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아델리아는 아타뮴 광석을 확보한 후 가장 먼저 장비부터 손보기 시작했다.
매그너스 기사단의 장비는 물론, 나아가 황태자가 이끌 황실 기사단의 장비까지.
‘장비로는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아.’
당연히 실력으로나 병력에서도 로샤크 연합 따위에 밀릴 리 없었다.
애초에 테오스나 데릭, 매그너스 기사단의 실력으로 저들에게 패배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이전 생에서 아빠가 돌아가신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상태니까, 여전히 불안하긴 해.’
그것이 어떤 변수가 되어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래도, 이번만큼은 그때처럼 허무하게 당할 생각은 없어.’
아델리아는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그 어떠한 변수가 생기더라도 이제는 그조차도 이겨 내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사실, 다른 전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수개월이 걸릴 전쟁도 마음먹기에 따라 며칠 안에 해결하고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 전쟁은 로샤크 전쟁이었다.
지난 생에서 테오스와 데릭의 목숨을 앗아 갔던 전쟁. 아델리아에게서 아버지와 오빠를 빼앗아 간 그 전쟁.
그래서 각별히 신경 썼다.
‘전술 관련해서는 아빠가 더 잘하실 테니까,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이런 물질적인 것뿐이야.’
특히, 테오스의 갑옷과 망토는 더욱 특별했다.
‘아빠 갑옷에는 내가 쓰려고 아껴 뒀던 초월석까지 박아 넣었다고!’
망토 역시 그 희귀하다는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구해다가 재봉을 맡겼다.
어지간한 물리적 공격과 흑마법도 저 망토만큼은 뚫을 수 없으리라.
‘이번에는 기필코 아빠와 오빠를 그렇게 만들었던 놈들을 찾아내고야 말 테다.’
매그너스 기사단을 둘러보던 아델리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타뮴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매그너스의 기사들이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적들을 짓밟을 것을 생각하니 등줄기가 다 짜릿짜릿했다.
테오스의 구령에 맞춰 매그너스 기사단의 출정이 시작되었다.
아델리아는 멀어지는 기사단의 행렬을 바라보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시선을 옮겼다.
황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전하. 부디 무탈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아델리아는 카르세스를 잠깐 떠올리다 몸을 돌려 공작저로 들어갔다.
***
“펠슨 선생! 향초는요?!”
테오스와 데릭, 그리고 기사단 대부분이 빠져나간 공작저는 평소보다 더욱 고요했다.
그러나 그 정적은 얼마 가지 못했다.
아델리아는 테오스 일행이 떠나기 무섭게 공작저를 돌아다녔다.
격려가 필요한 곳에는 격려를, 채찍질이 필요한 곳에는 매콤할 정도의 채찍질을.
일단, 펠슨은 채찍질이 필요해 보였다.
‘로샤크 놈들이 갑자기 일정을 당기는 바람에 향초 성분을 분석하는 게 너무 미뤄졌어.’
펠슨 역시, 로샤크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향초의 분석은 미루고 전쟁에 쓸 물약을 만드느라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펠슨은 퀭한 시선으로 조제실을 들어오는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기사단이 출정했으니 이제 좀 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어림없었다. 아델리아는 곧장 들이닥쳐 일전에 부탁했던 일에 대해 다그쳐 물었다.
“성분 알아보셨어요? 어때요?”
시간 넉넉히 드렸으니 지금쯤이면 알아내셨겠죠? 헤헤. 아델리아가 천진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펠슨이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아, 그 향초. ……잠시만요.”
펠슨의 얼굴에는 피로가 검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졌고, 그의 걸음은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기운이 없었다.
아델리아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이제 곧 다 끝날 테니까 조금만 버텨 줘요, 펠슨 선생…….’
펠슨은 책상 위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서류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더니 대답했다.
“딱히 위험한 성분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하긴, 프레이르 공녀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티파티에서 위험한 성분이 들어간 향초를 내어놓진 않았을 테지.
아델리아는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이르 공녀가 줬다는 사실만 빼면, 굉장히 좋은 사업 아이템인 것 같았어요. 이미 다른 대륙에서는 유행 중이라니까 로시안트 제국에서도 성공하겠죠.”
펠슨이 아델리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간 재료에 따라 효능도 다 다르더군요. 아가씨께서 받아 오신 향초는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향초의 향기와 색, 모양과 효능이 달라졌다. 까다로운 귀족들의 기호에 맞추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기에다 화려한 문양까지 들어갔으니, 사치품에 목을 매는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을 거야.’
그러다 문득 디크레드 영지에 있을 메릴다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께서 이런 향초를 좋아하셨지.”
프레이르 대공가의 물건만 아니었어도 잔뜩 사다가 선물해 드렸을 텐데.
아델리아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펠슨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디크레드 영지에 이 향초를요? 에이, 그건 하지 마세요. 불을 피우지 않고 감상만 하실 거면 몰라도.”
“왜요?”
“혹시나 해서요.”
“혹시나? 위험한 성분은 없다면서요?”
“네, 이 향초에 사용된 재료 중에는 위험 성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을 붙였을 때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불을 붙였을 때? 아델리아가 펠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을 붙였을 때 향초가 녹으며 특별한 성분이 연기에 섞여 나오더군요.”
“그게 위험한가요?”
“아뇨. 그것만 보면 위험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펠슨이 턱 끝을 문지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때 나오는 성분이 다른 성분과 섞였을 때 위험해지죠.”
“……그게 뭔데요?”
“폴디아퀸.”
아델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아니……. 독성이 제거된 폴디아퀸은 약재로 많이 쓰이는걸요?”
펠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크게 문제는 안 될 겁니다. 어차피 약재로 쓰일 때도 소량으로 사용되고 있고, 평민들이 사용하는 약재란 인식 때문에 귀족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향초를 들어 올린 펠슨이 향초의 화려한 조각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 향초는 평민들이 타깃이 아니죠. 누가 봐도 돈 많은 귀족들의 사치품이니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되물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귀족 중에서 사용한 사람들이 있으면요?”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긴 세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폴디아퀸을 섭취한 게 아니라면 몸속에 폴디아퀸의 성분이 남아 있을 리 없을…….”
“…….”
말을 이어 가던 펠슨이 퍼뜩 고개를 돌려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아델리아 역시 펠슨의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를 떠올렸다.
고위 귀족들이나 황족들이 사용할 법한 향초.
그리고 오랜 세월 꾸준히 폴디아퀸을 먹어 몸속에 그 성분이 남을 법한 사람이라면…….
“황제 폐하!”
펠슨이 놀라 소리치자, 아델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펠슨 선생. 황궁으로 가야겠어요.”
아델리아가 조제실을 빠져나가며 말했다.
“선생께서는 성분을 정리해서 서류로 만들어 주세요! 가지고 들어갈 수 있게!”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
황제의 알현실.
카르세스의 출정식을 지켜보고 들어온 황제는 힘없이 의자에 앉으며 나직이 말했다.
“악시덤은 이미 출발했다고.”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비올라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예, 폐하. 아버지께서는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출정하셨습니다.”
비올라는 처연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폐하, 크게 염려치 마세요. 아버지께서는 꼭, 승리를 쟁취하여 돌아오실 겁니다. 게다가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람들도 함께 출정하였으니 필승을 거둘 거예요.”
“그래…….”
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올라는 위로하듯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께서 마음을 편히 가지시라는 말씀도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맡겨 달라 하시면서요.”
그녀의 말에 황제가 손잡이에 팔꿈치를 올리며 옅게 웃었다. 낮은 황제의 웃음소리가 알현실에 잔잔하게 깔렸다.
“다정한 말, 고맙구나. ……하지만.”
황제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황제도 결국은 사람이란다. 아우와 아들, 그리고 전우들을 전쟁터에 보내 놓고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느냐.”
힘없는 황제의 목소리에 비올라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황제가 그 상자를 보며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그러자 비올라의 붉은 입술이 유려하게 휘어졌다.
“제 선물입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