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수천에 달하는 전사들이 뒤엉켰다.
검은 밤하늘은 폭죽이라도 터진 것처럼 불화살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파바바박, 퍽퍽퍽—!
로시안트 제국의 궁수들이 쏜 화살은 로샤크 연합군의 방패와 갑옷을 어김없이 꿰뚫었다.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돼먹었길래 죄다 뚫리냔 말이다!”
로샤크 연합군은 반년 동안 로시안트 제국과 전투를 치르며 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다.
훈련받은 기사들의 수준도 그러했고, 도무지 파훼법을 찾아볼 수 없는 전술, 그리고 무지막지한 병기의 수준이 그러했다.
로샤크 연합군의 수장인 비에브는 자신을 공격하는 검을 한 차례 쳐 내며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자신을 찾아왔던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대로 굶어 죽느니, 로시안트 제국의 목이라도 물어뜯어 보지 않겠어요?
-제국의 목?
-에스테르 공작.
그러자 비에브는 조롱하듯 웃었다.
-나라고 듣는 귀가 없는 줄 아시오? 에스테르 공작이라면 전장귀라 불리는 사내지.
그뿐인가. 그가 이끄는 기사단은 적으로 만났을 땐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그 자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에브가 제 처지와 분수를 잘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질 것이 뻔한 싸움을 하라니.
비에브가 코웃음을 치자 여자가 입을 열었다.
-승패는 상관없어요.
그러자 비에브가 분노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나랑 말장난하러 온 것인가!
전쟁에서 패배란 곧 죽음을 뜻했다. 그런데 뭐? 승패는 상관이 없다?
이글거리는 비에브의 시선에도 여자는 담담하게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오해하지 마세요. 전쟁에서 패배하더라도 로시안트 제국의 땅을 내어 드리겠다는 말이었어요.
하하, 비에브가 웃었다.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어 버리면, 그 땅이 무슨 소용이라고.
-남부 빌렌드 영지 땅을 드리죠. 로시안트 제국에서 가장 비옥하고 따뜻한 땅이에요. 특산품인 와인 생산도 활발하기 때문에 영지의 수익도 꾸준하고요.
-…….
순간 완강하던 비에브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로샤크 연합군에게 정착할 수 있는 땅이 필요한 것은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제국의 한쪽 구석, 척박하고 쓸모없는 땅도 아니고 가장 비옥하고 따뜻한 땅이라니.
-오늘만 살 건 아니잖아요? 아이들에게 번듯한 터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물론, 전쟁에서 살아남은 로샤크 사람들에게 정착 자금도 지원할 거예요.
자신을 비올라라고 밝힌 여자는 정착지원금은 물론이고 집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작지까지 지원할 수 있다고 했다.
이쯤 되니 거절하는 게 말이 안 될 정도로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로시안트 제국 사람들이 자신들을 공격한 우릴 받아 줄 것 같은가?
그러자 비올라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가능하죠. ……내 아버지는 곧 황제가 되실 테니까요. 그리고 난, 황녀가 되겠죠.
-…….
결국, 비에브는 비올라의 손을 잡기로 했다.
더 이상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부족의 아이들이 마음 놓고 살아갈 터전이 생긴다는데 거절할 순 없었다.
채앵—! 비에브는 가슴팍으로 날아들던 화살을 쳐 냈다. 화살촉에도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화살촉을 막아 낸 검날에 금이 쩍 갔다.
‘제국군이 이런 병기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미 반년간 치러진 전투를 통해 많은 연합군이 전의를 상실했다.
‘전쟁에서 지더라도 땅을 내어 준다고 했다…….’
비에브가 공격을 막아 내며 힘겹게 주위를 살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에스테르 공작이 보였다.
‘저 공작만 죽인다면……!’
-조건은 간단해요. 에스테르 공작을 죽이세요. 그의 아들이라도 좋아요. 에스테르 공작가가 흔들리고 무너지도록 무슨 짓이라도 하란 뜻이에요.
비올라의 마지막 말은 당부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은 로시안트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저 사내를 죽여야만 한다.
개개인의 실력만 보면 어림도 없겠지만, 이곳은 전쟁터였다.
수백 수천 개의 검날이 부딪히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그러니 죽일 수 있다. 승산이 있어!
‘죽여……!’
죽이자! 죽여야 해!
비에브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테오스를 향해 전진했다. 그의 앞길을 막아서는 기사들이 비에브가 휘두르는 검에 쓰러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접근했다.
단 일격. 두 번의 기회는 없을 터.
비에브가 조심스레 테오스의 등을 노리며 다시 한 걸음을 다가섰다.
그때였다.
까앙—!
‘뭐, 뭐야!’
비에브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빠르게 내려오던 검 하나를 힘겹게 막았다.
조금 전 막아 냈던 흔한 기사들의 검과는 사뭇 달랐다.
구름에 달빛이 가려지자, 사내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입고 있는 갑옷으로 보아 로시안트 제국군인 것은 확실했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내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새하얀 치아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감히 어딜 가려고.”
까가가각—. 찍어 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검날끼리 마찰하며 불꽃이 일었다.
뒤로 한껏 밀린 비에브가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누구냐.”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장에서 상대하는 기사마다 이름을 묻나?”
조롱 섞인 말에 웃음기가 서렸다.
구름 뒤로 숨었던 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검을 맞대고 있던 사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였다. 왜소한 체격에 그리 위협적이지 않을 것 같이 생긴.
비에브는 비리비리해 보이는 놈에게 힘으로 밀리고 있자니, 울컥 분노가 치솟았다.
체격만 해도 내가 두 배는 더 커다란데!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전쟁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이라고! 가는 데는 순서 없거든?!”
깡, 까앙-! 쨍, 채앵—!
비에브는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검을 막기 급급했다.
‘공격할 틈이 보이질 않는다.’
로시안트 제국군에 이런 실력자가 있었던가!
어지간한 실력자는 이름과 얼굴을 외워 두었다. 그런데 이 사내의 얼굴은 본 적이 없다.
‘듣던 거랑은 다른데?’
아델리아는 전장에 합류하자마자, 로샤크 연합군을 이끄는 우두머리부터 찾았다. 틈틈이 달려드는 로샤크 연합군을 가볍게 동강이를 내면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병사 사이, 저 홀로 존재감이 남달랐던 탓에.
그가 로샤크 연합군의 수장임을 깨닫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네놈이구나. 이 빌어먹을 전쟁을 일으킨 놈이.’
과거와 현재의 분노가 오롯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빠 근처로 가게 둘 것 같으냐.’
비에브를 쏘아보는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아델리아의 검이 더욱 매섭게 공격을 가했다.
공격 한 번에 투구가 벗겨져 날아가고, 또 다른 공격에 갑옷이 찢어졌다.
허벅지와 종아리, 발목과 발등. 어느 한 군데도 빠짐없이 검날이 스쳤고 그의 갑옷과 무기는 너덜거렸다.
큭! 비에브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비에브가 발악하듯 몸을 일으키며 아델리아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자 검이 쩌적, 갈라지더니 두 동강이 났다.
“이대로 죽을 것 같으냐!”
비에브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또 다른 검을 다급히 집어 들고 다시 공격했다.
동시에 로샤크 연합군의 병사들도 비에브를 돕기 위해 아델리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델리아에게 달려들었던 로샤크 연합군들은 순식간에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방금은, ……검이 보이지도 않았다.’
저를 상대하던 것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인가. 나를 가지고 놀았단 말인가!
비에브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제기랄…….’
이렇게 허무하게……. 저 에스테르 공작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죽는구나.
“죽기 전에, ……이름이라도 알려다오.”
“…….”
아델리아가 비에브를 내려다보다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네놈들은 내 이름을 알 가치조차 없다.”
푸욱—! 아델리아의 검이 빠르게 내려와 꽂혔다.
“큭!”
비에브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왜, 왜.”
비에브가 제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켜나 흙바닥에 꽂힌 검을 보곤 의아하다는 듯 아델리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날, 죽이지 않…….”
“…….”
퍼억―! 아델리아는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비에브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의 뒷목을 가격했다.
비에브의 몸이 축 늘어지며 흙바닥 위로 고꾸라졌다. 아델리아가 비에브를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네가 할 일이 남았거든.”
물론, 당장이라도 저 목을 베어 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극도의 자제력을 끄집어내어 살의를 참았다.
‘뒷배에 누가 있는지. 누가 이 전쟁을 일으키라고 바람을 넣었는지, 알아내야 해.’
모두 털어놓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정도로, 아주 화끈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기대하라고.
아델리아가 거품을 물고서 기절한 비에브를 쳐다보며 사악하게도 웃었다.
***
비에브가 포로로 잡히자, 로샤크 연합군은 시시할 정도로 빠르게 무너졌다.
결국, 로샤크 연합군은 해가 떠오를 때쯤 항복을 선언했다.
“로샤크 연합군의 수장을 누가 잡았다고?”
데릭은 임시 진영의 막사 한구석에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비에브를 향해 턱짓하며 물었다.
그러자 기사 하나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투구를 쓰고 있어서 확실히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던져만 놓고 다시 전장으로 향하는 바람에 신분을 알아내지도 못했습니다.”
보통 적군의 우두머리를 잡고 나면 포상을 위해서라도 신분을 밝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냥 갔다고? 이름 하나 말해 놓지도 않고?
데릭이 비에브에게 다가가 그를 살폈다.
“잔인한 녀석이군.”
“예?”
“곱게 죽이지 않겠다는 듯이 급소만 피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있었다는 거지.”
한마디로 가지고 놀았다는 거다.
그 난리 통에서 이 정도의 섬세한 조절이 가능하다고?
“누군지 알아봐.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꼭 만나 봐야겠어.”
데릭이 턱 끝을 문지르다, 기사에게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러자 기사가 대답했다.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 중이십니다.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교회로 향하셨습니다.”
“그래.”
짧게 대답한 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 끝났구나.’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일까. 데릭의 입가로 안도감이 스민 옅은 미소가 고였다.
‘아델리아가 많이 기다리고 있…….’
그때.
콰앙—!
난데없이 터져 나온 굉음에 데릭이 서둘러 막사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