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악시덤에게서 대공의 작위를 거둔다는 것은 사실상 귀족파의 사형 선고와 다를 게 없었다.
당연하게도 귀족파는 거세게 반발했다.
귀족 회의가 열리던 날 아침. 황제파와 귀족파, 그리고 중립파 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 제국의 유일한 대공이십니다. 이렇게 폐하 마음대로 하게끔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귀족파는 악시덤의 힘이 무너진다면, 오랜 시간 자신들이 누려 왔던 것들을 빼앗기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 보십시다. 작위라도 유지한다면 또 기회가 오지 않겠소.”
귀족파 귀족들은 저들끼리 은밀하게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황제와 함께 알현실로 들어온 황태자 카르세스가 악시덤을 고발하자 귀족파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군사 기밀을 빼돌린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알현실에 모인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르세스의 폭로가 계속되었다.
악시덤은 로샤크 연합군과의 전쟁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용병단을 모았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 모은 용병단을 사망자라고 둔갑시켜 로샤크 연합군으로 빼돌렸다. 유독 악시덤이 이끄는 부대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온 까닭이 그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국군의 이동 경로 역시 로샤크 연합군에 전달함으로써 로시안트 제국군을 여러 차례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거기에다 자폭환도 모두 악시덤의 소행이었다.
“자폭환의 재료인 초석을 사들인 가문은 테미오르 자작 가문입니다. 어찌 중립파 가문과 대공을 엮으려 하십니까!”
귀족파 가문이 반박했다. 카르세스가 서류를 황제에게 건네며 대답했다.
“테미오르 자작 가문이 과거 프레이르 대공가에서 후원받았다는 증거 자료입니다.”
테미오르 자작. 보육원에서 자라, 학자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젊은 나이에 자작의 작위를 받은 사내였다.
“테미오르 자작에게 아이들을 납치하여 자폭환을 제조한 것 역시 프레이르 대공의 명령이 있었다는 자백을 받았습니다.”
카르세스가 심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 왔음에도 귀족파는 수긍하려 들지 않았다. 여기서 인정하고 물러선다면 악시덤의 죄를 시인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귀족파 가문 중 베르네 백작이 나섰다.
“대공께서 의로운 마음으로 후원한 사람과 가문이 어디 한둘인지 아십니까? 후원받은 자들의 악행이 어째서 대공과 엮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자백 역시 거짓이 아니라 어찌 장담할 수 있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는 숙부이신 대공의 진심을 깎아내리시는 것입니까!”
그에 카르세스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테미오르 자작은 악시덤의 사생아였습니다.”
“…!”
그러자 귀족파 사이의 웅성거림이 단번에 사라졌다.
카르세스가 무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공의 사생아는 총 열두 명. 그 열두 명 모두가 후원 명단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작위가 예정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래도 그 후원이 그저 정의로웠다 할 수 있겠습니까?”
“…….”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한때 제국의 영웅이었던 악시덤이 군사 기밀을 적군에 넘기고, 자신의 사생아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이용해 금기된 자폭환까지 만들었다니.
그에 비하면 악시덤이 투기장과 도박장을 운영했다는 것은 놀랍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악시덤의 악행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 할 말이 많아 보이던 귀족파 세력들도 더는 악시덤의 편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끝끝내, 비올라의 향초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황제가 원한 것이기도 했다.
-카르세스. 향초를 수면 위로 올리게 되면 디크레드 영지의 폴디아퀸까지 거론해야만 한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아.
-예, 폐하. 염려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이번 일로 에스테르 공작가와 디크레드 백작가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적절히 조치하겠습니다.
어차피 비올라는 역모를 계획한 악시덤 때문에라도 사형을 피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니 굳이 향초에 관한 일을 들쑤실 필요는 없겠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한다.”
황제의 담담한 목소리에 모든 귀족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황족이 스스로 잘못을 거론하고 인정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래전, 선황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셨다. 그럼에도 혈육의 정을 무시하지 못해 정세를 위태롭게 만든 것은 명백한 나의 허물이도다.”
때 지난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참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황제는 이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프레이르 가문의 이름을 역사에서 지우고 악시덤의 심문이 끝나는 대로 악시덤과 그의 식솔들을 제국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도록 하라!”
황제의 마지막 명령에 알현실은 짧게나마 숙연해졌다.
비로소 끈질기게 이어져 오던 악연에 최후가 선언되었다.
***
“네? 사라져요? 공녀가요?”
“이제는 공녀도 아니죠. 작위도 빼앗겼고 노예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니까요.”
오랜만에 카를리나의 사무실을 찾은 아델리아는 의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악시덤의 사형이 선고되고 일주일. 악시덤의 딸인 비올라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거리에 기사들이 많이 보였던 거군요.”
“네, 수도는 물론이고 지방 영지도 수색하느라 난리라고 하더라고요. 저희 상단에서도 항구 쪽을 은밀하게 살피고 있으니 곧 잡힐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카를리나에 말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나 아델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비올라는 매번 발 빠르게 움직였던 것 같아.’
악시덤의 투기장과 도박장이 처음 세상에 드러나 질타받았을 때도, 비올라는 사업을 위해 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떠났다.
‘이번에도 그래. 악시덤을 잡아들이기도 전에 대공저를 먼저 봉쇄했을 텐데…….’
그럼에도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은 악시덤이 전장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몸을 숨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머리가 좋은 건지, 감이 좋은 건지.’
아델리아가 양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머릿속이 소란스러웠으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이미 제국을 떠났을 거야.’
[벌써요?]
‘응.’
2년간 사업차 다른 대륙에서 생활했다고 했었지.
‘나라면 다른 대륙에 미리 거처를 마련해 뒀을 거야.’
물론, 비올라도 아델리아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2년간 향초를 구하러 다녔던 그 집념과 상황을 판단하고 한발 빠르게 움직이는 행동력을 보면 비올라 역시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판단했다.
‘번거롭게 됐어. 다른 대륙으로 이미 떠났다면 붙잡기 힘들 테니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죽게 생겼는데 바로 내뺐으려고요?]
‘그렇게 가족애가 깊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아무리 혈육에 약한 황제라고 하더라도, 반란을 일으킨 동생을 살려 둘 리 없다.
제국법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 가문은 멸문하게 되고, 그 식솔들은 모두 함께 처형당하게 된다.
상황을 뒤집기 힘들다고 판단했다면, 비올라는 과감하게 버리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델리아, 그럼 이 광산은……. 아델리아?”
카를리나가 아델리아를 불렀다. 그러나 생각에 깊이 빠져든 아델리아는 듣지 못했다.
카를리나가 테이블 위 작은 지도를 펼치며 다시 아델리아를 불렀다.
“아델리아?”
“아, 네?!”
아델리아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카를리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직도 비올라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나도 마음이 좋지 않더라고요.”
카를리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비록 지금은 틀어지긴 했지만, 카를리나는 비올라를 둘도 없는 친우라 여겼었다.
‘카를리나가 지금은 웃고 있지만, 굉장히 속상했을 거야.’
[이미 2년 전 티파티에서 완전히 끝난 사이가 된 거 아니었어요?]
‘사람의 인연이 그렇게 단칼에 베어지는 게 아니니까.’
아델리아가 눈꼬리를 내리며 카를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제 앞에 놓여 있던 접시를 카를리나 앞으로 스윽, 밀어 주었다.
접시에 담겨 있던 푸딩이 순간 출렁, 흔들렸다.
“……아델리아?”
카를리나가 접시와 아델리아를 번갈아 보자, 아델리아가 해맑게 웃었다.
“기분이 울적할 때는 단 걸 먹어야 하거든요? 제가 특별히, 오늘만큼은 푸딩을 양보해 드릴게요.”
아델리아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퉁퉁, 치며 으스대었다. 카를리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요, 아델리아. 이 귀한 걸.”
카를리나는 가장 좋아하는 간식을 양보한 아델리아의 마음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조금 이따가 점심 식사 같이할래요, 아델?”
“좋죠!”
아델리아의 천진한 미소에 카를리나 역시 따라 웃고야 말았다.
***
같은 시각, 황궁의 알현실.
오늘도 프레이르 대공가와 관련된 진정서가 빗발쳤다. 한때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영웅에게 사형은 너무 과한 처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 진정서를 들고 찾아오는 귀족파의 귀족들 때문에 정신없이 반나절을 보내던 그때. 알현실로 카르세스가 황제를 찾아왔다.
“마음을 굳힌 모양이구나.”
“예, 폐하. 곧 숙부의 사형일이 아닙니까. 숙부의 일만 처리되면 제국은 안정화될 것입니다. 해서, 지금이 적기라 생각됩니다.”
흐음.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침음했다.
“아들아.”
“……예, 아버지.”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나 카르세스를 향해 걸어왔다.
아래로 시선을 떨구고 있던 카르세스도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가 카르세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카르세스……. 너무도 갑작스럽구나. 꼭, 지금 떠나야만 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