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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43)화 (143/161)

143화

“폐하께서도 제 나이보다 어릴 적에 유학을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황태자로서 견문을 넓히기 위해 유학을 떠나는 것은 후계자 수업의 일환이기도 하고요.”

“그거야 그렇지만…….”

황태자로 책봉되는 순간부터 후계자 수업이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보면 카르세스는 늦은 편이었다. 악시덤이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후계자로서 능력을 드러낼 수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죽은 듯 살 필요가 없어졌다.

카르세스가 악시덤의 그늘에서 제힘으로 벗어났기 때문이다.

마냥 연약하고 어린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진정한 후계자로 거듭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누가 감히 그 의지를 꺾을 수 있을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찾고자 하는 것, 얻고자 하는 것을 모두 이루고 돌아오거라.”

카르세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주먹을 올렸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황제가 카르세스를 바라보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 폐하.”

***

아델리아가 에스테르 공작저의 대장간을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노베트.”

깡, 깡, 깡, 까앙—!

대장간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전쟁이 끝나 한동안 고요하던 대장간의 용광로가 다시 타올랐다.

아델리아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대장간 한편에 진열된 병기들을 향해 걸어갔다.

하아암—. 크게 하품을 한 뒤, 리그하르트를 꺼내어 병기들에 부착된 보석 위에 갖다 댔다.

따앙—. 가볍게 내리치자, 리그하르트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보석 안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땅, 땅, 따당—.

아델리아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벼 가며 박자를 맞추어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 병기당 적게는 열 번, 많게는 스무 번을 두드려야 겨우 보석 하나에 신력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에스테르 기사단, 매그너스 기사들을 위한 아델리아의 선물이었다.

아델리아는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무사히 돌아와 준 기사단원들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들의 무기와 갑옷은 험난했던 전투를 대변하듯 많이 닳고 망가져 있었다.

‘기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역시, 새 장비지!’

아타뮴 광석에다 신력을 채운 장비라니. 이 얼마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병기란 말인가.

[돈이죠.]

작게 중얼거리는 리그하르트의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아델리아가 걱정되었던 노베트가 망치질을 멈추며 몸을 돌렸다.

“아가씨.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닙니까?”

따앙, 땅, 땅, 땅.

아델리아가 쉬지 않고 두드리며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슬쩍슬쩍 두드리는 건데요, 뭐.”

노베트의 온 힘을 다한 망치질에 비할 수 있겠냐며 잠이 덜 깬 얼굴로 부스스하게 웃었다.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버럭했다.

[제가 안 괜찮아요! 제가요!]

실상, 리그하르트의 신력을 무기와 갑옷에 부착된 보석으로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아델리아는 가볍게 검 끝으로 병기를 톡톡 두드렸고, 그럴 때마다 리그하르트의 신력이 조금씩 병기의 보석으로 옮겨 갔다.

[이게 며칠째야! 신력이 쪽쪽 다 빨리네!]

아이고, 나 죽네! 리그하르트가 헉헉거리며 엄살을 부렸다. 검 끝이 부르르 떨리는 것도 같았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엄살은.’

[엄살이라뇨! 아침부터 힘을 써 대는 바람에 벌써 배가 고프다고요!]

‘옜다, 오러.’

먹고 힘내서 일하자, 알겠지?

[꺄!]

리그하르트가 신난 어린아이처럼 소리쳤다.

아델리아가 오러를 조금씩 성검에 실었다. 그러자 리그하르트에서 흘러나오는 신력의 힘도 강해졌다.

다시 아델리아가 성검을 휘둘러 병기를 두드리자,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노베트도 망치질을 재개했다.

까앙, 까앙, 깡, 까앙—.

숨 막히는 용광로의 열기와 묵직한 망치질 소리가 대장간을 가득 채웠다.

지금 노베트는 아델리아의 부탁으로 검을 만들고 있었다.

아타뮴 광석을 이용해 검을 만들어 달라는 아델리아의 특별한 주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러를 담을 검이니까 전쟁에서 쓰였던 검들보다 더 강도가 높아야 해요. 그리고 이왕이면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도 새겨 넣었으면 좋겠어요! 으음, ……그, 선물할 거라서 그러는데. 황족이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러우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한 땀 한 땀, 아시죠?

-오러를 담을 검이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가씨!

전쟁이 끝나 간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노베트는 아델리아의 부탁에 다시 망치를 들어야만 했다.

[그나저나, 저 귀한 광석을 물 쓰듯 쓰는 사람은 누님뿐일 거예요.]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를 노려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돌덩이가 귀해 봤자, 목숨보다 귀하진 않잖아.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써먹어 봐야지. 아끼다가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와……. 있는 자의 여유인가.]

‘그만큼 전쟁이 있든, 없든 병기는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게 중요하다, 이거지.’

멋지다, 우리 누님!

리그하르트가 과장되게 몸체를 들썩거리며 아부했다.

나 참. 아델리아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멀었나…….’

분명 오전 중으로 완성될 것 같다고 했었는데.

아델리아가 창문 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점심 먹으라는 소리도 못 했었는데.’

아델리아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노베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때.

쉼 없이 움직이던 노베트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우뚝 섰다.

‘어……?’

아델리아가 노베트의 등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노, 베트……?”

그러자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노베트가 천천히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양손에는 새카만 검날이 예리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완성, 입니다……. 아가씨…….”

“와…….”

아델리아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비록 아직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검신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검이라고 해도 믿겠어.’

사람의 목숨과 피를 먹이로 성장하는 마검. 그것이 실존한다면 딱 저러한 기운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아델리아는 잠시 그런 생각도 했다.

“수고하셨어요, 노베트! 엄청난 걸 만들어 냈어요!”

벅찬 감정을 느낀 것은 아델리아만이 아니었다. 노베트 역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노베트가 검신을 내려놓고 아델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건넸다.

“모두, 저를 믿고 맡겨 주신 아가씨 덕분입니다……. 또 한 번 저를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가씨.”

“고맙다는 인사는 제가 해야죠. 전 약속드렸던 것을 지키고 있을 뿐이에요. 기억하시죠? 재료와 도구, 전부 다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약속드렸었잖아요.”

그러자 노베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약속하셨던 것 중, 그 무엇 하나 지키지 않으신 게 없으십니다.”

“헤헤, 그게 저희 에스테르 공작가의 약속이거든요!”

아델리아가 자신의 가슴 앞을 말아 쥔 주먹으로 퉁퉁, 두드렸다.

노베트는 다시 검 손잡이와 검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검이 완벽하게 완성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신을 만드는 것에 비하면 아주 간단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검이 완성되자 아델리아는 검을 챙겨 방으로 올라왔다.

테이블 위에는 미리 부탁해 두었던 상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완벽해!’

고급 목재로 만든 상자에 검푸른색의 융단을 깔고 그 위에 검은색 검을 넣었다.

‘좋아하셨으면 좋겠어.’

이 검은 선물용이었다. 몇 년 뒤, 오러가 발현될 카르세스를 위한 선물.

카르세스는 성인식을 치른 뒤, 얼마 있지 않아 오러가 발현될 것이다.

물론, 카르세스의 성격상 황실 금고에서 대충 마음에 드는 검으로 찾아다 쓰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검을 선물해 주고 싶었어.’

절대 부러지지 않는 강한 검을.

이전 생에서 카르세스의 검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하필 전장 위였기 때문에 하마터면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제 전하의 생일이 오기만 하면 돼.’

작년에는 수놓은 손수건을 생일 선물로 건넸지만,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

‘아마 버렸을걸?’

아델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무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이 선물은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딱 카르세스를 닮은 검이었다. 강하고 매서우며 예리한.

‘이걸로 매일 대련해 달라고 해야지.’

앞으로 같이 전장도 나가고, 대련도 하고.

‘진짜 재밌겠다!’

히히. 아델리아가 흐뭇해하며 닫힌 뚜껑 위를 쓰다듬었다.

그때. 세라가 방으로 부랴부랴 뛰어왔다.

헉, 헉, 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세라가 말했다.

“아, 아가씨!”

“세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세라가 턱 끝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허리를 세웠다.

“소, 손님…….”

“손님?”

“아니지, 화,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어요!”

“응……?”

황태자 전하께서? 아델리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선물 냄새라도 맡으신 거야?

어쩐지 설레는 마음에 아델리아는 서둘러 응접실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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