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해가 뜨기 전 공작저에 도착한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돌아간 뒤, 그제야 반지의 위치추적 보석을 눌렀다.
그러자 휴시안과 데릭이 순식간에 달려왔다.
-아델! 어떻게 된 거야! 별일 없었어?!
-공녀님! 미친 거야? 왜 준 걸 사용 안 해?!
데릭은 거의 울상이었고 휴시안은 어째서인지 화가 나 있었다.
아델리아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두 사람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일 외에도 카르세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도 해 주었다.
휴시안은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했고 데릭은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악시덤을 끌어내릴 준비라…….’
방으로 올라온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했던 말과 그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준비라는 게 뭘까……?’
자폭환을 조사하다 석굴까지 오게 된 것을 보면, 그 준비 중에 자폭환이 포함된다는 것은 알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전쟁의 영웅이었던 악시덤을 끌어내릴 수 있을까?’
근래 악시덤의 평판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로샤크 전쟁에서 그가 활약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의 명성은 다시금 하늘로 치솟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국의 안위가 달린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는 할 수 없잖아.’
제국민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야만 한다.
그러려면 양날의 검이긴 해도, 악시덤 대공의 병력 또한 필요했다.
‘로이 말로는 악시덤이 군수 물자를 운송할 호위 병력을 모집하고 있다고 했었어.’
황제의 허락 없이 사병을 키우는 것은 반란에 해당했다. 군수 물자를 운송할 호위라고 해도 일단은 병력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법에도 허술한 부분은 있다.
사병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용병일 경우에는 반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거지.’
정말 단순하게 군수 물자의 운송을 위해 모집하는 걸 수도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악시덤이라면, 절대 그것으로 끝내지 않을 거야.’
-이제, 모든 준비는 끝이 났으니까 상관없어.
어쩐지 홀가분해 보이던 카르세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 우리 전하도 2년간 엄청나게 고생하신 것 같던데.’
좋아, 악시덤은 전하께 맡기자.
‘하긴, 악시덤과 풀어야 할 매듭은 전하 쪽이 더 시급해 보였지.’
지금 나는, 일단 로샤크 전쟁에 집중해야 해야 해.
아델리아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올렸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잠들기 위해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 뒤로도 한동안 뒤척이던 아델리아는 해가 밝아 오기 시작하자, 겨우 잠에 빠져들었다.
***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요?”
“그렇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델리아는 부랴부랴 단장을 마치고 펠슨을 만나기 위해 별관으로 향했다.
공작저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정기검진 결과가 궁금했던 까닭이다.
특히, 테오스의 결과가 궁금했다.
“정말이에요?”
재차 되묻는 아델리아의 질문에 펠슨이 플라스크에 여러 가지 가루들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각하께서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 다행이긴 한데…….”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든 게 단순히 착각이라고?
더 묻고 싶었으나 펠슨은 몹시도 바빠 보였다. 공작저 사람들의 정기검진은 물론, 향초의 성분도 알아내야 했고 아델리아가 전쟁에 필요한 약들도 주문해 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공작저 사람들도 다 이상이 없다고 그러고…….’
무엇보다 아빠가 괜찮다고 하니까.
아델리아는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펠슨의 조제실에서 나왔다.
‘내가 착각했나 봐.’
[아무 이상 없다면 오히려 다행이죠, 뭐!]
‘그렇지?’
아델리아가 안도하며 별관을 빠져나와 본관과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날씨가 몹시도 좋았다. 하늘에 구름이 몇 조각 떠다니긴 했지만, 적당히 건조한 날씨에 적당히 서늘한 바람에. 전쟁 준비만 아니면 피크닉을 떠나도 좋을 법한 그러한 날씨였다.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어가던 아델리아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별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펠슨 말이야.’
[네?]
별관을 바라보는 아델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내 눈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어.’
마치, 숨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말이지.
아델리아의 시선이 한동안 별관에 못 박히듯 머물렀다.
***
후우.
아델리아가 나간 뒤, 펠슨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들키진 않았겠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환자의 상태에 대해 거짓말한 것이 처음이었던 탓이다.
‘손을 좀 떤 것 같기도 하고.’
제발 들키지 않아야 하는데…….
어제였다. 펠슨은 아델리아의 부탁으로 테오스의 건강을 살피러 집무실로 갔다.
다행스럽게도 테오스가 황궁으로 떠나기 직전에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 테오스는 아델리아의 부탁이었다는 말에 순순히 소파에 앉아 검진을 받았다.
-시력이 어쩌다가…….
-신기하군. 다른 의원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예?
-아델리아가 선생의 실력을 극찬하는 이유를 알겠어.
테오스는 재밌다는 듯 펠슨의 실력을 추켜세우며 웃었다.
-가, 각하.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당장 원인을 찾고 치료 약을 만들어야…….
-아니. 선생은 오늘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한 거요.
-예에……?
펠슨이 멍한 얼굴로 되묻자, 테오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벗었던 외투를 다시 걸쳤다.
-더 나빠지지는 않을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지.
펠슨이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앞을 가로막았다.
-각하. 이대로라면 시력을 아예 잃으실지도 모릅니다. 그 시력으로 출정이라니요! 당장 출정을 취소하시고 치료부터 하셔야 합니다!
펠슨이 단단한 바위 같은 눈빛을 하며 테오스를 똑바로 바라보자, 테오스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펠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펠슨 선생. 그럼 우리 이렇게 하십시다.
-예? 무, 무엇을 말입니까?
-선생의 말대로 치료받겠소.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지. 다만, 이번 전쟁이 끝이 난 뒤에 말이오.
그러자 펠슨이 다시 버럭했다.
-하오나 각하, 그 시력으로 전쟁은 불가합니다!
-여태껏 이 시력으로 승리를 거두어 왔소. 이번 전쟁이라 하여 다를 것은 없어.
시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소리에도 테오스는 그저 담담했다.
-돌아오는 즉시 치료를 받을 테니, 그때까지 딸아이에게는 비밀로 하는 거요.
-저더러, 아가씨께 거짓말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모두를 위해서요. 나는 아델리아가 전장으로 따라오길 원하지 않거든. 그건, 선생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는데.
-…….
그동안의 공녀의 행보를 보면 시력을 잃어 가는 아버지를 따라 전장으로 달려갈 가능성이 컸다.
공작령에서 작은 사고들을 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생각하지만, 전쟁터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펠슨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습니다. 각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약속하신 겁니다. 돌아오시면 꼭 치료받으시겠다고요.
-약속하지.
그제야 테오스가 옅게 웃었다.
‘거짓말이라니……. 내 평생 이렇게 떨어 본 적이 없어.’
타국에서 치료를 거부했다가 식인 부족의 족장 앞까지 끌려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떨지 않았다.
‘저택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간이 작아진 거야…….’
어휴……. 한숨을 길게 내쉰 펠슨이 다시 플라스크에 배합한 재료들을 넣어 휘저었다.
밤새 책들을 뒤져 가며 공작의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찾았지만, 시간이 부족했던 것인지 치료 약의 제조법은 찾지 못했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그래도 오러 연구에 집중한 덕분에 각하의 증상이 오러로 일어난 증상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냈잖아.’
지난 2년간, 아델리아와 디크레드 영지에서 지내면서 아델리아의 오러를 연구했다.
아델리아는 약속대로 펠슨에게 자신의 오러를 보여 주고 연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전쟁이 끝나고 각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무조건 만든다.’
무조건!
펠슨의 눈동자가 남다른 각오로 반짝거렸다.
***
로샤크 연합이 불시에 제국의 경계를 넘어왔다.
선전포고문에 적혀 있던 날짜보다 한참이나 이른 어느 날의 새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야만적인 족속들!
미리 갑옷을 차려입은 데릭이 테오스의 집무실로 와 그의 준비를 도우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테오스가 무감하게 말했다.
“새삼스레.”
야만족이 약속을 지킨 적이 있었던가.
애초에 선전포고문을 보내온 것부터가 의아했다.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는 부족들이 아니었으니까.
갑옷을 차려입고 한쪽 허리에 투구를 낀 두 사람이 밖으로 나섰다.
공작저 앞으로 출정 준비를 마친 매그너스 기사단이 대열을 맞춰 대기 중이었다.
“아델?”
기사단을 향해 오던 데릭과 테오스가 아델리아를 발견했다.
아델리아는 연무복을 입고서 매그너스 기사단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아타뮴으로 만든 장비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러다 데릭과 테오스를 발견하고 기사단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아빠!”
아델리아가 달려오자, 테오스가 몸을 낮추며 아델리아를 안아 주었다.
“깨어 있었느냐.”
“아빠랑 오빠가 출정하는데 어떻게 잠을 자고 있겠어요?”
그러자 테오스가 아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올 테니.”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도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오빠도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 그만하고.
아델리아가 테오스와 데릭을 번갈아 보며 천연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에스테르잖아요. 두 분께서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에스테르의 사람으로서 영지를 지키고 있겠어요.”
아델리아의 말에 데릭이 눈시울을 적시고 테오스도 눈꼬리를 내렸다.
“아델리아…….”
“그러니까, 모쪼록 무탈하게 돌아오세요.”
아빠, 그리고 오빠도.
아델리아가 데릭과 테오스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로샤크 놈들. 까아암짝 놀랄 것이다.’
아델리아는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고 노베트가 제작한 장비들로 온몸을 두르고 있는 기사들과 테오스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아델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별을 담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전쟁은 장비빨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