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티파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러다 아델리아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어린 영애 하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상에. 프레이르 공녀시잖아요……?”
이 티파티에 참석한 영애 중, 2년 전 카를리나의 티파티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영애들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성년식을 치른 영애들은 상대적으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나마 야외 티파티가 아니라서 안심하는 듯 보였다. 적어도 이번에는 내기를 제안하며 기사들끼리 결투를 붙이지는 않을 테니까.
연회장 문으로 들어선 비올라가 태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또각또각. 비올라는 살구색이 적절히 섞인 연회장의 대리석 바닥 위를 우아하게 걸었다.
그리고는 곧장 아델리아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어어? 누님, 저 악녀가 누님한테로 오는 거 같은데요?!]
어째서인지 리그하르트는 신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시큰둥한 눈빛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이왕 시비를 걸 거면 또 초월석 같은 걸 내놨으면 좋겠다.’
[……시비를 아예 안 건다는 선택지는 없어요?]
‘이왕이면 그렇다는 거지.’
누가 봐도 좋은 뜻으로 온 것 같지는 않잖아?
게다가 티파티를 주최한 네리안느 백작 영애의 파리해진 안색을 보니, 초대장을 보낸 적이 없거나, 강제로 초대장을 보내게 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이윽고 비올라는 정확히 아델리아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아델리아를 빤히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에스테르 영애.”
“네, 프레이르 공녀님.”
비올라가 퍽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잘 지냈나요?”
그에 화답하듯 아델리아도 눈매를 접어 웃었다.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저는 잘 지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로군요. 혹여나, 지방 영지로 내려가게 된 게 나 때문일까 봐 걱정했었어요.”
“그럴 리가요. 할아버지가 계시는 영지로 요양을 하러 갔을 뿐인걸요.”
“어머, 그 독초가 자란다는 영지로 요양을요?”
“그 독초를 가공하면 약초가 되거든요. 사업을 하신다니, 잘 아시겠지만.”
“그럼요. 알고 있죠.”
하하하, 호호호.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잘 모르는 이들이 보았다면, 단순한 안부 인사쯤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호기심 반, 긴장감 반. 티파티 참석자들의 그러한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이런. 제가 또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나 보군요.”
비올라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아델리아를 스쳐 지나가 다른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네리안느 백작 영애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리안느 백작 영애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사실은 제가 사업차 다른 대륙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답니다.”
비올라는 자신이 무슨 사업을 하는지 짧게 설명했다. 주로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치품에 관한 일이었다.
“그동안 사교계가 많이 변해 다시 어떻게 적응하나 걱정했는데, 사려 깊은 네리안느 영애께서 티파티 초대장을 보내 주셨죠.”
거짓말.
아델리아가 네리안느 백작 영애의 얼굴과 비올라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짧게 코웃음을 쳤다.
저건 누가 봐도 협박받은 얼굴이잖아.
“네리안느 영애에게 고마운 마음도 전할 겸, 여러분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선물을 준비했답니다.”
비올라가 짝짝,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시종들이 포장된 상자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제가 지난 2년간 다루었던 사업 물품 중 하나예요. 다른 대륙에서는 굉장히 반응이 좋은 물건이랍니다. 이제 곧 우리 로시안트 제국의 황궁에도 납품이 계획될 정도로 최상급의 물품이니, 모쪼록 여러분들도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이게, 곧 황궁으로 들어갈 물건이라고……?’
영애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황궁 안으로 들어가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까다로운 검수 절차를 거쳤다.
황족이 직접 쓸 물건이다 보니, 작은 허점도 있어서는 안 되었고 사용된 재료들 역시 최고급 재료여야 했다.
한마디로, 최상품 중에서도 희귀 물품이라는 뜻이었다.
황궁의 황족들이 사용할 물품을 미리 받아 본다는 것 자체가 어린 영애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모두가 쉽사리 상자를 열어 보지 못하고 망설이자, 비올라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보셔도 된답니다.”
그제야 영애들이 눈치를 보며 천천히 포장을 뜯었다.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상자 안에서 향긋한 향기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어머, 향초네요?”
그 말에 다른 영애들도 하나둘씩 향초를 꺼내어 보았다.
“재스민 향기예요.”
“제 것은 장미 향기요.”
“전 오렌지 향이 나요!”
독하지 않고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향기도 향기였지만, 향초의 표면에 조각된 문양들도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문양의 곡선은 섬세했고 황금색 도료가 그 곡선을 따라 칠해져 있었다.
다양한 향기와 다채로운 문양, 그리고 색상까지.
불안으로 가득하던 영애들도 예술작품 같은 향초를 보며 조금씩 경계를 풀었다.
아델리아도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상큼하고 시원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잠입을 나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숲에서 맡을 수 있던 새벽 숲속의 향기 같기도 했다.
향기는 일단 마음에 드는데?
‘조각도 굉장히 화려하고 정교해.’
사업 때문에 다른 대륙으로 떠났다더니 죄다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킁킁, 잠깐 냄새를 맡고 있던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에게 말했다.
‘어때? 위험한 성분이 있는 것 같아?’
[겉보기로는 전혀 없어요.]
‘혹시 모르니까, 펠슨 선생에게 성분을 알아봐 달라고 해야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레이르 공녀이기 때문에 아델리아는 이 상황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2년 만에 돌아온 수도.
2년 만에 참석한 티파티.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 나타난 비올라.
‘난,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델리아는 만지작거리던 향초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맞은편 테이블의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
“이게 뭡니까?”
“향초래요.”
공작저로 돌아온 아델리아는 곧장 펠슨을 찾아왔다.
“예, 저도 눈이 있어서 그건 알겠습니다만.”
펠슨이 조제실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 갔다.
“제 조제실에는 향초 같은 거 필요 없는데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웃었다.
“사용하시라는 게 아니라, 이 향초 성분을 좀 알아봐 달라고 가져온 거예요.”
“성분이요?”
펠슨이 향초를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불에 녹아 흘러내리면 그만인 향초를 정성 들여 조각까지 새겨 넣다니.
‘거기에 금색 도료까지?’
한눈에 보아도 최상위 귀족들이나 황족들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어떤 재료가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각된 문양이 화려하기도 하고요. 그냥 보기엔 귀족 나부랭이들의 끔찍한 사치 문화 중 하나로밖에 보이질 않는데요?”
펠슨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을 듣고 아델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그 귀족 나부랭이 중 한 명이라는 거 알죠?”
“크흠.”
펠슨이 헛기침을 하며 향초를 다시 내려놓았다.
“대체 누가 준 선물이길래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물론, 조각한 향초라는 게 특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경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음, 프레이르 공녀요.”
“…….”
그녀의 대답에 펠슨의 눈빛이 단번에 바뀌었다. 그리고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바로 성분 분석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틀 뒤. 아니, 내일 아침까지 성분을 알아내겠어요!”
펠슨은 주먹을 불끈 쥐며 평소보다 더욱 열의를 뿜어냈다.
펠슨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펠슨의 형이 악시덤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거였다.
펠슨과 달리 명예와 재력에 욕심을 가지고 있던 그의 형은 악시덤의 후원을 받고 황궁 의원이 되었다.
-저는 형처럼 명예나 재력을 바라고 사람을 치료한 적은 없습니다.
펠슨은 단호했다. 게다가.
-전, 대공께서 제국의 영웅이었다는 사실도 못 믿겠습니다.
어째서인지 말을 아끼는 듯 보였지만, 펠슨은 보통의 제국민들과 달리 악시덤을 향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아는 것 같긴 한데, 가족 일이라 꼬치꼬치 캐묻기도 좀 그래.’
어쨌든, 악시덤으로 인해 두 형제는 완벽히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사람을 붙여 놓긴 했지만.’
사실, 후원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악시덤의 사람인 건 아니니까.
게다가 펠슨과는 달리, 그의 형은 크게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악시덤이 이용할 생각조차 안 하는 거 같은데,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델리아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다.”
그러다 아델리아가 불현듯 떠올랐다며 말을 이어 갔다.
“펠슨 선생.”
“네?”
“그 일이 끝나면 아빠를 진료해 주시겠어요?”
“공작 각하를 말씀이십니까?”
“네.”
펠슨이 의자를 빙글, 돌려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어디 다치시거나 불편한 곳이 있으신 겁니까?”
그런 내색은 없으셨는데……. 펠슨이 턱 끝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공작가 사람들 전원을 상대로 정기적인 검진을 했으면 해서요.”
당연히 딸의 입장으로 우리 아빠를 더 신경 써 주면 좋겠고.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아아, 펠슨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작게 웃으며 강조하듯 말을 덧붙였다.
“특히.”
아델리아가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