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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34)화 (134/161)

134화

아침 일찍부터 비올라가 황궁을 찾았다.

황제를 만난 뒤, 알현실을 빠져나온 비올라는 인적이 드문 정원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비올라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작은 목소리로 이름 하나를 불렀다.

“네시아.”

그러자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하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 갑자기 이렇게 찾아오시면……. 이러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저는 죽습니다…….”

네시아는 퍽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비올라는 그런 그의 사정 따위 어차피 관심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황제의 향초였으니까.

비올라가 물었다.

“매일 향초를 사용하시는 게 맞니?”

그러자 네시아가 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에도 적었지만, 제가 매일 불을 켜고 꺼진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공녀님께서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으니 염려하지 마셔요.”

그러나 비올라는 전혀 안심되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침실뿐 아니라, 집무실이나 알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보내 주신 향초는 폐하께서 머무는 공간이라면 항상 켜 두고 있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비올라는 하녀 네시아에게 돌아가 보라며 손짓했다.

네시아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비올라가 손톱 끝을 물어뜯었다.

반년이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사용하고 있는데…….

‘왜 반응이 없지?’

지금쯤이면 한 번이라도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야만 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었다.

‘성분 배합에 문제가 있나…….’

아니, 그럴 리 없어. 얼마나 고심해서 만든 건데.

이대로라면 얼마 있지 않아 전쟁이 끝이 날 것이다.

‘그 전에 황제가 죽어야 해…….’

전쟁의 영웅이 되어 돌아온 자신의 아버지가 타이밍 좋게 황제 자리를 계승할 수 있도록.

‘효능을 조금 더 강하게 만들라고 해야겠어.’

서서히 자연사를 위장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어.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비올라가 붉은 입술을 짓씹으며 황궁을 빠져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

“뭐? 성인 남자로 변장시켜 줄 수 있냐고?”

아델리아를 찾아온 휴시안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아델리아는 소파로 걸어와 휴시안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응, 성인을 아이로 보이게끔 하는 마법이 있잖아. 그럼 역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늘어놓는 아델리아의 이야기에 휴시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 마법이 가능하다 쳐. 그런데 왜 갑자기 어른 흉내를 내겠다는 거야?”

“이 모습으로는 전쟁터에 갈 수 없잖아.”

“뭐?! 전쟁터?!”

휴시안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전쟁터를 공녀님이 왜 가려고 하는데? 아니, 그보다 그런 마법은 진짜 진짜 고위 마법사들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넌 할 수 있다는 거 다 알아. 아델리아가 생글거렸다.

하, 짧게 웃음을 터트린 휴시안이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더니 갑작스레 싸늘한 눈빛으로 아델리아를 응시했다.

“공녀님.”

“응.”

휴시안이 아델리아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갸름해진 눈매 사이로 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한 번씩 보면 나에 대해 되게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더라?”

“잘 알지.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이 바로바로 마법을 쓴다는 거랑, 순간 이동 마법도 자유자재로 쓴다는 거랑. 그리고.”

아델리아가 천진하게 웃었다.

“마차도 잘 몬다는 거.”

“…….”

나 참. 휴시안이 아델리아의 대답에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공녀님. 그거 알아?”

“뭐?”

“마탑의 마법사들은 제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 것치고 계속 내 주위를 맴돌았잖아?”

“공녀님 주위에서 마차를 끌어 준 것 정도는 취미 생활쯤 되는 거지, 제국 일에 끼어든 건 아니었어.”

기본적으로 마탑은 중립의 입장이었다.

어느 한 세력에 치우치지 않았고 힘을 실어 주지도 않았다.

특히, 휴시안은 마탑의 우두머리. 마탑주의 위치에 있었다.

‘하긴, 내가 휴시안의 힘을 빌려 전쟁에 나가는 건 마부 일을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긴 해.’

아델리아는 휴시안에게 도움을 요청한 입장이었지만, 그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까진 없었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뭐.’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알겠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

그때, 휴시안이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기사 말고 말이나 관리하러 가자.”

“……응?”

말? 쟤는 디크레드 영지에서도 마부를 하더니, 재미 붙였나…….

아델리아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 말. 날 도와주겠다는 말이야?”

휴시안이 팔짱을 끼며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그냥 돕겠다는 게 아니야. 방금 말했잖아. 기사 행세는 안 돼. 마탑에 변장 마법을 사용한 게 들키면 내가 곤란해지거든. 그러니까.”

휴시안이 아델리아의 목 언저리로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 목걸이인 척하는 검도 사용하면 안 돼.”

그러자 아델리아가 목걸이를 숨기듯이 거머쥐었다.

‘혹시나 했는데, 저 녀석 네가 성검인 것도 눈치챈 것 같아.’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음흉한 놈이라고.]

아델리아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휴시안을 쳐다보았다.

“이게 검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제 그런 질문 무의미하지 않아? 어차피 내가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거 알면서.”

“…….”

휴시안의 대답에도 아델리아가 뾰족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휴시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래 신력과 마력은 상극이야. 기분 나쁜 게 옆에 있으면 본능이 반응을 해. 불쾌하다고.”

[뭐, 뭐?! 와! 나, 참! 자기만 기분 나쁜 줄 알아! 나도 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거든! 나도 불쾌했거든!]

리그하르트가 버럭 성질을 부리며 진동했다.

그러자 리그하르트를 응시하던 휴시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삐졌나 본데?”

“…….”

짧게 키득거리던 휴시안이 강조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약속해. 그 검. 사용하지 않겠다고.”

그러자 아델리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그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반격하지 말고 얌전히 죽으란 소리야?”

아, 그건 또 그러네? 휴시안이 미간을 구기며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으음……. 좋아. 그럼 진짜 진짜 위험할 때만.”

휴시안의 변덕에 아델리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뭐야, 그게. 뭐가 이렇게 물러?

‘오히려 좋아.’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럴게. 평소에는 안 쓸게. 위험할 때만.”

“응. 약속한 거야, 공녀님.”

“그래, 약속한다니까?”

아델리아가 확답하자, 휴시안이 소파에서 일어나 거울로 걸어가며 말했다.

“좋아. 재밌겠다. 나랑 공녀님은 군마를 관리하는 군마대의 말단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그러면서 휴시안은 군마대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거울 앞에 도착한 휴시안이 아델리아를 돌아보며 불렀다.

“이리 와 봐, 공녀님.”

“응응.”

아델리아가 쪼르르 달려가 거울 앞에 섰다.

“남장이라…….”

아델리아가 거울에 비친 휴시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시안이 턱 끝을 매만지며 아델리아를 위아래로 살폈다. 휴시안이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자, 아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 스무 살 정도로 보이면 좋을 것 같아.”

현재 제국에는 공식적으로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여기사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모로 남장하는 게 편할 거라고 판단했다.

‘여차하면 검을 들어야 하니까.’

그런 아델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간 휴시안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남자?”

“응.”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런 거 말고 이건 어때?”

“응?”

말이 끝남과 동시에 휴시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러자 아델리아의 몸이 순식간에 바뀌며 단번에 시야가 높아졌다.

키가 훌쩍 자랐고 팔다리도 키에 맞춰 길쭉해졌다. 그리고 높이 묶은 은발도 허리까지 늘어져 찰랑거렸다.

‘어? 은발?’

아델리아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이, 이……. 이게 뭐야!”

“난 이게 훨씬 좋은데.”

남장보다. 휴시안이 히죽거렸다.

거울 속에는 스물일곱 살의 아델리아가 서 있었다.

그러니까 축제가 한창이던 수도 광장, 그 광장에 전시되었던 마탑의 거울에 비쳤던 그 아델리아였다.

-나, 거울에 비친 공녀님을 봤어.

그게 정말이었네……. 그때 봤던 내 모습이랑 똑같아.

아델리아가 잠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넋을 놓았다.

이상하게도, 분명 과거의 제 모습이었건만.

‘왜 이렇게 낯설지…….’

어느새 어린아이의 몸에 적응해 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때, 거울 속 휴시안과 눈이 마주쳤다. 휴시안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진짜 이 인간이.’

아델리아가 휙 몸을 돌려 휴시안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왜? 마음에 안 들어?”

난 마음에 드는데.

“공녀님, 조금만 더 자라면 이렇게 미인이 되는구나.”

아델리아가 휴시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변장을 재미로 해? 신분을 숨기기 위해 하는 거잖아.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그대로 두면 나 에스테르다, 하고 광고하는 거밖에 더 되겠냐고.”

“아, 그렇지?”

휴시안이 손바닥에 주먹을 내리치며 새삼 깨달았다는 듯 웃었다.

아니, 저런 머리로 마탑주는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마탑 괜찮은 거 맞아?

“당장 남자로 바꿔.”

그러자 휴시안이 시무룩해졌다.

“……알았어.”

짧게 대답한 휴시안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은색 머리카락 색이 갈색으로 바뀌고 붉은 눈동자가 연녹색 눈동자로 바뀌었다.

치렁치렁하던 머리카락도 귀밑까지 짧아졌다.

“와아……. 진짜 이게 되네?”

아델리아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감쪽같아.”

그러자 휴시안이 가슴을 내밀며 뻔뻔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누구긴, 마탑주지. 그냥 자신이 마탑주라고 밝히지 그래. 아델리아가 속으로 대답한 뒤 작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자, 이제 데려다줘.”

준비는 끝났다.

아델리아가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그 빈자리는 휴시안이 마법으로 만든 인형이 대신할 것이다.

세라에게만 인형에 대해 털어놓았다.

‘인형이 아무리 감쪽같다고 해도, 온종일 붙어 지내던 세라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테니까.’

그리고 휴시안을 본 일과 아델리아가 전장으로 향한 일을 함구하라며 단단히 당부해 놓았다.

-세라, 공작저를 잘 부탁해.

-아가씨이……. 꼭 아가씨께서 가셔야 해요?

-응, 세라. 아빠가 이게 꼭 필요하시대. 아마 흑마법사들이 나타나서 신전 물건이 필요하신 것 같았어.

아델리아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작은 상자를 보여 주며 세라를 안심시켰다. 상자 안에는 신전에서 사 놓았던 반지 하나를 넣어 놓음으로써 구색을 갖췄다.

-이것만 전해 드리고 금방 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절대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흐어어엉. 몰라요! 위험한 일 안 하겠다고 하셨으면서! 전장이라니. 아가씨께서 전장이라니!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 세라를 달래느라 한동안 진을 빼긴 했지만…….

‘전쟁이 무사히 끝나는 것만 보고 돌아오면 돼.’

그러한 아델리아의 결의가 표정으로 드러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휴시안이 물었다.

“정말 가야겠어? 거긴, ……알고 있겠지만 전쟁터야.”

“응. 가야 해. 꼭.”

내가 돌아온 이유가 그곳에 있으니까.

아델리아의 눈빛이 더욱 진중해졌다.

휴시안이 아델리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가자, 데려다줄게.”

“응.”

마지막 격전지, 트라들리아 영지로 향하는 마법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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