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이전 생에서 로샤크 전쟁이 어떤 식으로 치러졌는지 아는 게 많이 없어.’
당시 로샤크 전쟁에 참여했던 황제파 세력들은 모두 죽거나 살아남았더라도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로샤크 전쟁의 지휘권은 테오스가 전사한 이후, 자연스레 악시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오빠가 달려갔고…….’
연이어 들려온 데릭의 전사 소식.
그 뒤로 악시덤은 황실 기사단과 남은 기사단을 흡수하여 로샤크 연합을 전멸시켰다.
모든 정황이 의심스러웠지만, 아델리아는 그 사건을 파고들 겨를이 없었다.
고작 아홉 살.
검술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던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는 이름뿐인 가문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루하루가 고되었으니까.
그러던 중 카를리나가 나서며 로즈힐 가문까지 제국에서 쫓겨났다.
의혹과 의심, 그리고 작게나마 남아 있던 의욕마저 무력하게 휘발되었다.
‘오러가 발현되고 성검의 선택을 받기 전까진 내 목숨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찼었지.’
테오스가 전사하고 반란 세력과 연관되어 떠도는 소문 때문에 공작가의 명예까지 더러워졌다.
형체 없는 검날이 공작가를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의 별이었다가 땅으로 떨어진, 몰락가의 마지막 생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당시 아델리아의 위치가 딱 그러했다.
그 모든 일이 은폐되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로샤크 전쟁을 일으킨 자, 아빠의 죽음을 바라는 자.’
에스테르 공작가의 멸망을 기다리는 자.
‘그자가 지금 전장에 있어.’
아델리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그래서 돌아온 거라면 기꺼이.
누가 감히 우리 가문을 건드리고 무너트리려 하는지, 이번에는 반드시 밝혀내겠다고!
***
“부상자가 211명, 사망자가 382명입니다.”
보난사 영지의 한 숲속.
임시 군영이 세워진 야영지는 또 다른 교전을 준비하느라 스산한 분위기가 흘렀다.
“사망자 수가 부상자 수를 넘어섰습니다. 이례적인 일입니다, 전하.”
루드는 사망자 명단이 든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게다가 사망자의 대다수가 프레이르 대공가의 기사단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전략상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루드의 보고에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옅게 웃었다.
“초조해진 모양이지.”
자신의 전술이 먹히지 않자, 악시덤은 무리해서 진군하거나 전술을 그때그때 바꾸었다.
그때마다 기습에 당했고 많은 병력을 잃었다.
“옛 영광이 판단력을 흐리게도 하는 법이니까.”
결국, 승리하기는 했지만 출혈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조카에게마저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 출정 날짜가 정해지고 황태자가 선두에 선다 했을 때, 악시덤은 그것을 기껍게 보았다.
아무런 능력도 없고 쇠약하기만 하던 황태자. 오히려 자신이 활약할 기회가 왔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악시덤의 착각이었다.
악시덤의 투기장을 수면 밖으로 끌어낸 것도, 악시덤의 수족들을 죄다 잘라 낸 것도.
“그게 다 내 짓이라는 걸 알게 되면 당장 이곳으로 달려오실지도 모르지.”
그것도 보는 재미가 쏠쏠하겠구나.
카르세스가 소리 없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루드에게 물었다.
“클리프에게서 연락은?”
“일주일 전의 서신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
카르세스의 검술 스승인 클리프 에일러블 백작은 지금 악시덤의 곁에 있다.
2년 전, 인재를 욕심내던 악시덤이 클리프의 능력을 높이 사 곁에 두고자 했던 탓이다.
클리프를 악시덤에게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클리프는 오히려 이것이 기회라고 했다.
-전하. 제가 대공의 곁으로 가겠습니다. 대신…….
클리프는 카르세스를 위해 스스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일이 잘못되었을 시, 가장 먼저 죽게 되는 그 자리로.
클리프가 악시덤의 곁에서 정보를 빼내 온 덕분에 악시덤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투기장이 몇 개인지, 황제파 세력에 잠입한 악시덤의 첩자들이 몇이나 되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클리프를 항상 곁에 끼고 다니던 악시덤이 어느 날부터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은데.”
“전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눈치껏 빠져나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냈으니 미련을 두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빠져나올 적절한 시기를 놓치게 된 듯했다.
카르세스가 어금니를 슬며시 사리물었다.
그때 아스틴이 나섰다.
“전하, 제가 프레이르 대공가의 진영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침음하다, 고개를 저었다.
“전시 중이다. 혼자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하지만……. 대공가의 고문 기술이 끔찍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클리프는 에일러블 백작가의 가주다. 쉽게 입을 열지도 않겠지만, 숙부도 쉽게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군사 기밀을 빼내었다는 죄를 물을 작정이었다면 진작에 카르세스 쪽으로 거래를 걸어왔을 것이다.
한동안 생각에 빠졌던 카르세스는 테이블로 걸어가 펼쳐 두었던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프레이르 대공가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승리를 이끌어 제국군의 사기를 끌어 올린 것은 축하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카르세스는 전사한 기사들의 명단을 정리해 올리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 전투가 코앞이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전장에만 집중한다.”
“예, 전하.”
“……예.”
그것은 수하들을 향해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카르세스가 지도 위의 한 영지를 손끝으로 짚었다.
“내일이면 이곳, 요르헨 영지에 도착한다. 더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
아델리아는 시커먼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는 전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여긴, ……어디지?’
낯선 땅이었다.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 듯, 폐허가 된 마을. 아델리아가 주위를 조심스레 두리번거렸다.
그때.
꽈앙—! 쾅! 콰르르르—!
굉음이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각하!”
“아버지!”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딘가로 달려가는 데릭이 시야로 들어왔다.
‘오……, 빠?’
“아버지! 아버지이!”
데릭이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데릭의 앞에는 새하얀 교회 강당을 뒤덮은 화염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설마.
설마……!
저 건물 안에 아빠가 있다는 건 아니지? 거짓말!!
상황은 처참했다.
건물을 휘감은 붉은 불길,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는 데릭.
그리고 그런 데릭을 온몸으로 막아선 기사들과 처절하고 애처로운 절규.
화염이 일으키는 열기와 광풍까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전쟁터……?’
전장?!
그때, 다시 한번 굉음이 터졌다.
콰앙—!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 성당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 안 돼……. 안 돼!
“아빠아아!!”
아델리아가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누님? 괜찮으세요?!]
“허억, 헉, 헉…….”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초조함과 불안함이 한데 뒤섞여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누, 누님?]
“꿈……?”
꿈이라고? 이토록 생생한데, 이게 다 꿈이라고?
‘언제 잠들었었지……?’
아델리아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이었다.
‘아……. 맞아. 어제는 몸이 으슬으슬해서 일찍 잠들었지.’
아델리아는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까지 깨지도 않고 푹 잔 걸 보면 개운해야 정상인데, 악몽 때문인지 전혀 개운하지 못했다.
[괜찮, 으세요?]
리그하르트가 다시 묻자, 아델리아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아델리아는 빠르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책상으로 달려갔다.
[누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대체 무슨 악몽을 꾸셨길래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 악몽으로 그치면 좋겠다. 불안한 마음이 그저 꿈으로 발현된 거라면 좋겠어.
하지만.
-예언가가 나오는 집안이었기에, 예지몽을 꾸기도 했단다.
‘…….’
아델리아는 메릴다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아니면 다행이지만, 이게 정말 예지몽이라면?’
하필, 트라들리아 영지를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아, 안 돼.’
아델리아는 급히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서랍 안쪽에 보관해 두었던 반지가 반짝였다.
휴시안이 준 반지였다.
-이거 도로 가져가야지.
-아니, 공녀님은 가지고 있어.
-왜?
-나 필요할 때마다 데릭을 찾아갈 순 없잖아?
-……필요할 때마다 불러라?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뭐, 그러든가.
아델리아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뒤, 망설임 없이 붉은 보석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