 방향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