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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21)화 (121/161)

121화

로시안트 제국 수도의 변두리에 위치한 대저택.

한 달 만에 슈미엘을 찾아온 휴시안이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그 뒤로 휴시안의 수행원인 제제가 따라붙었다.

“슈는?”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외출?”

그 몸으로? 휴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달 전만 해도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몸을 하고 있었다.

-보여, 휴시안? 나 죽어 가고 있어…….

-정말 죽는 건 아니잖아.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이게 죽는 것보다 나을 게 뭐야! 아무나 잡아 오란 말이야! 새 그릇을!

슈미엘은 무척이나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때도 휴시안은 못 들은 척 저택을 빠져나와 버렸다.

흑마법의 대가는 결국 소멸이다.

슈미엘이 사용하는 흑마법의 독기를 이겨 내지 못한 평범한 육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그것이 곧 소멸로 이어졌다.

그것을 피하고자 슈미엘은 찾아낸 그릇들로 영혼을 옮겨 다니며 생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외출을 했다고? 저택을 나갈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었을 리는 없고…….’

휴시안이 제제를 쳐다보며 물었다.

“새 그릇을 찾은 거야?”

그러자 제제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휴시안 님.”

쯧, 제제의 대답에 휴시안이 혀를 찼다.

그는 소파로 걸어가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여자가 구해다 줬겠지.’

슈미엘은 혼자 움직이기 힘든 상태였으니까.

‘돌아왔나 보네.’

사업 때문에 로시안트 제국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사업은 무슨. 또 슈와 무슨 작당을 한 거겠지.’

휴시안은 슈미엘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던 여자 하나를 떠올렸다.

‘대공의 딸이라고 했던가.’

비온다? 비오나? 비올걸? 뭐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어쨌든, 일은 꽤 잘하는 모양이네. 그 까칠한 슈가 꽤 오랫동안 부려 먹는 걸 보면.’

휴시안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테이블 위 서류를 쳐다보았다.

“저거야? 보고서?”

그러자 제제가 대답했다.

“예, 휴시안 님. 자리를 비우신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뒀습니다.”

제제는 휴시안의 명령에 따라 비밀리에 움직이는 수행원이었다. 휴시안이 자리를 비운 사이, 마탑에서 일어난 일이나 슈미엘에 관한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여 보고했다.

휴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제에게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제제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갔다.

푸후, 휴시안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곧 꼬맹이 공녀님도 에스테르 영지로 돌아올 텐데…….’

공녀님 옆에 내가 얼쩡댄다는 걸 데릭이 알게 된 이상, 그대로 남겨 두고 떠날 리가 없지.

휴시안이 작게 키득거리다 표정을 굳혔다.

‘가만……. 에스테르 영지가 수도와 가까웠단 말이야.’

그렇다는 건, 슈미엘과 마주칠 가능성도 있다는 거였다.

새로운 그릇을 찾고 저택까지 빠져나간 것을 보면,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인 것 같았다.

‘그건 좀, 곤란한데.’

휴시안이 난처하게 되었다는 듯 쓰게 웃었다.

슈미엘은 그릇을 찾고 있다. 자신의 강하고 어두운 흑마법의 독기를 온전히 감당해 낼 완벽한 그릇을.

대부분의 그릇은 흑마법의 독기를 감당하지 못해 금방 망가져 버렸다.

-망가지지 않을 그릇을 찾은 것 같아.

슈미엘은 에스테르 공작가의 가주를 완벽한 그릇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그 가주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은밀하게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 계획이 성공하지 못한 것 같지만.

‘문제는 그 에스테르의 공녀님이 오러에다 신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거지.’

아델리아가 강한 오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첫눈에 알아보았다.

2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켜보며 오러와 신력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력은 늘 들고 다니던 검이 가지고 있었지.’

그런 검을 성검이라 불렀던 것 같은데.

‘성검의 주인이라……. 로시안트 제국에서는 성검의 주인을 영웅으로 칭송한다고도 했었어.’

푸하! 휴시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었잖아?’

성검은 주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들었다. 죽은 것을 살려 내거나 죽을 만큼의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탁한 흑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 오러를 가진 몸, 그리고 그 사특한 독기를 정화해 줄 신력을 동시에 가졌다는 건…….’

한마디로, 슈미엘이 그토록 찾고 있던 완벽한 그릇이란 소리였다.

‘오히려……. 에스테르 공작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야.’

슈미엘이 공녀를 보게 되면 단번에 알아볼 텐데…….

휴시안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 들었다.

‘근데 난…….’

어쩌고 싶은 거지?

왜 난 꼬맹이를 따라 거기까지 갔으며, 왜 슈미엘이 그토록 찾던 그릇이라는 걸 알면서도 알리지 않았던 걸까.

‘어쩐지, 그 꼬맹이가 죽는 건 싫단 말이야.’

그래서 차라리, 에스테르 가주를 잡아다 슈미엘 앞에 던져 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가족은 내 전부야.

-난, 내 가족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어.

그 소리를 듣고 난 뒤에는 그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뭐, 전생에 빚이라도 졌나. 왜 이렇게 그 꼬맹이한테 휘둘리는 거야?’

나 참. 휴시안이 복잡해진 마음을 달래려 창가로 걸어가며 가슴께를 문질렀다.

어린 공녀와 마주칠 때마다, 혹은 공녀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 부근이 이유 없이 지끈거렸다.

‘고작 2년 정도 함께 지냈다고 정이라도 든 거야, 뭐야.’

그렇다고 서로 살갑게 챙겨 주던 사이도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눈앞에서 얼쩡거리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아델리아는 그런 휴시안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아델리아가 밤 나들이를 갈 때마다 마차를 대령했다.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마차에 올라타는 게 제법 귀엽기도 했다.

‘여동생이라면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공녀님은 괜히 더 챙겨 주고 싶다니.’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건가?

휴시안이 실소하며 창틀에 기대어 서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디크레드 영지보다 화려하고 북적거리는 수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크게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디크레드 영지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이런 감정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사람들과 섞여 사는 삶이라는 게 얼마 만인지.

‘나, 생각보다 마부 일이 체질이었는지도?’

떠들썩했던 디크레드 백작저에서의 일상이 떠오르자 휴시안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스며들었다.

***

모든 짐을 마차에 옮겨 싣고 마지막 채비마저 마쳤다.

“아델리아. 꼭 가야겠니……?”

“할아버지.”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여기서 우리와 있자꾸나.”

오벨르가 아델리아의 망토를 느릿한 손길로 여며 주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테오스나 데릭은 전쟁 때문에 어차피 공작저를 비울 텐데, 너 홀로 어찌…….”

그러자 아델리아가 오벨르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에스테르예요.”

저택과 가문을. 그리고 영지를 지켜야 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아델리아가 단단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오벨르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아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다. 이 할아버지가 어리석었구나.”

헤헤, 아델리아가 눈매를 접어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아시잖아요? 에스테르 사람들이 특별하다는 거.”

“알지. 알고말고.”

에스테르 혈통이 남다르다는 사실은 제국 내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그들은 타고난 전투 감각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전쟁터를 누볐다.

아마도 그것은 혈통도 혈통이지만, 어린 나이에 시작되는 가문의 훈련 때문일 것이다.

검이면 검, 창이면 창.

활과 방패는 물론, 격투술과 암살에서조차 능숙한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에스테르 가문은 항상 황족의 그림자로 남았다.

‘테오스부터 시작이었지.’

에스테르 공작가가 황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오벨르가 아델리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더 숨길 수 있을까.’

성검이 깨어났고 제힘을 오롯이 되찾았다.

한동안은 테오스가 아델리아의 비밀을 지켜 줄 수 있겠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라는 게 어딨겠는가.

‘아가, 너의 앞날에 그 어떠한 역경도 없기를. 네가 걸어갈 길들이 그저 찬란하기만을 바란다…….’

그때,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앞에 섰다.

“아델리아, 선물이 있단다.”

“선물이요?”

후드 아래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메릴다에게로 향했다.

메릴다는 하늘색 레이스 손수건에 싸여 있던 것을 천천히 풀었다. 그러자 손수건 안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액자가 하나 나왔다.

“어……?”

메릴다는 그 액자를 아델리아에게 내밀었다.

그 액자를 알아본 아델리아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할머니……. 이걸 왜 제게…….”

이레네아의 방, 난로 위에 있던 그 액자였다.

그 액자 속에는 아델리아의 친모인 이레네아의 어린 시절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레네아가 성년이 된 이후로 초상화 하나 남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이레네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손에 액자를 쥐여 주며 말했다.

“이 할머니보다, 우리 손녀에게 더 필요한 것 같아서.”

그러자 아델리아가 액자 속 이레네아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전, 이걸 받을 수 없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딸아이의 모습이 담긴 액자. 그것을 내어놓는 메릴다의 심정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델.”

“네……, 할머니.”

“네 할아버지와 내게는 이레네아와의 추억이 가슴에 남아 있단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기만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그러니, 이건 네가 갖는 것이 맞아. 더 일찍 전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지만 아델. 이 할머니에게도 딸아이를 놓아줄 시간이 필요했단다.

메릴다가 아델리아를 다정하게 안았다.

“몸조심하거라. 네가 다치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하마.”

“고맙습니다, 할머니. 할머니께서도 약 꼬박꼬박 챙겨 드시고요.”

“그래, 그러마.”

짧게만 느껴지는 작별 인사가 끝이 나고 아델리아는 에스테르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를 타기 전 나누었던 인사로도 부족했는지, 아델리아가 마차 창문으로 상체를 꺼내어 팔을 흔들었다.

“또 놀러 올게요! 할머니! 할아버지!”

“오냐. 기다리마!”

“조심해서 가거라, 아델.”

“네! 또 뵈어요!”

꼭이요! 그때는 아빠도 함께 올게요!

아델리아의 우렁찬 목소리를 남기고 마차는 에스테르 영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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