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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23)화 (123/161)

123화

“키가 컸구나.”

이 정도? 테오스가 엄지와 검지를 적당히 벌려 길이를 가늠하자, 아델리아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와! 어떻게 아셨어요?”

“한 번에 알아보겠더구나.”

대단해, 정말! 눈썰미가 장난 아니셔!

아델리아가 손뼉을 짝짝 치며 꺄륵거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데릭의 시선이 갸름해졌다.

공작저로 돌아온 테오스는 아델리아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곧장 집무실로 가 소파에 앉았다. 자신의 다리 위로 아델리아를 앉혀 놓고, 눈앞의 데릭은 아랑곳없이 두 사람만의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맞아?’

늘 무뚝뚝하기만 하던 테오스였다.

사실, 지금도 표정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델리아를 대하는 눈빛이나 목소리는 분명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애초에 아델리아를 유독 아끼시긴 했지.’

그렇다고 질투나 시기심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마음속에 숨겨 둔 그 애정을 더 표현하지 못했던 테오스가 답답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저 두 사람의 모습은 데릭이 그토록 바라던 모습이었다.

“키뿐만이 아니에요, 아빠. 보세요! 신발도 한 치수 더 큰 거로 신어요!”

“그렇구나.”

“손도 커졌고요!”

아델리아가 손바닥을 쫙 펼쳐 보이자, 테오스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펼쳐 손바닥을 붙였다.

“아직 아빠만큼 크려면 멀었는데.”

그러자 맞은편의 데릭이 웃으며 말했다.

“아델리아가 아버지 손처럼 커다래지면 결혼도 못 할 거예요.”

데릭이 누가 집채만 한 손을 가진 여자를 데려가겠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나, 테오스는 그 말이 우습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혼……?”

아델리아를 바라보던 시선과는 사뭇 다른 시선이 데릭에게로 돌아왔다.

깊은 심해를 퍼다 담아 놓은 듯 서늘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듯한 눈빛이었다.

괜히 가슴께가 서늘해진 데릭이 말을 더듬었다.

“어……, 아니. 그, 그게 말이죠.”

푸흡. 아델리아가 웃음을 터트리자 다시 테오스의 고개가 아이에게로 돌아왔다.

“아빠. 저 이제 자수도 잘 놓고요, 피아노도 제법 잘 쳐요. 음, 그리고 또.”

아델리아는 디크레드 영지에서 자신이 배웠던 수업들과 교사들의 칭찬을 떠오르는 족족 내뱉었다.

테오스는 그런 아델리아의 말을 지루한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들어 주었다.

오히려 또 다른 이야기는 없느냐며 물어봐 주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모인 세 식구만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

“에스테르 공녀가 돌아와?”

“예, 그렇습니다. 돌아온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악시덤이 혀를 찼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대공가에서 알지 못했다?”

“레샤 길드까지 불법 무기 매매 건으로 와해하다 보니…….”

레샤 길드는 악시덤이 새로 만든 길드였다.

악시덤이 공을 들여 키워 왔던 그리젤 길드가 내부 반란으로 인해 길드장이 바뀌자, 악시덤은 레샤 길드를 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황실로 들어가야 할 무기를 불법으로 팔아 이윤을 챙기던 것이 발각되어 결국 레샤 길드마저 해체되고 말았다.

‘좋지 못한 일은 한꺼번에 생긴다더니…….’

그 외에도 귀족파의 주축이었던 딜레노아 후작과 비텐테 백작의 비리가 밝혀져 재산과 작위, 영지를 모조리 황실에 빼앗겼다.

디크레드 영지에서 펠로체를 통해 들어오던 수익도 끊겼고, 거기에 악시덤이 비밀리에 운영하던 투기장 또한 연달아 드러나며 그의 명성에도 흠집이 생겼다.

‘제국민들의 신망이 떨어진 것도 문제지만, 자금줄이었던 투기장을 여섯 개나 잃은 것이 더 문제다.’

지난 2년간 계속된 악재로 대공가는 물론, 귀족파 전체 세력이 크게 휘청일 정도였다.

“지금은 공녀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비올라는?”

“오늘도 새벽부터 나가셨습니다.”

“또 그 새로 사귄 친우에게로 간 건가?”

“그렇습니다.”

악시덤이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비올라가 향초를 보관해 둔 곳이 그 친구의 저택이라고 했나.”

“예.”

악시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잘 감시해라. 허튼짓하지 않게.”

“예, 전하.”

향초를 구해 온 비올라는 그 향초를 대공가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 향초가 있어야 황제를 죽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비올라를 몇 번이나 다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 이게 다 우리 대공가와 아버지의 안전을 위해서예요. 혹여라도 이 향초의 쓰임새가 발각되었을 때, 대공가와 아버지께서 엮이지 않도록 말이에요.

변명은 그럴듯했으나, 악시덤은 알 수 있었다.

비올라가 그 향초를 볼모로 하여 자신의 명령을 교묘히 어기고 있다는 것을.

‘건방진 것.’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악시덤이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

‘돌아오자마자 무슨 티파티야…….’

아델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에스테르 영지로 돌아오고 일주일이 조금 넘은 어느 날.

아델리아가 에스테르 영지로 돌아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여러 가문에서 티파티 초대장을 보내왔다.

-뭐? 티파티? 전쟁이 코앞인데 무슨 티파티야?

-어머, 아가씨. 귀족 영애들이 전쟁 걱정하는 거 보셨어요? 그건 기사님들이나 하는 거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자, 그러지 마시고 이리 오셔서 답장을 적으셔야죠.

-세라아아…….

세라는 미리 골라 둔 초대장을 내밀며 말을 이어 갔다.

-여긴 꼭 가셔야 해요! 아시죠? 아가씨께 자수를 가르쳐 주시는 네리안느 부인의 가문이라고요.

등 떠밀리다시피 티파티에 참석하게 되어서 그런가, 영 내키지 않았다.

티파티는 네리안느 백작저의 실내 연회장에서 열렸다.

연회장으로 들어온 아델리아는 지정된 자리로 안내받았다. 의자에 앉으며 옆자리의 영애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올리비아.”

“아, 아델리아?”

생각지도 못한 아델리아의 등장에 놀란 올리비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델리아는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잘 지냈어요?”

올리비아는 아델리아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세상에, 아델리아! 돌아온 거예요?! 편지에는 그런 말이 없었잖아요!”

올리비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묻자, 아델리아가 올리비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갑자기 돌아오게 되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해요, 우리.”

응응, 반가움에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인 올리비아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와는 디크레드 영지에 머물면서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가끔 선물도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일도 챙겨 주다 보니 2년 사이 부쩍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신으로도 부족했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사이 많은 귀족 영애들이 연회장에 들어왔다.

모두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아델리아를 흘깃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많이 궁금했던 모양이야.’

[그렇겠죠! 첫 티파티에서 그 난동을 부려 놓고 갑자기 사라지셨으니!]

‘난동이라니.’

요즘 우리 릭이 겁을 많이 상실한 거 같아요. 힘을 모두 되찾았다고 간덩이가 부으셨나. 아델리아가 웃음을 섞어 가며 부드럽게 이야기하자 리그하르트가 짧게 딸꾹질을 시작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처음 등장한 티파티에서 거구의 기사를 때려눕힌 공녀가, 갑자기 요양차 지방 영지로 내려가서 2년 만에 나타났다.

‘나 같아도 궁금하긴 하겠어.’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가볍게 살폈다.

티파티에 참여한 인원은 크게 다섯 테이블로 나뉘어 있었다.

잠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영애들을 살피니 나이대로 나뉜 것 같았다.

‘오른쪽의 테이블 세 개는 사교계에 데뷔한 영애들이야.’

[성년식을 치른 영애들이란 말이군요?]

‘그렇지. 내가 앉은 테이블과 옆 테이블은 꼬맹이들뿐이고.’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키득키득 웃었다.

[따분하시겠어요.]

‘그것보다, 조금 씁쓸해.’

[엥? 왜요?]

‘여긴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티파티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 시기에도 사교계나 귀족들의 삶은 크게 긴장감이 돌지 않았다.

아델리아는 이전 삶에서 한평생을 기사로 살았다. 그리고 늘 전장을 터전으로 삼아 왔다.

그랬던 까닭일까. 자신이 티파티에 참석한 이 상황이 떨떠름했다.

‘지금 제국의 기사들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잠도 자지 못하고 전략을 세우는데…….’

지금은 겨우 티파티였지만, 듣기로는 거창한 무도회도 매일 밤 열린다고 했다.

비싼 술과 차를 마시고 구하기 힘든 디저트도 나눠 먹으며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로 온몸을 치장한 귀족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누군가는 전장에서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는데 말이야…….’

각자의 입장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러한 연회 또한 정치와 외교를 위한 자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입 안이 썼다.

아델리아가 시선을 내려 포크 끝으로 애꿎은 케이크를 푹푹 찔러 댔다.

‘푸후, 빨리 끝나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때, 뒤늦게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마지막 영애가 걸어 들어왔다.

순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영애들의 시선이 모두 그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프레이르 대공의 딸, 비올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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