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황제가 눈썹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며 광대뼈 부근을 문질렀다.
“선물?”
“예, 폐하.”
비올라는 선선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사사로이 폐하께 저는 조카가 아닙니까?”
“그렇지.”
“폐하께서 제 아버지를 걱정하시듯이, 저 또한 이 제국의 태양이시며 백부이신 폐하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지요.”
비올라는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검은 상자의 잠금쇠를 풀고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붉은 융단에 귀중히 싸여 있는 향초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드래곤이 조각된 황금색의 향초였고, 또 하나는 로시안트 제국의 수호신 크로노스가 조각된 푸른색의 향초였다.
조각의 섬세함에 감탄하고 있자니, 상자에서 싱그러운 녹음의 향기가 흘러나와 알현실을 가득 채웠다.
“폐하를 위해 특별한 재료들을 배합해 만든 향초랍니다.”
호오, 황제가 턱 끝을 매만지며 향초를 바라보았다.
“이게 2년간 타국에서 찾아다녔다던 그 향초로구나.”
“그렇습니다, 폐하. 로시안트 제국으로 가지고 오는 동안 보완할 부분은 보완하고 상품적으로 가치를 끌어올렸지요.”
“그래, 전해 들었다. 듣던 것보다 더욱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이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 폐하께 올리는 향초는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말만으로도 고맙구나.”
비올라는 황제의 흐뭇해하는 표정을 확인하고 속으로 비소를 머금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적게는 수개월, 많게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거면 충분해.’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악시덤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곧장 황제가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비올라가 상자 속 향초를 제 아이 바라보듯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무기.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최고의 도구.
‘독초나 약초에 아주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재료가 들어갔으니까.’
현재 로시안트 제국의 의사 중에는 그 정도의 능력자가 없었다.
비올라는 혹시라도 모를 변수를 대비해, 제국의 의사로 등록된 사람들을 모두 살폈다.
독초나 약초에 대해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해박한 사람들은 황실 아카데미의 교수로 지내고 있거나 황궁 의료원의 자문 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 그들이 모두 귀족파 사람이라는 거지. 다만…….’
조금 걸리는 게 있었다. 몇 년 전 새로 부임한 황제의 주치의 세니얼이 뇌물이나 회유가 통하지 않는 황제파라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독초를 전문으로 한 이가 아니라, 절대 이 성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없을 거야.’
단일 성분으로만 보면 결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을 테니까.
황제를 바라보는 비올라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쩐지, 황제의 몸속을 떠돌고 있는 폴디아퀸의 성분이 눈으로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향초에 불만 붙이면…….’
그래서 향초가 녹으며 나오는 성분이 이 알현실과 황제의 침실을 가득 채운다면.
‘아주 천천히, 정신을 무너트리고 혈관에 흐르는 피가 굳어 결국에는 저 심장마저 멎게 하겠지.’
그러한 상상을 하다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비올라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난처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머, 이 일을 어쩌지요?”
그러자 황제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향초를 켜서 향기를 맡으실 수 있도록 해 드리고 싶은데, 불을 켜 줄 아이를 알현실 밖에 두고 와서요.”
그녀가 속상하다는 듯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팔랑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황제의 뒤에 대기 중이던 보좌관, 제라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보좌관께 부탁드리고 싶은데……. 알현실이라 다른 이의 출입은 곤란하니까요.”
비올라가 싱긋, 눈을 접어 웃었다.
비올라의 부탁에 보좌관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심드렁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에 보좌관이 황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제가 불을 붙이겠습니다.”
보좌관이 향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테이블을 돌아 향초를 향해 걸어왔다.
비올라는 기다렸다는 듯 상자에서 향초 두 개를 꺼내었다.
“이 황금색 향초에 붙여 주세요. 다른 하나는 폐하의 침실에서 쓰시면 됩니다.”
황제가 향초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향초마다 향과 효능이 다르다더니. 장소에 따라 사용되는 향초도 다른 모양이구나.”
비올라가 활짝 웃었다.
“예, 폐하.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황금색 향초는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주고 머리를 맑게 하는 효능이 있으니 알현실과 집무실에 잘 어울리지요.”
“그럼 이 향초는?”
황제가 푸른색의 향초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향초는 심신을 안정시키고 불면증을 해소하기 때문에 침실에 두고 쓰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폐하.”
“그렇군.”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보좌관이 준비해 온 램프에서 불쏘시개로 불씨를 옮겨 향초로 향했다.
비올라는 불쏘시개 끝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기대 어린 눈빛으로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때.
똑똑.
알현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가 문을 두드렸다.
“폐하, 에스테르 공작가의 에스테르 공녀께서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황제가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왼손을 올려 보좌관을 물렸다. 그러자 보좌관이 들고 있던 불쏘시개의 불씨는 향초에 닿지 못하고 다시 멀어졌다.
보좌관이 뒤로 물러나며 불쏘시개의 불을 꺼트리자, 비올라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동시에 짜증이 치밀었다.
‘분명 경비에게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전해 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굳이 황제를 만나겠다고 말을 전하게 한 에스테르 공녀의 속내가 짐짓 못마땅했다.
‘기고만장한 것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구나.’
비올라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조금 기다리라 하거라.”
비올라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속으로 조소했다.
‘아무렴. 공신 가문의 아이라 하더라도, 2년 만에 찾아온 조카만 할까.’
비올라는 다시 향초에 불을 붙일 궁리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알현실 밖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에스테르 공녀께서 소원을 청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소원? 비올라가 의아하다는 듯 황제를 쳐다보았다.
턱 끝을 매만지며 고개를 기울이던 황제가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황제는 비올라에게로 시선을 옮겨 말했다.
“향초는 잘 쓰도록 하마.”
그러자 비올라가 눈을 깜빡거렸다.
‘축객령이구나.’
자신이 먼저 온 데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지만, 황제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할 말이 더 남았느냐?”
“아닙니다, 폐하.”
비올라가 한발 물러섰다. 여기서 향초에 불을 붙이는 일에 집착하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괜찮아……. 황궁에 들여온 이상,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으니까.’
황궁의 시종 하나를 매수하여 매일 향초를 피우게 해 놨으니, 지금 당장 불을 붙이지 못했다고 하여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비올라가 해맑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팔에 외투를 걸쳐 놓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폐하를 뵐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나도 그랬단다. 자주 오거라.”
“예, 폐하. 그렇지 않아도 귀찮아하실 정도로 자주 찾아뵐 생각이에요.”
그러자 황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대하마.”
비올라가 인사를 건넨 뒤,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
“갑자기 공녀와 마주쳐 놀랐겠구나. 상처가 될 소리는 하지 않았느냐?”
황제가 맞은편에 앉은 아델리아를 보며 걱정하듯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천진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얼마 전 티파티에서도 마주쳤었습니다.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상처받는 성격이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폐하.”
아델리아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무슨 일이길래 나를 찾아온 것이냐? 의원까지 데리고.”
황제의 시선이 아델리아의 뒤에 서 있는 펠슨에게로 향했다.
황제는 자신을 살린 의원이 펠슨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황궁의 의원이 되어 달라 부탁을 했지만, 펠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펠슨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델리아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향초를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이 향초에 불을 붙이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황제는 어딘가 짐작이 가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하던 짓을 한다 했더니, 이 향초에 수작을 부린 거로구나.”
황제가 비올라를 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델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로는 최상급 품질에 효능까지 뛰어난 향초가 맞습니다.”
그러자 황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런데?”
“그러나, 불을 붙이는 순간.”
아델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폐하의 몸속에 남아 있는 폴디아퀸의 성분과 작용하여 서서히 목숨을 잃게 되실 거예요.”
“…….”
알현실의 공기가 차갑게 굳었다.
조금 전, 향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불쏘시개를 들었던 보좌관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이거 참.”
황제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아름다운 것에는 독이 있다더니.”
향초를 들어 올린 황제가 보좌관을 향해 말했다.
“하마터면 자네가 나를 직접 보낼 뻔했어.”
“폐하…….”
보좌관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영악한 아이로구나. 제 손으로 직접 불을 붙일 수도 있었건만.”
알현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턱이 없는 아델리아는 그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황제는 펠슨이 준비한 서류를 들어 천천히 읽어 내렸다. 황제의 입가에 잠깐 고였던 미소가 사라졌다.
잠깐 침묵하던 황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귀한 선물을 준 공녀를 이대로 보낼 순 없지.”
그러자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프레이르 공녀를 잡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