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세라에게는 다섯 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남동생은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하여 자주 쓰러지곤 했다.
그것이 안쓰러워 한 번씩 약초와 주치의를 보내어 건강을 살피게 했다.
‘건강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실종이라니.’
남동생이 드디어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며 환하게 웃던 세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에 들어온 아델리아는 하녀를 내보내고 복잡해진 머리를 가라앉히느라 방 안을 서성거렸다.
조금 전 만나고 온 바라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각 지방 영지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어. 그 수가 너무 적고 작위가 없는 집안의 아이들이라 크게 논란이 되지 않고 있는데…….
아델리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수도의 아이들도 하나둘씩 실종되기 시작했다고 했지.’
[누님, 설마…….]
‘응, 이거 무조건 악시덤과 연관이 있어.’
아델리아는 벗어 놓았던 망토를 다시 입으며 방을 나섰다.
데릭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간 아델리아가 성큼성큼 걸어 책상 앞까지 걸어갔다.
“오빠!”
“아델?”
놀란 데릭이 다가오는 아델리아를 쳐다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아델리아가 책상 위로 양손을 짚으며 말했다.
“휴시안! 휴시안 어딨는지 알지? 오라고 해! 당장!”
“…….”
휴시안의 이름이 나오자, 데릭의 미간이 빠르게 좁혀 들었다.
***
하하.
휴시안이 웃었다.
오른쪽으로는 데릭의 칼날 같은 시선이, 정면으로는 아델리아의 맹렬한 시선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무서운 남매네.’
휴시안이 눈매를 접어 웃고만 있자 아델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녀님, 마부가 필요했던 거야? 말을 하지. 그럼 선뜻 마차를 몰아 줬을 텐데.”
아델리아는 그의 농담에 웃어 주지 않고 조금 더 침묵을 유지했다.
‘어쩌지.’
데릭이 없었다면 조금 더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꺼냈을 텐데, 지금은 데릭도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절대 둘만 있도록 할 수 없어. 죽어도 못 나가.
데릭은 단호했다.
휴시안과 친우라고 했지만, 모든 걸 맡겨 놓을 만큼 신뢰하는 사이는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망설일 시간이 없어.’
어차피 데릭을 통해 휴시안을 부른 것 자체가 데릭에게도 자신의 계획을 밝혀야만 한다는 것과 같았다.
후우. 잠깐 심호흡한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공작가에 마부가 수십 명이야. 신입은 안 뽑아.”
“서운하네. 그래도 우리 2년간 제법 정도 쌓였잖아? 낙하산도 좋으니까 꽂아 줄 수 있잖…….”
“그것보다.”
아델리아가 휴시안의 말을 끊었다.
“모처럼 마법사님 능력이 필요해졌어.”
“응?”
휴시안이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너무해. 모처럼이라니.”
아델리아가 휴시안의 말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내 머리카락이랑 눈동자 색깔 좀 바꿔 줘.”
“…….”
그 말에 휴시안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동시에 데릭이 놀란 눈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델리아는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도발하듯 휴시안에게 말했다.
“응? 왜? 못 해? 대륙 최고의 마법사인 척은 다 하더니, 고작 그 정도도 못 해 줘?”
그러나 휴시안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고위 마법사들이나 할 수 있는 마법이야.”
“알아.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난 내 입으로 내가 고위 마법사라고 말한 적 없어.”
그러자 아델리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아아, 그랬지. 말한 적은 없었지.”
“맞아, 난 그렇게 말한 적—.”
“그냥 대놓고 마법을 써 댔을 뿐이지.”
“…….”
휴시안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델리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이어 갔다.
“시도 때도 없이 마차를 소환했다가 없앴다가.”
“…….”
그러자 데릭의 서늘한 시선이 다시 휴시안에게로 돌아왔다.
너, 이 새끼…….
“아, 아니. 그거야…….”
아델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마부석에 앉아 있다가, 마차 안으로 순간이동 했다가.”
영창도 없이 사람 머리에 불을 붙이기도 했었지, 아마.
그러자 휴시안이 매우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걸로 내가 고위 마법사라고 유추했다고?”
“확신은 없었지만, 방금 반응으로 확신했어.”
“…….”
휴시안이 잠시 시무룩해졌다.
“공녀님은 영악한 여우야. 새끼 여우.”
그러자 데릭이 “어디다 대고 여우래.” 하며 휴시안의 멱살을 냅다 움켜쥐었다.
휴시안과 데릭이 잠시 티격태격하는 동안, 아델리아는 사이좋아 보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마탑주라는 것도 안다고 하면 눈물이라도 흘리시겠네.’
“자자, 두 사람. 진정들 좀 하고. 내 부탁 들어줄 거야 말 거야?”
그러자 데릭이 휴시안의 멱살을 놓으며 물었다.
“잠깐, 아델. 외형을 바꿔서 어쩌려고?”
아델리아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세라 남동생이 실종됐어.”
“그건 나도 들었어. 그게 어쨌다고 그래? 그렇지 않아도 기사들을 풀어서 찾고 있었어.”
아델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는 안 돼. 이거, ……단순한 실종이 아니야.”
“…….”
아델리아는 바라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딱 필요한 만큼만 꺼내 놓았다.
지방 영지에서 남자아이들이 실종되는 일이 종종 일어났는데, 수도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아델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휴시안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공녀님, 가세가 기울어서 아이들을 파는 경우도 많아.”
“적어도 세라 집안은 그럴 집안이 아니야.”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세라는 물론이고 세라의 부모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남동생이 건강을 되찾자, 세라의 부모는 아델리아를 직접 찾아와 눈물을 흘려 가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단순한 실종이나 가출이 아니라, 납치라고 확신하는 거고.’
아델리아의 단단한 눈빛에 휴시안이 뺨을 긁적였다.
‘남자아이라…….’
일단 슈미엘이 연관된 일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었다.
‘슈미엘은 여자아이를 선호했으니까.’
애써 찾은 완벽한 그릇이 사내라는 점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완벽한 그릇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잠시 사용하다 버릴 그릇은 죄다 여자아이였다.
‘실종된 아이가 남자아이라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괜히 공녀 얼굴 보기가 찝찝했을 것이다.
‘어딜 가나 슈미엘이 문제야…….’
휴시안이 쯧, 속으로 혀를 차며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아니, 그건 그렇고.’
휴시안은 지금 아델리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대체, 그 하녀. 아니지, 그 하녀의 남동생이 뭐가 중요하다고 저렇게 나서는 거야?
그때,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시간 없어. 날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외형을 바꿔 줘.”
어서. 빨리! 지금 당장!
“…….”
“…….”
그러자 두 사내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아델리아가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것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던 까닭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데릭이 버럭 소리쳤다.
“안 돼! 차라리 내가 가면 갔지! 널 어떻게 보내라고!”
그러자 아델리아의 고개가 느릿하게 데릭을 향해 돌아갔다.
“오?”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말을 이어 갔다.
“오빠.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데?!”
“뭐……?”
푸하하하. 휴시안이 남매를 쳐다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수도의 번화가. 사람들이 북적이는 길에서 한참은 떨어진 으슥한 뒷골목에 어린아이 셋이 나타났다.
세 아이는 골목 안 그림자 속에 숨어 주위를 살폈다.
“왜 휴시안, 너까지 바꾼 건데?”
“어른이 있으면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아이처럼 보여야 하잖아.”
아델리아가 어이없어하자, 휴시안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여전히 이 상황이 못마땅한 데릭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날 죽이실 거야…….”
황궁에 있을 테오스를 떠올리자, 등줄기로 소름이 훅 솟구쳤다.
“해가 뜨기 전엔 무조건 돌아가야 해, 아델. 이 꼴을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데릭이 주변을 경계하듯 둘러보며 투덜대자, 아델리아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빠. 우린 누가 봐도 에스테르의 남매로는 안 보이니까!”
하아, 아델리아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데릭은 이마를 짚었다.
아델리아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 누가 봐도 그저 길거리에 흔하디흔한 평민 아이였다.
생김새도 슬쩍 바꿔 놓으니 아델리아가 아델리아로 보이지 않았다.
‘나도 저런가.’
데릭이 창문에 슬쩍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하.’
진짜 마법이로군. 데릭 역시 창문에 비친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델리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말했다.
“난 8번가 골목을 맡을 테니까 두 사람도 적절히 영역을 나눠서 돌아다녀.”
실종된 아이들 전부 집 앞 골목에서 놀다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러니 흩어져서 골목을 서성이는 것이 효율이 높았다.
그러나 데릭이 말도 안 된다며 아델리아의 손을 붙들었다.
“뭐? 각자 행동하자는 거야?”
“그게 더 빨라, 오빠. 말했잖아. 시간이 없다고. 이러는 사이에 세라 동생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아델…….”
“그리고.”
아델리아는 반지 모양의 아티팩트를 흔들었다.
휴시안이 준 위치 추적 아티팩트였다. 그것도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기도 하고 위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는 최상급의 아티팩트.
“이게 있으니까 셋 중 한 명이라도 납치당하면 위치를 알 수 있을 거야.”
그럼, 나중에 봐! 아델리아는 데릭이 붙잡기도 전에 어둑한 골목 저편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데릭이 휴시안에게 물었다.
“혹시.”
“응?”
“디크레드 영지에서도 저랬어?”
그러자 휴시안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비밀.”
“…….”
휴시안이 고소하다는 듯 배를 잡고 웃더니 아델리아가 갔던 반대 방향 골목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서둘러야 하는데.’
원체 허약했던 아이라, 이번 일로 또 어떻게 몸이 상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으니까.’
우리 세라, 지금쯤이면 울고불고 난리가 났겠네…….
그러나 초조한 아델리아의 마음도 모르고 별다른 수확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하늘과 가깝게 솟은 광장의 시계탑이 한눈에 들어왔다.
‘곧 자정이야…….’
시간이 지체되면 될수록 아이의 생존 확률은 낮아졌다.
‘나타나라. 제발…….’
제발!!
아델리아의 초조한 걸음이 다시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골목에서 서성이던 아델리아는 이번에도 역시 별다른 성과가 없자, 다른 골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어두운 골목 안쪽.
힘없이 늘어지는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얘, 얘야. 이 할미를 좀 도와주겠니…….”
어이구, 허리야, 무릎이야, 삭신이야.
그 목소리에 아델리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델리아는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요?”
“그래, 너 말이다.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골목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한 노파가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거리며 걸어 나왔다.
아델리아가 그 노파를 쳐다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거, 그거 맞지?!’
납치 전조 현상!
아델리아가 신이 나 달려갔다.
“네에! 물론이죠!”
어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