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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41)화 (141/161)

141화

“안 가 보셔도 되겠습니까, 전하?”

루드가 카르세스의 눈치를 살폈다.

카르세스는 먼발치에서 테오스와 데릭, 그리고 자신의 군마를 보살펴 주던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됐다. 저 분위기에 내가 끼어들 자리가 어디에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루드가 물었다. 저 군마대 소속의 사내가 에스테르 영애인지를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이었다.

카르세스가 하얀 손수건을 거머쥔 채 대답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파동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비록 카르세스는 아직 오러가 발현되지 않아 타인의 오러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에스테르 영애의 기운이 저 사내에게서 느껴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전투가 벌어진 전장 위에서 로샤크 연합의 수장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고위 마법사와 친분이 있는 모양이야.”

“아……. 변장 마법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카르세스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당장 급한 불도 껐으니, 애틋한 가족 상봉의 순간을 방해할 순 없지.

카르세스는 손수건을 도로 집어넣으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

마탑과 신전에서 보낸 지원군이 합류하자, 마지막 생존자까지 빠르게 확인을 끝낼 수 있었다.

비로소 로샤크 전쟁의 끝을 알리는 종전 선언이 트라들리아 영지로 울려 퍼졌다.

그 소식은 곧 수도와 가장 먼 남쪽 영지까지 전해질 것이다.

-돌아간다아아아!

-승리했다! 우리가 해냈다고!

-어머니!

각 부대의 기사들은 저마다 환호를 지르며 승리를 기뻐했다.

그러다, 뒤늦게 휴시안이 나타났다. 데릭이 기다렸다는 듯이 휴시안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이 새끼!

-오빠! 이러지 마! 내가 부탁했다니까?!

아델리아가 난감해하며 둘 사이를 막아섰지만, 데릭은 휴시안의 옷깃을 놓지 않았다.

휴시안이 까치발을 들고서 기침을 해 댔다.

-데릭, 콜록콜록. 이것 좀 놓고……. 공녀님 말이 맞아. 공녀님이 시켰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래!

휴시안이 되레 억울해하며 발뺌하자, 멱살을 쥔 데릭의 손아귀에 오러가 실렸다.

-네가 언제부터 어린아이의 부탁에 휘둘렸다고!

-어…….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너 이 자식—!

로시안트 제국의 진영, 임시로 세워진 막사 중 하나가 잠깐 떠들썩했다.

겨우 데릭을 진정시키고 아델리아와 휴시안은 먼저 공작저로 돌아왔다.

“아가씨!”

“세라!”

세라가 후다닥 아델리아에게로 달려왔다.

“다,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세라가 변장이 풀린 아델리아의 얼굴을 살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난 괜찮아, 세라. 멀쩡해! 말했잖아,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나 약속 지켰다? 하며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제야 세라는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델리아가 말했다.

“세라, 찝찝해서 그러는데 목욕물부터 준비해 주지 않을래?”

세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아가씨!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세라는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쓱쓱 비비며 방을 빠져나갔다.

세라가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한 뒤, 아델리아가 창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와도 돼.”

그러자 휴시안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굳이 숨어야 해?”

저 하녀도 나에 대해서 이미 다 알잖아. 하고 휴시안이 투덜거렸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래.”

가뜩이나 마부 휴시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세라였다. 그 마부가 사실은 마법사였다는 말에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하는 것보다 잠시 휴시안이 모습을 숨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델리아의 대답에 휴시안이 칫, 하고 혀를 찼다.

아델리아가 뾰로통해진 휴시안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고마웠어, 휴시안.”

“뭘,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휴시안이 뺨을 긁적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데릭에게 붙잡혔던 옷깃이 잔뜩 구겨진 채였다.

아델리아가 그 옷깃을 흘깃거리다,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한테는 내가 잘 말해 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델리아의 말에 휴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할 말 있어?”

그러자 휴시안이 뜸을 들이다 천천히 대답했다.

“그게, 음……. 한동안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아.”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왜? 다른 곳에서 마부 일이라도 구했어?”

“그런 거면 좋았겠지만…….”

휴시안이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 갔다.

“여동생이 집을 나갔어.”

“뭐? 아프다더니?”

“응. 더 심해졌는데, 말도 없이 사라졌어.”

아델리아가 눈꼬리를 내렸다.

아……. 전장에서 갑자기 사라졌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걱정이겠네…….”

“…….”

그러자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고 있던 휴시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걱정?’

어……? 휴시안이 뺨을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걱정이 된다거나, 슬프거나 하지 않아.’

슈미엘이 사라져 버린 이 상황에서,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휴시안이 팔짱을 끼고서 잠깐 생각에 빠졌다.

-내가 너 없이 살 수 없듯이, 너도 내가 없으면 안 돼.

-우린 항상 함께여야 해. 평생 곁을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우린 괴물이야. 괴물을 이해할 수 있는 건, 같은 괴물밖에 없어. ……그게 너와 내가 서로의 곁에 머무는 이유이기도 하고.

휴시안은 입버릇처럼 늘어놓던 슈미엘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

제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탓이다.

대체할 존재가 없었다.

정을 주고 마음을 주어도,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허탈하고 허무한 이 세상에, 먼저 떠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존재가 슈미엘이었다.

그런데 막상 슈미엘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은 슬픔도 아니었고 좌절도 아니었다.

‘안도감’이었다.

휴시안이 시선을 천천히 옮겨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뜬 붉은 눈동자가 퍽 무구해 보였다.

‘소멸 직전까지 갔으니까 다시 흑마법을 사용할 만큼 힘을 모으려면 5년은 걸릴 거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지도 모르지.

‘다행이다…….’

그때쯤이면 저 공녀님이 더 강해져 있을 테니까.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면……. 어쩌면.’

슈미엘의 그릇이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휴시안?”

아델리아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휴시안을 불렀다.

“응…….”

“왜 그래? 동생 때문이야?”

“아니, 공녀님 때문에.”

“응? 나? 나는 왜?”

아델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에 휴시안이 쓰게 웃었다.

“강해져, 공녀님. 종종 찾아오긴 하겠지만, 이번 일처럼 공녀님이 부른다고 해서 막 달려오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까 멀리 가는 거 같잖아.”

귀찮다고 여긴 적도 있지만, 괜히 기운 없는 휴시안을 보고 있자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휴시안이 아델리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공녀님. 그럼, 다음에 또 봐.”

“벌써 가게?”

“응. 가야겠어.”

눌러앉고 싶어지기 전에.

휴시안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까 내가 한 말 허투루 듣지 마.”

“뭐? 강해지라는 거?”

“응.”

그러자 아델리아가 턱을 슬쩍 들어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난 휴시안보다 더 강해질 거야.”

마탑주를 가볍게 찍어 누를 정도로 강해질 거라고.

그러자 휴시안이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며 웃었다.

“그래. 확인하러 올게.”

“조심해, 휴시안.”

“공녀님도.”

마법진이 완성되자, 휴시안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작은 빛 가루를 뿌리며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

응접실로 적막이 찾아왔다.

***

황실 기사단이 황실에 복귀하고 매그너스 기사단도 연이어 에스테르 공작가로 복귀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악시덤이 이끌던 기사단과 용병단이 프레이르 대공령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프레이르 대공령을 봉쇄했다.

죄명은, ‘반란’이었다.

프레이르 대공가의 모든 권한을 거둬들이고 기사단을 해체하게 했으며 해체된 병력은 황실 기사단으로 복속시켰다.

그리고, 악시덤이 금화로 사들인 용병단 역시 잡아들여 심문하도록 했다. 그들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었던 밀약에 대한 조사를 위한 조치였다.

“부당한 명령이십니다, 폐하! 다시 한번 더 살펴 주소서!”

그러자 하루가 멀다 하고 귀족파 세력의 귀족 가문들이 황궁을 찾아왔다.

“폐하! 폐하의 아우님이 되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그분은 제국의 영웅이셨습니다! 제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던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대공께 이런 불명예를 안겨 주시는 것입니까!”

귀족들의 계속되는 반발에도 무언가를 기다리듯, 묵묵히 시일을 흘려보내던 황제는 기어이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악시덤 프레이르의 대공 작위를 거두고 영지와 저택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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