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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28)화 (128/161)

128화

카르세스였다.

‘……전하?’

아래로 내리고 있던 카르세스의 검 끝으로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니, 왜 전하께서 여기 계시는 거야?’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짙은 흑발과 그 검은 앞머리 사이로 언뜻거리는 신비로운 보라색의 눈동자는 피를 머금은 듯 붉게 빛이 났다.

전체적인 체격이 2년 전에 비해 월등히 건장해진 모습이었다.

‘나도 제법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사내아이들의 성장 속도가 엄청난 거야, 아니면 전하의 성장 속도가 비정상적인 거야?

제 손바닥으로 한 뼘 가까이 키가 자랐다고 테오스 앞에서 자랑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그때, 입구 쪽에서 두 사람이 뛰어왔다. 루드와 아스틴이었다.

“도망치던 자들도 모두 처리했…….”

루드가 카르세스에게 보고를 하다 말고 아델리아를 발견하고서 다시 검을 빼 들었다.

“붙잡혀 온 아이입니까?”

“이상합니다. 검을 들고 있습니다. 평범한 아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스틴이 잔뜩 경계하며 변장한 아델리아를 쏘아보았다.

‘아, 맞다. 나 변장 중이지.’

“아, 그게 말이죠.”

아델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아스틴을 바라보던 시선을 카르세스에게로 옮겼다.

그러자 짙어진 보라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예전보다 조금 더 서늘해진 분위기에 잠시 팔뚝에 소름이 돋았으나, 이내 카르세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델리아의 얼굴 여기저기에 머물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아델리아가 들고 있던 검으로 향했다.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성검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러나 한발 늦은 모양이다.

카르세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역시.”

무감하던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변한 게 없어, 영애는.”

“…….”

다소 극적인 2년 만의 재회였다.

***

석굴 안의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석굴 안에 있던 사내들은 모두 죽었고, 루드와 아스틴이 아이들을 옮겼다.

그 과정에서 세라의 남동생인 앤디도 무사히 구해 냈다.

그리고.

석굴의 한쪽 벽면에서 비밀 통로를 발견했는데, 비밀 통로를 따라 들어간 곳에서 작은 구슬 모양의 자폭환이 대량 발견되었다.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석굴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한동안 말없이 석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카르세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 석굴은 자폭환을 제작하는 여러 장소 중 한 곳일 뿐이야.”

그러자 아델리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곳이 또 있다는 말씀이세요?”

“맞아. 로시안트 제국으로 돌아와 이런 석굴을 처리한 게 이번이 다섯 번째거든.”

다섯 번?! 세상에, 진짜 자폭환으로 제국을 망하게 할 작정인 거야?

아델리아가 놀란 눈으로 석굴을 응시하자, 카르세스가 말을 이어 갔다.

“지금까지 찾아낸 석굴 중에 이곳이 가장 크긴 했어. 앞으로 몇 개가 더 남았을지는 알 수 없지만.”

카르세스는 저 석굴 안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일들에 대해 말해 주었다.

자폭환은 입속에 설치하는 작은 폭탄이다. 크기가 작은 만큼, 제작 과정 또한 굉장히 위험했다.

작은 실수 하나가 폭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일을 시켰던 거야.”

아이들은 틈만 나면 도망갈 궁리를 하는 성인에 비해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겁에 잔뜩 질린 아이들은 일이 끝나면 돌려보내 주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물론, 거짓말이었겠지만.

“자폭환은 아직 미완성된 물건이야. 제작 과정에서 수도 없이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지.”

그 단계에서 아이들은 계속해서 희생되었다.

“석굴 안, 철문으로 막아 놓은 방은 폭탄이 터졌을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진 거군요…….”

아델리아의 질문에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자폭환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사람의 손이 필요하거든. 최소한의 인원을 집어넣었다가, 사고가 생기면 그 세 명만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지.”

아델리아의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아이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일 수 있겠어요?!”

카르세스가 석굴 입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시는 이 석굴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거야.”

카르세스는 다른 석굴을 막았던 방법으로 이 석굴 또한 입구를 봉쇄할 거라고 했다.

석굴 입구에 결계를 치기 위해 황궁 마법사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라는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아델리아가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저 입구를 무너트리겠습니다.”

그러자 카르세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위험해, 영애.”

어차피 석굴 안의 자폭환은 옮기지 못한다. 옮기는 과정에서 폭발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은 황궁 마법사를 통해 입구를 봉쇄하는 쪽으로 처리해 왔다.

만에 하나 힘 조절에 실패하여 석굴 안쪽까지 무너져 내린다면 안에 둔 자폭환들이 일제히 터지게 될 것이다.

그 폭발이 어떤 사태를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이지 않은가.

고민하는 카르세스에게 아델리아가 다시 말했다.

“맡겨 주세요, 전하. 자폭환이 터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잠시, 카르세스의 머릿속에 아델리아가 철문을 네 동강 내고 튀어나왔던 장면이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카르세스는 어쩐지 애절하게 일렁이는 아델리아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 부탁하지.”

“고맙습니다, 전하.”

아델리아가 비장한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카르세스는 입구로 걸어가는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내아이로 변장했기 때문일까.

아델리아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기사의 강직한 모습이 엿보였다.

‘하긴, 저 아이는 2년 전에도 그랬지.’

여느 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충직함과 단단한 기개가 느껴지고는 했었다.

아델리아가 옆구리의 성검을 꺼내어 단단하게 잡았다.

그러자 후우욱— 아델리아의 주위로 낮은 바람이 일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망토가 그 바람에 휘날렸다.

이윽고 아델리아가 자신의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 상태로 오러를 성검에 실었다.

어둠 속, 산란하는 오러의 빛 가루들이 아델리아의 주위를 부유하듯 떠다녔다.

그리고 그때.

느릿하게 움직이던 빛 가루들은 성검에 빠르게 달라붙었다. 마치 흩어져 있던 힘이 성검에 응집되는 듯 보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델리아의 은빛 검은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단 일격이었다.

그 일격에 성검에 모였던 오러들이 석굴 입구의 가장 윗부분을 향해 날아가 꽂혔다.

콰가가가각! 숲의 정적이 한차례 깨어졌다.

그리고 잠시, 석굴의 입구가 천장에서부터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델리아는 돌무더기가 입구를 막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르세스는 그러한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거대한 돌무덤을 만든 거로군…….’

집으로 갈 날만 기다리다, 누군가가 구해 줄 거라는 작은 희망을 움켜쥐고 있다가 억울하게 죽어 버린 어린 영혼들의 무덤을.

‘같은 또래이기 때문인가. 저 아이의 분노가 어느 때보다 더욱더 강하게 느껴진다.’

카르세스는 아델리아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석굴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굴의 입구는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로 빈틈없이 메워졌다.

지친 아이들의 영혼에 비로소, 안식이 되었을 터다.

***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덜컹대는 마차 안은 유난히 고요했다.

수건으로 뺨에 묻은 피를 닦아 내던 카르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돌아오자마자 또 그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어.”

그의 목소리에 아델리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외형만 달라진 줄 알았더니, 카르세스는 목소리도 한껏 낮아지고 묵직해졌다.

과거의 기억 속, 성년이었던 카르세스의 목소리와 매우 흡사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델리아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카르세스가 말을 이어 갔다.

“다음번에 만나면 깜짝 놀라게 해 준다더니, 확실히 놀랄 만한 모습이긴 해.”

카르세스가 사내아이로 변장한 아델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 이런 모습을 보여 주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2년 전 아델리아가 디크레드 영지로 가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 저 카르세스였다.

아델리아가 쉬지도 않고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그녀의 안위를 위한 결단이라고 말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나도 순순히 디크레드 영지행을 받아들였고.’

그런데 2년.

2년 만에 다시 만나자마자 또 이런 꼴이라니.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아델리아는 지금 몹시도 당황한 상태였다.

아델리아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카르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일만 끝내고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렸어.”

데리러 오려고 했다고? 전하께서 직접? 아델리아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에스테르 경이 말도 없이 영애를 데려올 줄은 몰랐거든. 하지만 괜찮아.”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이 났으니까 상관없어.”

“준비요?”

“응. ……끌어내릴 준비.”

지난날, 제국의 영웅이었던 대공을. 그리고 황태자의 숙부를.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천진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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