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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36)화 (136/161)

136화

‘아! 왜!’

또 왜! 어디서, 무엇 때문에 들킨 건데?!

아델리아가 허탈하게 수프 그릇을 떨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스틴의 서늘한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향했다.

“저, 전하께서요? 저를요?”

“그래.”

짧게 대답한 아스틴이 몰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몰트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몰트 경. 이 사내를 잠시 데려가겠다.”

그러자 말없이 수프 그릇을 비워 낸 몰트가 입가를 쓰윽 닦은 뒤 물었다.

“혹,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가뜩이나 손이 부족한 군마대였다. 하루에 보살펴야 하는 군마만 수천 마리에 달했다.

비록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왜소한 체격에 그다지 쓸모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을 다루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내가 안 보는 사이 사고라도 쳤나……. 큰 잘못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막아 봐야지.’

그런 몰트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아스틴이 순순히 대답했다.

“전하께서 전하의 군마를 이 사내에게 맡기고자 하신다.”

순간, 몰트의 눈이 커졌다.

“저, 전하의 군마를!”

몰트가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어……? 조금 불안한데?

아니나 다를까, 몰트는 가문의 영광이라고 소리치며 말했다.

“자네 실력을 눈여겨보신 게 분명해!”

아……. 아니, 그런 거 아닌 거 같은데…….

“모, 몰트 경.”

몰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하는 게야. 어서 가야지! 전하의 군마는 영물이라 해도 좋을 만큼 명마거든! 말을 좋아하는 자네에게 좋은 말을 구경할 기회가 될 걸세!”

“네? 아, 아니……!”

자, 잠깐만요! 몰트 경!

아델리아는 몰트의 손에 의해 무력하게 끌려갔다.

***

“에벤 크피루 경.”

“예, 전하.”

“이틀 전에 합류했다고.”

“맞습니다.”

카르세스의 막사에 들어온 아델리아는 단둘만이 남은 이 상황이 굉장히 껄끄러웠다.

‘루드랑 아스틴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카르세스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서류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사촌 형과 같이.”

“그렇, 습니다.”

카르세스의 질문에 아델리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카르세스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아델리아는 잠깐 숨을 멈췄다.

‘또 저 눈빛.’

오랜만이라 반갑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아델리아의 반가움과는 달리, 카르세스는 처음 아델리아를 만났을 때처럼 경계하고 의심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그때는 에스테르 공작가라는 방패막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아니잖아……!

[설마, 또 죽이려고 하겠어요?]

‘그, 그렇지?’

하하,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쳐다보며 무해하게 웃었다.

드르륵, 카르세스가 의자를 밀어내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하씨. 쫄았어!’

크흠. 아델리아가 목을 가다듬었다.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내 군마를 보여 주지.”

“아, 넵!”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따라 막사를 나섰다. 가만히 카르세스를 따라가다 보니, 문득 자신이 카르세스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와……. 매번 전하를 올려다보기만 했는데.’

지금은 내가 더 커! 한 뼘 정도지만…….

카르세스의 뒤를 따라가던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의 뒤통수와 정수리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막말로, 지금 내 정신연령은 스무 살이 넘으니까 누나뻘 아니야?

그때, 카르세스의 날 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쩐지 불손한 생각을 하고 있는 표정이군.”

“예? 네? 아, 아닙니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카르세스가 걸음을 멈춘 채, 군마 옆에 서서 아델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웃고 있었나.’

아델리아가 입가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군마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서가 아니네?’

회귀 이전, 성년이었던 카르세스의 군마는 아서라는 이름을 가진 흑마였다.

‘아, 맞다. 아서도 울프랑 같은 나이였지.’

아직 울프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아서 역시 태어나기 전일 것이다.

‘그렇다는 건, 저 군마가…….’

아델리아는 짙은 갈색 갈기를 가진 군마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레오니드…….”

카르세스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 전장에서 그를 대신해 화살을 맞고 죽음을 맞이했다던 그 군마.

그러자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 군마에 대해 알고 있나?”

“황태자 전하의 군마는 유명하지 않습니까. 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자기 말을 칭찬했기 때문일까, 카르세스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나 말고는 손대는 것을 싫어한다.”

레오니드는 나이가 많았다. 그만큼 전장에 선 횟수도 많았고 관절이나 근육에 쌓인 피로도도 높은 편이었다.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군마들 대부분이 그렇지요.”

아델리아의 말에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벤 경이 손질하던 군마들은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아……, 그, 그랬습니까?”

“밑져야 본전이니, 맡겨 보려 하는데.”

하하, 밑져야 본전……. 여전히 말을 참 이쁘게 하셔.

카르세스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뒷발에 차여 뼈가 나간 사람도 있다. ……할 수 있겠나?”

“예, 전하!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아델리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랬더니 카르세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왜 그러십니까?”

“아니. 누군가가 떠올라서.”

“…….”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그럼 부탁하지.”

“예, 전하! 맡겨만 주십쇼!”

“…….”

카르세스가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델리아는 넙죽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델리아를 잠시 바라보던 카르세스가 다시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와아……. 진짜 들킨 줄 알았잖아!’

[그러게요. 알아볼 법도 한데.]

칫, 재미없게. 리그하르트가 혀를 찼다.

‘아니,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아델리아는 자신의 손과 발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내 모습 어디를 보고 에스테르 사람이라고 하겠어.’

알아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이번에는 성검도 옷 속에 감췄다. 더욱 단단해진 오러 큐브는 아델리아가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러가 새어 나가는 일도 없었다.

그때, 리그하르트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누님, 그렇게 너무 자신만만해하지 마세요.]

‘내가 뭘?’

[누님께서도 숨기지 못하는 게 있으시거든요.]

내가? 아델리아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푸르륵—! 레오니드가 투레질하며 앞발을 두어 번 굴렀다.

“아, 맞다! 알았어! 손질해 줄게!”

성격 급하긴!

말뚝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아델리아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서 물통과 몸통용 솔, 말발굽용 솔을 들고 레오니드에게로 다가갔다.

“자자, 얌전히 굴면 기분 좋게 해 줄게. 내 손길이 닿으면 우리 울프도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좋아했거든?”

그러자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레오니드가 또 한 번 투레질했다.

“어유, 대답도 잘하고. 착하네, 레오니드.”

아델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레오니드의 말발굽부터 물을 칠해 흙을 씻어 내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새벽.

드디어 에스테르 공작가의 매그너스 기사단이 트라들리아 영지에 도착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에스테르 공작.”

테오스는 데릭과 함께 카르세스를 찾아왔다.

“예, 전하.”

“무탈하신 모습을 뵈니 참으로 기쁩니다.”

데릭이 옅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카르세스도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습니다. 어서들 앉으시죠.”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람들과 황태자 카르세스, 그 외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 한데 모였다.

“프레이르 대공께서는 내일 아침이 되어야 도착할 것 같다고 하시며, 회의를 미리 진행하라 하셨습니다.”

루드의 말에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부터 모여 시작된 회의는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테오스가 붉은 깃발을 트라들리아 서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남은 병력으로 빠르게 움직이려면 결국, 이 경로로 쳐들어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자 지휘관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찰병을 수시로 보내어 동태를 살피겠습니다.”

“좋습니다. 어차피 로샤크 연합군 또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전투가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겠습니다.”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휘관들께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써 주십시오.”

“예,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지휘관들의 회의가 끝이 나고 하나둘씩 황태자의 막사에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멀리서 조마조마하게 구경하던 아델리아가 마지막으로 막사에서 나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말갈기를 빗질해 주고 있던 솔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아빠!’

아빠다! 릭! 아빠야! 무사하셔! 다치신 곳도 없는 것 같아!

아델리아는 속으로 소리치며 발을 동동 구르다, 테오스를 조금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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