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로시안트 제국군의 임시 진영, 아델리아가 트라들리아 영지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이봐! 에벤! 서둘러! 그렇게 굼떠서는 오늘 하루 종일 씻겨도 다 못 씻긴다고!”
“아, 예! 지금 갑니다!”
군마대 소속의 기사가 아델리아를 ‘에벤’이라는 가명으로 불렀다. 휴시안이 정해 준 가명이자, 신분이었다.
아델리아는 크게 대답하고서 자연스럽게 도구들을 챙긴 뒤 마구간으로 향했다.
‘바보 휴시안! 멍청이 마탑주!’
아델리아가 저만 남겨 두고 사라진 휴시안을 속으로 욕을 해 댔다.
아침의 해가 뜨자마자, 휴시안은 갑자기 여동생 때문에 가 봐야 한다며 급히 사라져 버렸다.
-공녀님.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고 군마들 틈에서 잘 숨어 있도록 해.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뭐, 뭐?
-그사이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그럴 땐 저쪽에 대머리 보이지?
휴시안은 몰트라는 대머리 기사를 소개해 주었다. 몰트는 군마대 소속, 군마를 관리하는 기사였는데 꽤 오래전부터 휴시안과는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몰트에게는 미리 말해 놨으니까 여차하면 군마 하나 훔쳐다가 달아나. 알겠지?
휴시안은 괜히 맞서다 죽지 말고 달아나라는 말만 남긴 뒤 사라졌다.
‘전장에서 군마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면서.’
군마를 빼돌리거나 군마 관리에 소홀했다가는 군령에 따라 처단당하기 일쑤였다.
‘내가 군마를 빼돌려 달아나면 몰트라는 사람 목도 달아날걸?’
으휴. 아델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군마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향했다.
‘오히려 잘됐어.’
이제 자신을 감시하던 휴시안도 없으니 움직이는 게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문제는.
‘이곳이 에스테르 기사단이 있는 곳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가 있는 황실 기사단의 진영이라는 거지.’
왜 아빠가 있는 진영이 아니라 이곳이냐고 따져 묻는 아델리아에게 휴시안은 천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트라들리아 영지로 가자며. 여기잖아.
-아빠가 안 계시잖아!
-공녀님의 아버지께서 늦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기다리다 보면 합류하겠지.
-오빠랑 마주치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
-…….
휴시안이 대답하지 못하고 딴청을 피우며 자리를 피했다.
어쨌든, 마지막 격전지는 트라들리아 영지가 맞다.
기다리면 곧 테오스가 이끄는 매그너스 기사단도 이곳, 트라들리아 영지에 당도할 것이다.
‘하루 이틀 기다리는 것쯤이야.’
아델리아는 지난 이틀간, 낮에는 군마를 관리하고 밤이 되면 트라들리아 영지 주변을 몰래 돌아다니며 정찰병 행세를 했다.
‘아빠가 합류하시기 전에 위험 요소가 있는지 확인하고 미리 처리하려고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위험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 전하다.’
마구간에 도착한 아델리아가 물통을 내려놓고 잠시 허리를 세웠다.
카르세스가 루드와 아스틴을 거느리고 임시 진영의 막사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벌써 다섯 번째야.’
그러다 보니, 이제는 카르세스를 보아도 크게 놀랍지 않았다.
‘첫날에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지.’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보는 건 아닌가 하고,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굳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에게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는 다른 기사들에게 관심을 쏟을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그 뒤로 아델리아는 당당하게 돌아다녔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던 첫날과는 달리, 지금은 거추장스러운 망토도 집어 던진 채였다.
‘보라면 보라지!’
마탑주가 작정하고 걸어 준 변장 마법인데, 아무렴 들키기라도 하려고!
아델리아는 미리 준비해 온 솔을 이용하여 군마 한 마리를 잡아다 빗질을 시작했다.
***
“저건 뭐지?”
자신의 막사로 향하던 카르세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카르세스를 따라 걸음을 멈춘 루드가 군마들 틈에 서 있는 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 이틀 전 합류한 군마대 소속 관리입니다.”
“군마대?”
“예, 저번 전투로 심하게 다친 관리들이 있어서 이번에 함께 보충되었습니다.”
“…….”
카르세스가 군마의 빗질에 열중인 한 사내를 지긋하게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연녹색 눈동자. 제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외형이었다.
사내의 빗질은 시원시원했다. 스펀지와 솔을 이용해 말의 말발굽과 몸통 전체를 훑어 내는 손길은 꽤 노련해 보였다.
‘젊어 보이는데.’
군마를 손질하는 모습만 보면 전장에서 한참은 구른 노장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아스틴이 입을 열었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꽤 좋습니다.”
“그렇군.”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이다 몸을 돌렸다.
“매그너스 기사단은?”
“내일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루드의 대답에 카르세스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멀리서 힐끔거리던 아델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을 보시는 것 같던데.’
착각인가?
아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군마를 손질하는 일에 몰두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되게 재밌네.’
결대로 빗질하고 물을 뿌려 마사지하듯 쓸어 주고 말발굽을 하나씩 들어 올려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오전에 시작했던 일은 하늘이 어둑해진 뒤에야 끝이 났다.
‘역시 난 머리 쓰는 것 보다 이렇게 몸 쓰는 게 체질인가 봐.’
“휴우.”
아델리아가 마지막 군마를 손질하고 난 뒤, 허리를 펴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땀을 흠뻑 흘렸더니 머릿속까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노동의 순기능인가!’
반질반질 광택이 흐르는 군마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뿌듯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델리아가 높다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저녁이네.’
밤하늘 사이사이로 콕콕 박혀 있는 별들이 장관이었다.
“어이, 신입!”
그때. 아델리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휴시안과 친분이 있다던 몰트였다.
“그만하고 식사부터 하지!”
“아, 네! 갑니다!”
아델리아는 물통과 솔 등을 챙겨 부랴부랴 몰트에게 달려갔다.
몰트가 도구 정리를 도우며 말했다.
“잭의 사촌 동생이라더니, 어째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하하, 하하하. 그, 그렇습니까……?”
잭은 휴시안의 가명이었다. 휴시안은 몰트에게 자신의 사촌 동생, 에벤이라며 아델리아를 소개했다.
몰트가 우람한 상체를 꿈틀거리며 커다란 물통 속 구정물을 쏟아 버렸다.
“왜소한 체격에 비해 말을 돌보는 솜씨가 아주 제대로야!”
크하하하! 몰트가 호탕하게 웃으며 아델리아의 등을 퉁퉁—! 두들겼다.
‘윽!’
아델리아가 휘청거리자, 몰트는 가벼운 짐보따리를 들 듯이 아델리아를 달랑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식사가 배급되는 장소로 이동했다. 막 배급이 시작되어서인지, 줄이 생각보다 길지는 않았다.
끌끌, 몰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많이 먹어. 에벤 경. 두 그릇 달라고 해서 잔뜩 먹어.”
“예, 몰트 경.”
줄이 조금씩 짧아졌다. 아델리아 앞에 서 있던 몰트가 그릇 한가득 수프를 받으며 물었다.
“그런데 에벤 경. 이렇게 비실대는 몸으로 군마대에 올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하하, 아델리아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말을 좋아해서 괜찮습니다.”
주르륵, 아델리아의 투박한 나무 그릇에도 옥수수로 만든 말간 수프가 가득 채워졌다.
두 사람은 그릇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받쳐 들고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나무 기둥을 찾아 자리 잡고 앉았다.
몰트가 아델리아를 쳐다보며 기특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하긴 하지. 오늘도 고생했네. 배고플 텐데 어서 들지.”
“예.”
후루루룩. 수저를 쓸 필요도 없을 만큼 수프는 묽었다. 달리 말하자면, 물처럼 묽었기 때문에 후다닥 마시기가 좋았다.
속이 뜨끈하게 데워지자,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노곤해졌다.
그렇게 그릇의 절반을 비웠을 때쯤, 몰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사촌 형이 보이질 않는군.”
뜨끔. 괜히 지레 놀란 아델리아가 말을 버벅거렸다.
“아, 아까 머리가 아프다던가. 해서 막사에서 쉬, 쉬고 있을 겁니다.”
크흠, 아델리아가 헛기침했다.
‘휴시아아안…….’
돌아오기만 해 봐라.
‘왜 내가 휴시안의 행방까지 변명하고 앉아 있는 거야?!’
아델리아가 수프를 다시 들이켜며 속으로 으르렁거렸다.
에스테르 공작저에 아델리아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두었던 것처럼, 휴시안과 똑같은 인형을 만들어 두면 편했을 텐데 휴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한 거지. 제국과 협의 없이 전장에서 마법을 사용하면 안 되니까.’
인형을 만들어 두는 것도 마력이 들어가는 마법 중 하나였다.
오러 발현자들이 있는 전장에 마법으로 만든 인형을 세워 두는 것은 마법사가 전장에 개입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다.
‘우유부단하고 제멋대로인 것 같다가도, 이런 부분에서는 엄격하단 말이지.’
그러다 문득,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몰트 경께서는 잭……, 경과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그러자 몰트가 풍성하고 곱슬곱슬한 회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음. 그 친구가 워낙에 붙임성이 좋아서 말이야.”
“아. 그렇긴 하죠.”
몰트는 휴시안을 남부, 렌드월 영지에서 만났다고 했다.
당시 휴시안은 렌드월 백작가의 기사단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말을 다루는 실력이 특히 뛰어나 군마대에 영입하려고 했었다고.
“극구 사양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지 뭔가.”
몰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몰트의 이야기를 쭉 듣다 보니, 하루 이틀 쌓인 신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에 진심인 거 같기도 하고.’
디크레드 백작가의 마구간지기로 들어온 것도 어쩐지 이해가 갈 것만 같았다.
그때, 아델리아의 시야로 배급소를 향해 걸어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아스틴이었다.
헙, 놀란 아델리아가 수프 그릇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쟤가 여긴 왜 온 거야?’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그의 걸음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여태껏 식사 시간이 겹친 적이 없는데…….’
전장에 온 지 끽해야 이틀이지만 황태자 카르세스 일행과 식사 시간에 마주쳤던 기억은 없다.
아스틴은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아델리아를 발견하고 그대로 걸어왔다.
[누님. 누님한테로 오는데요?]
아델리아는 고개를 돌린 채 눈동자만 빠르게 굴렸다.
‘아, 아니. 대체 왜?!’
[에이, 왜겠어요?]
‘뭔데!’
헤헤, 얄밉게 웃던 리그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델리아의 곁에 선 아스틴도 동시에 말했다.
[들킨 거죠.]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