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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32)화 (132/161)

132화

황제는 펠슨이 준비한 서류를 내려놓고 아델리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이런 증거가 있으면서 저대로 돌려보내겠다?”

황제의 물음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공녀를 잡아들이시면, 대공께서 즉시 회군하여 수도로 돌아올 테니까요.”

아델리아의 대답에 황제가 입가를 쓸었다.

“그 병력이 곧장 반란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악시덤이 이끄는 군대는 대공가의 기사단뿐만이 아니다. 금화를 풀어 모은 용병도 있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황궁에 아직 황실 기사단이 남아 있고, 공작저에도 매그너스 기사단이 일부 남아 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르기 위해 모인 악시덤의 군대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출정을 나간 아빠랑 오빠가 기사단을 이끌고 돌아오지도 못해.’

이미 로샤크 연합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죄 없고 힘없는 제국민들이 도륙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테오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어.’

황제가 아델리아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덮어 둬야겠구나.”

“네, 폐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버지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만요.”

그리고 아델리아가 향초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저, 폐하. 허락하신다면 제가 저 향초를 들고 가도 될까요?”

“무엇을 하려고?”

“프레이르 공녀는 분명 확인하려 들 거예요.”

오늘 불을 붙이지 못했으니, 어떻게든 황제가 저 향초를 사용했다는 걸 확인하려 할 것이다.

“사람을 매수하든, 직접 찾아와 자기 눈으로 확인하든.”

“그렇겠군.”

“그러니 제가 저것과 똑같은 향초를 만들어 오겠습니다. 물론, 폴디아퀸과 반응하는 성분은 빼고서요.”

아델리아가 자신 있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또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참 아깝단 말이야.”

오러만 아니었어도 카르세스의 짝이 되었을 텐데…….

“네?”

아델리아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거리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있다. 그보다. 똑같은 향초를 만들어 주겠다는 걸 보면, 앞으로 내가 비올라 앞에서 향초와 사랑에 빠진 연기라도 해야 한다는 소리 같은데.”

황제가 눈매를 접어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헤헤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꾸준히 향초를 사용하고 계시는데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무조건 초조해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그 실수 하나가 많은 것을 바꾸게 될 겁니다, 폐하.”

아델리아가 가늘게 눈을 뜬 채로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황제가 아델리아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황제인 내 앞에서 저리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저 아이뿐이겠지.’

처음 알현실에서 만났을 때도 저리 웃었다. 머릿속에 사건을 터트릴 꿍꿍이만 가득하다는 듯.

어린아이의 미소는 제법 영악했고, 제법 귀여웠다.

“그래, 향초는 챙겨 가도록 하거라.”

황제가 턱짓하자, 보좌관이 향초를 상자에 다시 담았다.

황제가 물었다.

“그리고 소원은?”

“네?”

“소원을 청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아델리아는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탄식했다.

“맞습니다, 폐하. 그랬었죠!”

“그러니 말해 보거라. 꼭 필요한 순간에 소원을 말하겠다고 했지.”

“네, 폐하.”

아델리아가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어 갔다.

“제 소원은…….”

***

철퍽철퍽, 질척대는 진흙 길 위로 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낮은 기온에 얼어붙었던 흙길이 낮 시간대의 햇살을 받아 다시금 녹았다.

“전하. 이곳에 임시 병영을 세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드가 기사들 사이로 뛰어갔다.

‘벌써 수도를 떠나온 지 한 달이나 지났나.’

카르세스가 뛰어가는 루드를 바라보다 말에서 내렸다.

카르세스가 이끈 제국군은 벌써 로샤크 연합과의 첫 번째 교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리하테르 영지에서부터 곤데라 영지까지, 북동쪽으로 이동하며 약탈을 일삼던 로샤크 연합을 조금씩 밀어냈다.

승리감에 도취한 병사들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뚝딱뚝딱, 빠르게 세워지는 막사들을 보며 카르세스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갑옷 안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새하얀 레이스 손수건이었는데, 아주 가느다란 붉은 실이 레이스를 따라 촘촘하게 박음질 되어 있었다.

한 달이 지났음에도 손수건에는 여전히 향기가 배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마법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르세스의 시선이 손수건 모서리에 머물렀다.

엄지손톱 크기의 검은색 자수가 놓여 있었다.

-석탄?

-예에? 이게 어딜 봐서 석탄이라는 거예요?!

출정 전날, 아델리아가 황궁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2년간 꾸준히 노력한 결과물이라며 자수 놓은 손수건을 건넸다.

카르세스는 네모반듯한 손수건 모서리에 놓인 검은색 자수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석탄이 아니면. 숯? 그것도 아니면 먼지 뭉치쯤 되겠군.

그러자 참다못한 아델리아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씩씩댔다.

-딱 봐도 전하잖아요! 전하!

-이게? 이 다 태운 빵처럼 생긴 게? 영애, 시력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은데.

검진받아보는 게 어떠냐는 카르세스의 말에 아델리아가 버럭했다.

-제 시력은 아무 문제 없거든요?!

그 표정이 다시금 떠오르자 웃음이 났다.

검은색 실로 대충 둥글게 자수를 놓은 게 나라니.

어이없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고.

‘천재도 모든 걸 잘할 순 없지.’

그때, 카르세스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불쑥 내민 아스틴이 손수건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 전하. 웬 손수건입니까? 주우신 겁니까? 손수건에 숯검정이 묻었습니다.”

“……숯검정이 아니다. 네 눈에는 이 새카만 게 뭐로 보이지?”

그러자 아스틴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숯검정이 아니면 오물이겠죠, 뭐.”

“…….”

카르세스가 침묵하다 천천히 손수건을 접어 다시 갑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아! 전하! 그걸 왜 그리 넣으십니까! 더럽습니다! 이리 주십시오! 제가 대신 버려 드리겠습니다! 이런 건 함부로 주우시면 안 된다고요!”

아스틴이 손을 내밀자, 카르세스가 저지했다.

“됐다.”

“에이, 새 손수건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됐다니까. 그리고. ……주운 게 아니라 내 것이다.”

“예……?”

카르세스가 단호하게 다시 한번 더 대답했다.

“내 거라고.”

“그 오물이 묻은 손수건이 전하의 거라고요? 아니, 부족한 게 없으신 분께서 뭐 그런, ……악!”

아스틴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루드에게 귀를 붙잡힌 채 끌려갔다.

“이 멍청이.”

“아야야야! 루, 루드 경! 아프, 아픕니다!”

“경은 대체 왜 그리 눈치라는 게 없어?”

“제, 제가 뭘요!”

아야!! 이거 놓고, 놓고 이야기해요! 네? 네에?! 뭔데요? 뭐길래 이래요?! 나만 몰라?! 아야야!

루드에게 질질 끌려가는 아스틴을 보며 카르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저 자수 말고 피아노도 잘 쳐요. 돌아오시면 들려 드리죠. 첫 번째로.

-그것참, 설레는 말이군.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두 뺨을 부풀리며 으스대던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했다.

‘자수 솜씨를 보면,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솜씨 또한 빤히 보이는 듯한데…….’

그럼에도, 기대가 되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카르세스는 기대어 있던 나무에서 몸을 세워 막 완성된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작게 흘러나오는 웃음이 불어오는 바람에 묻혀 조용히 흩어졌다.

***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렀다.

제국군이 출정한 지, 벌써 반년.

카르세스가 첫 번째 승리 소식을 알려 온 게 다섯 달 전이었다.

아델리아는 응접실에 앉아 로시안트 제국의 지도를 펼쳤다.

‘반년 사이에 벌써 여섯 번의 교전이 있었어.’

모두 로시안트 제국군의 승리였다.

테오스가 이끄는 매그너스 기사단이 세 번의 승리를, 카르세스가 이끄는 황실 기사단이 두 번, 그리고 악시덤의 기사단이 한 번.

‘생각보다 악시덤의 활약이 저조한데?’

아무래도 급하게 모은 용병들과 손발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나저나.

‘원래 로샤크 전쟁이 이렇게까지 교전이 잦았었나……?’

로샤크 연합의 병력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로 잦은 교전을 치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머리깨나 쓰는 놈이 지휘관으로 있는 것 같은데.’

아델리아는 지도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제국군은 로샤크 연합군을 밀어내면서 리하테르 영지, 곤데라 영지, 그리고 리난체를 거쳐 여섯 개의 영지를 더 지나쳤다.

‘이제 곧 요르헨 영지를 거쳐 트라들리아 영지에 도착하겠네.’

여기야…….

아델리아의 검지 끝이 지도 위 트라들리아 영지를 짚었다.

트라들리아 영지. 로샤크 전쟁이 마무리되는 장소이자…….

‘아빠가 돌아가신 땅…….’

지도를 내려다보는 아델리아의 눈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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