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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20)화 (120/161)

120화

사람들이 대장간을 가리고 있던 천막 근처로 몰려들었다.

오벨르는 노베트가 작업을 시작하기 전, 대장간 근처를 천막으로 크게 둘러 가려 주었다.

대장간에서 어떠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굉음에 놀라 대장간으로 달려온 오벨르가 천막 근처를 기웃거리는 고용인들을 서둘러 쫓아냈다.

“어허, 별일 아니니까 어서들 들어가! 여기서 농땡이 피우지 말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카만 연기가 자욱한 대장간 안에서 실성한 듯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하!

굉음을 듣고 달라온 아델리아가 대장간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이거, 노베트 목소린데.’

릭! 릭! 거기에 있어?! 아델리아가 릭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아델리아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때, 고용인들을 모두 쫓아낸 오벨르가 메릴다를 데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델리아 역시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대장간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고 검은 연기만이 뭉게뭉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연기는 뻥 뚫린 하늘로 올라갔다.

아델리아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연기를 올려보다 대장간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대장간 내부의 검은 연기가 한차례 출렁거리더니 그 연기를 뚫고 노베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베…….”

아델리아가 노베트를 부르려다, 급히 말을 멈추었다.

노베트가 성물을 받치듯 양손으로 검을 떠받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던 까닭이다.

‘와아…….’

아델리아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본래의 길이를 되찾은 리그하르트가 노베트의 손 위에서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더니, 처음 리그하르트와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지난 생에서 리그하르트를 처음 만났을 때, 허공으로 떠오른 성검에서 딱 저와 같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었다.

‘릭…….’

[꺄홋! 누님! 누니임!! 저 좀 봐요! 빛이 나요!]

리그하르트가 아델리아를 발견하고 격양된 목소리로 자신의 훌륭한 자태에 대해 빠르게 떠들어 댔다.

노베트가 다가와 아델리아 앞에 검을 내밀었다. 정중하고 경건한 자세였다.

“아가씨. 이번 일은 제 인생 최대의 도전이었고 최고의 업적이 될 것입니다.”

노베트는 자신에게 성물과 성검을 직접 만질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전부, 아가씨 덕분입니다. 오늘 이후로 저는, 그 어떠한 광물이라도 두려움을 이겨 내고 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베트…….”

노베트가 검게 그을린 얼굴로 부드럽게 웃었다.

“우선……, 성검을 받으세요.”

천막의 입구에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던 오벨르와 메릴다의 시선도 아델리아와 성검을 향했다.

“내가 살아생전 이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아델리아와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오벨르가 감격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며칠 전,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데릭과 대장장이가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랄 틈도 없이, 데릭에게서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뭐? 아델리아가, 어쩌고 어쨌다고?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순간 뒷골이 찌르르 울렸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게, 그러니까……. 성검의 주인이, 우리 아, 아, 아델이라는 소리지?

-예.

더불어 이레네아처럼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오러까지 발현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데릭이 성년식 이후로 오러가 발현되었다길래 아이들은 이레네아의 운명을 피해 가는구나 하고 안심했더니…….’

천만다행인 것은, 아델리아가 이레네아와는 달리 오러를 스스로 제어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이레네아가 지켜 주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오벨르는 곧장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옆에 서 있던 메릴다의 눈치를 살폈다.

‘메릴다한테는 아직 성검 이야기를 못 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메릴다는 아델리아가 얌전한 귀족 영애로 자라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 손녀가 성검의 주인이라는 게 드러나 버렸으니, 더는 평범한 귀족 영애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충격이라도 받으면 어쩌지…….’

그때, 아델리아를 멍하니 바라보던 메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예사롭지 않은 아이라 생각은 했지만…….”

“메, 메릴다.”

메릴다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메릴다는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우리 손녀, 너무 대단하지 않나요?”

“응?”

오벨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놀라는 게 아니라, 대단하다고?

메릴다의 말이 이어졌다.

“매번 꿈에 이레네아가 나와 이야기해 주고는 했어요.”

폴디아퀸을 숨겨 놓은 장소도 꿈속 이레네아를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메릴다의 친정 가문은 대대로 예언가가 태어나던 가문이었다.

그 영향인지 메릴다도, 이레네아도, 가끔 예지몽을 꾸거나 죽은 사람이 나오는 꿈을 꾸고는 했다.

“처음 산을 올랐던 날도 그랬어요. 언젠가 폴디아퀸을 가지러 아가가 올 거라고.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꼭 찾아 달라고.”

그래서 산을 오르고 땅을 파는 기이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메릴다. 왜 그 이야기를 그때 하지 않고…….”

“그때는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잖아요. 말해도 믿지도 않았을 거면서.”

“그, 그거야…….”

오벨르가 멋쩍어하며 뺨을 긁적였다. 메릴다는 아델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화려한 금빛 광채에 휩싸인 아이는 태양보다 눈이 부셨다.

“내 꿈이 이루어졌어요, 여보.”

“꿈이라니?”

“우리 이레네아가 오러를 제어하고 건강해지길 바랐거든요. 그런데……. 아델리아가 그걸 대신 해 줬잖아요. 고맙게도…….”

“메릴다…….”

오벨르가 울컥하는 심정을 내리누르며 메릴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메릴다가 오벨르의 품에 안겨 작게 중얼거렸다.

“해낸 거예요. 아델리아가…….”

우리 이레네아가 해내지 못했던 것을, 저 아이가, 저 어린아이가 해냈어요…….

메릴다의 눈가가 붉어졌다. 두 노부부의 시선이 다시 아델리아로 향했다.

아델리아가 성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리그하르트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니, 더욱 화려해졌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손잡이와 검날을 이어 주는 크로스 가드 부분에 성물을 녹여 만든 부속품이 합쳐지며 더욱 찬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로스 가드에 부착된 성물은 기존에 성검에 새겨져 있던 문양을 그대로 새겨 넣음으로써 애초에 성검과 하나인 듯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아델리아가 성물이 덧붙은 자리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매만지며 속으로 조용히 리그하르트를 불렀다.

‘릭…….’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부르르 진동하며 말했다.

[어서요! 어서 절 잡아 보세요!]

자! 어서! 빨리! 빨리! 리그하르트가 오두방정을 떨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아델리아가 천천히 손잡이 쪽으로 손을 내려 신중하게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그 순간, 아델리아의 손 크기에 맞춰 성검의 크기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손잡이가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것도 매우 안정적이었다.

“하…….”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그러나 안정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리그하르트의 힘이 아델리아의 몸을 점령하듯 흘러들어 왔다.

막아 놓았던 댐이 무너지고 고여 있던 엄청난 양의 물이 예고도 없이 쏟아지는 것처럼.

‘릭……! 릭!’

정신 차려! 이 망할 쇳덩이야! 정신 놓고 힘을 풀어 대면 어쩌자는 거야!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를 다그쳤다.

그러나 극도로 흥분한 리그하르트에게는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이거 완전, 성검이 아니라 마검 아니야?!’

이대로라면 죽겠구나.

덜컥 겁이 난 아델리아가 서둘러 리그하르트를 바닥에 냅다 집어 던졌다.

퍼억—! 리그하르트가 대장간 앞 흙바닥에 꽂혔다.

[껙!]

그러자 몸속을 채우던 신력도 순식간에 흩어졌다. 오벨르와 메릴다의 당황한 시선이 아델리아와 성검을 오고 갔다.

아델리아가 손바닥을 탁탁 털며 안도하듯 숨을 내쉬었다.

“휴우. 큰일 날뻔했네.”

[아야야야. 왜 이러세요! 누님!!]

‘시끄러워, 망할 성검.’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를 노려보며 속으로 타박했다.

그때,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누님?’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의 시선이 사선으로 바닥에 꽂힌 성검으로 향했다.

‘지금 저 성검이 말을 한 건가?’

‘에이, 잘못 들었겠지……?’

‘지금, 아가씨께 누, 누님이라고……?’

대장장이 노베트는 물론, 오벨르와 메릴다, 뒤늦게 도착한 데릭까지.

모두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

“그러니까, 성검이 말을 할 수 있다고? 아니, 성검이 하는 말을 이제는 우리도 들을 수 있다고?”

데릭이 재차 확인하듯 묻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타인에게 들리지 않게 조절할 수 있기는 한데…….”

저놈이 그럴 놈이 아니라서…….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리그하르트가 덜거덕덜거덕 요란스레 움직거리며 말했다.

[영광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매한 인간들이여! 이 리그하르트 벤 티에리 스코엘리이어 미티어스 록사니크 요하른 데이시안트 메……, 켁!]

비장하게 제 이름을 나열하던 리그하르트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아델리아가 테이블 위 리그하르트를 거칠게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기서 더 떠들었다가는 말발굽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내가 몇백, 몇천 번이고 그 주둥이 조심하라고 했어? 안 했어?!

[…….]

그제야 리그하르트가 조용해졌다.

아델리아는 화를 꾹 눌러 참는 것이 역력한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쁜 아이는 아니야. 내가 잘 이야기해 볼게.”

아델리아가 자신의 등 뒤로 어쩐지 부끄러운 리그하르트를 슬며시 숨겼다. 그러자 데릭이 성검과 아델리아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응?”

“아까 저 검이 너한테 누님이라고 한 거 맞지? 왜 널 누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확실히 성검이 세상에 드러났던 시기를 떠올려 보면 말이 안 되는 호칭이었다.

“아…….”

이 망할 쇳덩이…….

[죄, 죄송…….]

아델리아가 속으로 리그하르트를 타박하자, 리그하르트가 눈치껏 아델리아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었다.

[이제 조심할게요, 누님…….]

‘일단, 넌 나중에 보자.’

아델리아가 데릭을 향해 싱긋 웃었다.

“내가 내기에서 이겨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 어차피 서열 정리는 필요한 거니까.”

서열, 정리……?

굳이 검과 사람 사이에 그런 게 필요한가 싶었지만, 아델리아가 곧장 오벨르에게 말을 건네면서 그 주제는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아델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의 오벨르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델리아, 이 할아버지는 말이야…….”

오벨르가 대꾸하려 하자, 곧장 메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아가. 걱정하지 않는단다.”

오벨르의 고개가 메릴다로 향했다. 메릴다는 오벨르와 달리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소리와 눈빛은 단단하기까지 했다.

메릴다가 말을 이어 갔다.

“이제 나는 걱정이 없다, 아델.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고, 너의 뜻대로 이루어질 테니.”

“할머니…….”

메릴다는 며칠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로시안트 제국 수도의 하늘로 흩날리던 꽃가루, 승전을 알리는 나팔 소리.

그리고 수도로 들어오는 황실 기사단의 행군과 광장을 가득 채운 함성.

그 함성이 외치던 이름 하나가 여전히 귓가로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성검의 주인! 제국의 영웅! 만세! 만세!

-에스테르 경! 만세!

-에스테르 경!

그리고 함성 한가운데, 백마를 타고 당당한 시선으로 제국민들을 내려다보던 기사가 있었다.

기다란 은발을 높이 묶고 은빛 장검을 허리춤에 찬 아델리아 에스테르가, 훌륭히 성장한 자신의 손녀가.

‘그러니까 걱정 없단다, 아가.’

넌 누구보다 존귀한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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