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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37)화 (137/161)

137화

그때, 푸르르릉—! 레오니드가 빗질을 마저 하라는 듯, 투레질하며 아델리아의 얼굴에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아.’

하마터면 아빠 코앞까지 달려갈 뻔.

아델리아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테오스를 힐끔거렸다.

‘다행이다 모두 무사한 것 같아서.’

테오스도 그랬지만, 데릭 역시 크게 상한 곳이 없어 보였다.

‘헤헤. 우리 매그너스 기사단 갑옷이 제일 멋진데?’

[그렇습니다, 누님! 단연 돋보입니다!]

암요! 누가 디자인했는데요!

리그하르트가 제 일인 양 들떠서 떠들어 댔다.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의 호들갑에 키득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솔을 주웠다.

푸르르륵. 레오니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델리아를 재촉했다.

“알았어, 레오니드. 다시 해 줄게.”

고놈 참, 좋은 건 알아 가지고.

아델리아가 레오니드의 목에서부터 빗질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테오스와 데릭에게로 향했다.

‘살이 좀 빠지신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제대로 식사를 챙겨 드시던 분이 아니셨지.

‘속상해.’

빨리 전쟁 끝나고 아빠랑 오빠랑 같이 식사하는 날이 오면 좋겠어.

아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테오스를 아련하게 응시했다.

그때.

기사들을 이끌고 걸어 나가던 테오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헉!’

[힉!]

놀란 아델리아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하하, 하하. 우리 레오니드. 피부결이 어쩜 이렇게 좋으니.”

아니, 털결이라 해야 하나. 뭐, 어쨌든.

아델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열성적으로 레오니드를 빗질했다.

테오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데릭과 그 뒤의 기사들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데릭이 묻자, 테오스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뭔가,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자 데릭이 테오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기사들과 목욕을 대기 중인 울타리 안 군마들까지.

모두가 테오스와 매그너스 기사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선이 안 느껴지시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입니다, 아버지.”

“…….”

장난스러운 데릭의 말에 테오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능글맞은 녀석.”

하하. 데릭이 작게 웃었다.

다시 테오스와 매그너스 기사단은 그들의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휴우.”

멀어지는 테오스를 보며 아델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남의 눈을 속이는 건 못 할 짓 같아.

‘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당당히 저 사이에 섰을 텐데!’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팽,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전장에는 못 오셨을걸요?]

‘왜?’

[아버님께서 그걸 두고 보실 리 없잖아요?]

‘나 에스테르야. 에스테르 사람이 전장에 나서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

[하지만 아버님께는 바람결에도 상처 입을까 봐 걱정스러운, ……딸일 뿐이잖아요, 누님.]

‘…….’

아델리아가 잠시 침묵했다.

리그하르트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가슴에 크게 와닿았던 탓이다. 아델리아가 코끝을 쓰윽 문질렀다.

‘짜식……. 한 번씩 바른 소리 할 때도 있다니까.’

[예?]

크, 크흠.

아델리아가 헛기침을 하며 빗질을 더욱 빠르게 했다.

“아유, 우리 레오니드. 이뻐라.”

그나저나.

‘휴시안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

“가긴 어딜 가겠다는 거야?!”

휴시안이 소리쳤다. 그러자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슈미엘이 손을 들어 하녀를 내보냈다.

슈미엘은 몸을 돌려 무표정으로 휴시안을 쳐다보았다.

“휴시안.”

“……왜.”

“왜 그렇게 초조해하는 거야?”

“그런 적 없어.”

흐음. 슈미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알아? 나한테 소리친 건 오늘이 처음이라는 거.”

“…….”

슈미엘은 거울 속 자신을 쳐다보며 머리카락을 마저 손질했다.

“휴시안, 그곳에 내 그릇이 있어.”

“거긴 전장이야.”

“나도 알아. 내 그릇을 찾기 위해 그릇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뿐이야. 내가 다치는 일은 없어.”

슈미엘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천천히 휴시안에게로 걸어가며 말을 이어 갔다.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잖아.”

“넌 지금 불안정해. 그 상태로 전투에 휩쓸리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가는 거야, 휴시안. 이 몸이 불안정하니까. 완벽한 그릇을 손에 넣기 위해.”

“기다려도 되는 거잖아.”

“지금까지 기다렸지. 그리고 어떻게 됐어? 항상 계획은 실패했어.”

“…….”

“넌 날 돕지 않았고, 날 돕는 자들은 하나같이 무능했지.”

슈미엘이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이젠,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슈미엘이 휴시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매번 새로운 그릇으로 바꿔도, 날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건 너뿐이야……. 휴시안, 내겐 너뿐이라고…….”

알잖아, 응?

슈미엘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휴시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가면 안 돼?”

“…….”

그러자 슈미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만히 휴시안을 바라보았다.

‘……소중한 게 생겼구나, 너.’

슈미엘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보다.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게 거기에 있는 거야.’

휴시안을 빤히 쳐다보는 슈미엘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슈미엘이 화사하게 웃었다.

“알았어, 휴시안. 안 갈게.”

그러자 휴시안이 의아하지만, 조금은 밟아진 표정으로 슈미엘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야?”

“응. 네가 그렇게 싫어하니까. 그릇은 비올라더러 찾아오라고 해도 되거든.”

그러자 휴시안이 티 나지 않게 안도했다. 그런 휴시안의 얼굴을 보며 슈미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한 가지 부탁 좀 할게, 휴시안.”

“뭔데?”

슈미엘은 침대로 걸어가며 말했다.

“시원한 과일 주스가 마시고 싶어. 수도에 ‘플랑티크’라는 가게가 있는데 그곳 주스가 맛있더라. 넌 빠르게 다녀올 수 있잖아. 사다 줄래?”

그러자 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 쉬고 있어.”

“고마워, 휴시안.”

슈미엘이 눈매를 접으며 맑게 웃었다.

휴시안이 방을 나가자, 슈미엘은 냉랭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발아래, 희미한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뮤켈.”

그러자 슈미엘의 그림자가 꿀렁거리더니 크기를 키워 슈미엘 앞에 섰다. 슈미엘의 사역마였다.

“비올라에게 가서 전해. 계획을 변경한다고.”

슈미엘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죽여 버리라 해. 그릇이 망가져도 상관없다고.”

그릇만 손에 넣으면 망가진 신체를 복구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슈미엘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역마가 까마귀의 모습으로 변해 창밖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까악, 까악—.

슈미엘이 사역마의 뒷모습을 가라앉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휴시안……. 네게 소중한 건, 나 하나면 돼.’

알잖아. 알면서 또 왜 그런 걸 만들었어?

***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제국의 진영.

막사 사이사이로, 불씨만 겨우 살려 놓은 모닥불만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로샤크의 공격은 모두가 잠든 늦은 밤에 시작되었다. 아직 악시덤의 군대가 진영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공격하라! 모조리 도륙하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로시안트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자!”

와아아아아!

로샤크 연합군들이 말을 타고 좁은 협곡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로샤크의 병사들은 막무가내로 검과 철퇴를 휘둘렀다. 그들의 뒤로는 불을 붙인 화살이 폭우처럼 날아들어 로시안트 제국 진영의 막사들 위로 쏟아졌다.

순식간에 로시안트 제국 진영이 불바다가 되었고 막사는 힘없이 쓰러졌다.

그러나, 무너진 막사 안에서 들려야 할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연합군의 선봉에 섰던 비에브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의 곁에 있던 수하가 말을 멈추며 외쳤다.

“뭔가 이상합니다!”

로시안트 진영 안으로 들어온 로샤크 연합이 크게 당황하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때.

부우우—! 부우우우우우—!

로시안트 제국의 진영을 아우르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영의 양쪽 숲에서 일제히 불이 켜졌다.

화살촉에 불을 붙인 궁수들이 당장이라도 화살을 쏠 것처럼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군마와 병기로 무장한 로시안트 제국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 크로노스의 가호를 받아 이 자리에 선 전우들이여!”

선두에 선 테오스가 제국군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의 목숨을 무참히 짓밟은 야만인들에게,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 줄 시간이 왔다.”

테오스가 검을 뽑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저 야만인들을 몰아내고 다시는 그 누구도 우리의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외침이 도화선이 되어, 맹렬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기세 좋던 로샤크 연합군이 동요하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숲에서 대기 중이던 로시안트 제국군이 함성과 함께 순식간에 밀려 나왔다.

새카만 병기가 전장 위를 물들이고 있었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

격렬한 전투가 한창인 전장의 한편, 숲에서 대기 중이던 군마대 사이에서 한 병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릭, 제국군의 검이랑 똑같은 모양으로 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분부대로 합죠!]

그러자 목걸이를 쥐고 있던 아델리아의 손끝에서 제국군의 장검과 똑같은 모양의 검이 생겼다.

아델리아는 군마대를 상징하는 휘장을 벗어 던진 뒤, 남아 있는 군마 중 한 마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아델리아를 발견한 몰트가 작게 외쳤다.

“이봐, 에벤. 어딜 가는 거야! 이리로 와! 여기서 대기해! 위험하다고!”

몰트의 목소리에 아델리아가 그를 잠깐 돌아본 뒤, 갈색 군마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놀란 몰트가 빠르게 달려왔다.

“에벤! 뭘 하려는 거야!”

그러다 아델리아의 손에 들린 검을 보고 놀라 되물었다.

“설마……. 전장으로 가려는 건 아니겠지?!”

몰트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자 군마 위의 아델리아가 씨익 웃었다.

아델리아의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 전장을 쓸고 온 바람에 흩날렸다.

새하얀 달빛을 받은 아델리아의 갈색 머리카락은 어쩐지 은발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몰트 경. 짧은 시간이었지만 챙겨 주셔서 고마웠어요.”

“에, 에벤.”

“하지만 전 역시.”

전장을 향한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마구간보다 전장 위가 더 좋아요.”

나는, 에스테르니까.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보자, 릭.’

[영광입니다, 누님!]

아델리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곧장, 고삐를 움켜쥐고 박차를 가했다.

늠름한 군마가 아수라장이 된 전장 사이로 빠르게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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