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와! 내 방!”
에스테르 공작저에 도착한 아델리아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뛰어들었다.
2년 만이지만 공작저도, 자신의 방도 2년 전과 똑같았다.
먼지 한 톨 없는 걸 보면, 주인이 떠난 방이었지만 꾸준히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포근해…….’
그때, 세라가 짐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외출복을 입고 그대로 침대에 누우시면 어째요!”
헤헤, 저 잔소리도 공작저에서 들으니 마냥 좋기만 하다.
아델리아가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알았어, 잘못했어.”
아델리아는 그대로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선선한 가을바람이 방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아가씨! 감기 걸려요!”
“이 정도는 괜찮아, 세라!”
기분 탓인가. 에스테르 영지의 바람은 디크레드 영지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반갑고, 또 벅차올랐다.
‘돌아왔어.’
물론, 디크레드 영지에서의 생활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도 충분히 사랑받았고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
단지.
‘해결되지 못한 일이 많아서 그렇지…….’
에스테르 영지로 돌아오고 나니, 해결하지 못하고 떠났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디크레드 영지에서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이곳에서는 피부에 닿는 긴박함이 남달랐다.
‘향초에 대해서는 루이에게, 프레이르 공녀의 행적은 바라크에게 맡겨 놨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거고.’
이제 슬슬 모티반스 일도 마무리 지어야겠고, 미처 손에 넣지 못한 광산들도 마저 찾아야 해.
‘내일은 카를리나를 찾아가서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아, 맞다. 돌아오는 길에 신전도 들러야 해.
카를리나를 통해 신전에 목걸이를 미리 주문해 두었다.
흑마법을 막아 내는 신력이 담긴 목걸이와 반지, 팔찌. 성물들을 기호에 맞춰 장착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준비해 두라고 했다.
‘남는 게 골드니까. 이럴 때 써야지, 또 언제 써 보겠어.’
신전에서 목걸이를 가지고 와서 매그너스 기사단에 나눠 주고 나면 일단 한시름 놔도 되겠지.
‘이제 로샤크 전쟁이 넉 달도 채 남지 않았어.’
병기는 계획대로 잘 준비되어 있고, 매그너스 기사단도 오빠가 훈련을 맡았으니 더 강해졌을 거야.
그리고…….
아델리아가 심호흡하며 공작가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아빠.’
무엇보다 아빠가 보고 싶어.
아델리아는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테오스를 찾았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어젯밤에 급히 전갈이 와서 입궁하셨습니다. 다시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집사 일렌드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에이. 그렇게 당황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로샤크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런 상황에서 새벽에 황궁으로 불려갔다는 것은 분명 전쟁과 관련된 일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내가 아니라고.’
다만…….
에스테르 영지로 돌아오는 시간 동안, 아델리아는 마차 안에서 메릴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테오스도 함께 떠올랐다.
-성년이 되기 전에 오러가 발현된 사람을 알고 있다.
딸아이 앞에서 그 말을 하는 테오스의 마음이 어땠을지, 아델리아는 그 당시를 생각하며 뻐근해지는 가슴 위로 말아 쥔 주먹을 올렸다.
‘사랑하는 아내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딸아이까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것을 보며 얼마나 상심하셨을까…….’
그럼에도 아델리아가 충격을 받을까 봐, 테오스는 끝까지 이레네아의 죽음을 입 밖으로 꺼내 놓지 않았다.
‘엄마가 같은 증상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으셨던 거야…….’
사실, 아델리아는 메릴다가 들려준 이레네아의 이야기에 제법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든 슬픔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던 테오스가 더욱 걱정되었다.
‘아빠 성격상 슬프면 슬프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했을 리도 없고.’
어쩐지, 이전 생의 자신과 겹쳐 보였다. 가족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은 일단 제쳐 두어야만 했던 자신과.
아델리아의 시선이 창밖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아마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오시겠지만…….
‘얼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슬픔과 고독의 무게도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아버님께서 깜짝 놀라실 거예요!]
‘응? 왜?’
[왜긴요! 누님께서 부쩍 자라셨으니까요!]
아아, 그래. 그랬지.
아델리아는 창틀에 걸터앉아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2년 전만 해도 창틀에 앉으면 대롱대롱 허공에 떠 있던 발이 지금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자라 있었다.
‘한 뼘 가까이 자랐다고!’
[아버님 오시면 자랑하세요!]
‘그럴까?’
어디 키만 자랐겠어? 신발도 한 치수 큰 걸로 신기 시작한 것도 말씀드리자.
‘손도 조금 커진 것 같고, 콧대도 조금 더 높아진 거 같고.’
아델리아는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테오스 앞에서 하나하나 나열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아델리아가 키득거렸다.
‘아마 아빠는 내가 자란 것도 못 알아보실걸?’
테오스의 성격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때, 공작저의 검은 철제 대문이 급하게 열렸다.
그리고 아직 다 열리지도 않은 대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한 군마와 그 군마를 몰고 있는 사람이 아델리아의 시야로 들어왔다.
“어……?”
그를 알아본 아델리아가 말없이 창틀에서 내려와 방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문을 벌컥 열었다.
“어?! 노, 놀라라.”
그러자 방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려던 데릭과 마주쳤다.
“오빠!”
“안 그래도 데리러 온 건데…….”
아델리아는 데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지나치며 소리쳤다.
“뭐 해, 오빠! 빨리 와! 아빠가 오셨어!”
데릭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안 거야?”
아니, 것보다.
‘벌써 도착하셨다고?’
그렇지 않아도 황궁에서 테오스가 출발했다는 서신이 조금 전 도착했다.
‘황궁에서 공작저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지금 도착하신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데릭이 의아해하며 아델리아를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아델리아는 이미 저택의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나간 상태였다.
‘분명 아빠였어!’
아델리아가 두 개의 정원 사이로 난 돌길을 달려가다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군마를 타고 달려오는 테오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엄청 다급해 보이는데요?]
‘…….’
말을 빠르게 몰던 테오스는 아델리아와 거리를 두고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잠시, 아델리아와 테오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빠…….’
무정한 듯한 테오스의 붉은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2년 만에 재회하는 부녀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테오스의 눈빛은 담담했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알 수 있었다.
호흡이 흐트러져 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과 옅게 땀이 밴 이마.
테오스가 얼마나 말을 빨리 몰아 왔는지, 아델리아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테오스가 아델리아를 조금 더 바라보다 말에서 내려왔다.
급히 말을 몰고 온 사람답지 않게, 말에서 내리는 동작은 품위 있고 우아했다.
바닥에 내려선 테오스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
그 한마디가 마치 출발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아델리아는 테오스를 향해 곧장 달려갔다. 그리고는 테오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아빠!”
“…….”
예상치 못한 반응에 테오스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날, ……원망하지 않는 건가.’
자신을 먼 타지로 보내 버린 이 무정한 사람을 다시 아빠라고 불러 주는 건가…….
2년 동안 찾아가지도 않았고, 돌아오는 순간에도 집을 비운, 이 못난 아빠를.
굳어 있던 테오스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제 품에 안겨 있는 은빛 머리카락이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얼굴이 보고 싶은데…….”
테오스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중얼거렸다.
“네?”
그러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아, 그래. 보석보다 더 보석 같은 저 붉은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저와 닮은 듯, 닮지 않아 오히려 더욱 사랑스러운 내 아이의 눈동자가.
“아델…….”
테오스가 천천히 무릎을 꿇어앉으며 아델리아를 가슴으로 안아 주었다.
어어?
되레 당황한 아델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빠?”
아델리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테오스를 불렀다.
그러자 조금 뒤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구나. ……아델리아.”
“…….”
“보고 싶었다.”
순간,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테오스의 한마디에 그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응어리진 감정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단히 감동적인 말도 아니었고, 유려한 말솜씨도 아니었는데.
저를 안아 주는 이 온기와, 간결하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한마디는 그 모든 것을 어루만지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아델리아가 테오스의 등 뒤로 손을 뻗어 그를 꽉 끌어안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네, 아빠. ……다녀왔습니다.”
목이 잠겨 형편없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지금은 그 또한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