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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44)화 (144/161)

144화

응접실로 내려가니 이미 카르세스는 테오스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델리아가 드레스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와서 앉지, 영애.”

“예, 전하.”

데릭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아델리아가 싱긋 웃으며 데릭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아델리아가 들어오며 잠시 끊겼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테오스가 턱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기한이 없는 셈이로군요.”

“그렇죠.”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아델리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데릭을 바라보자, 데릭이 눈썹을 내리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테오스가 대신 대답했다.

“아델리아. 전하께서는 내일 제국을 떠나신다.”

“……네?”

아델리아의 시선이 카르세스에게로 향했다.

떠, ……나? 조금은 당황스러웠고 얼떨떨했다.

아델리아의 시선에 카르세스가 옅게 미소 지었다.

“후계자 수업이야. 황족에 황태자라면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고 보면 돼, 영애.”

“아…….”

기억났다. 이전 생에서 카르세스에게 들었던 적이 있다.

-숙부께서 저리 당당하게 나오시는 건, 내가 후계자 수업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마지막 관문이요?

-견문을 넓히기 위해 다른 대륙으로 유학을 다녀와야 했어. 하지만 그러기엔 폐하의 건강 상태도 좋지 못했고,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곧장 숙부께서 황제가 되셨으니 더더욱 기회는 없었거든.

그 이야기를 하며 씁쓸하게 웃던 카르세스가 떠올랐다.

‘……달라진 거야. 악시덤이 처단되어서 이제 전하께서도 당당히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된 거지.’

[황제의 건강도 굉장히 좋고요.]

‘응. 폐하의 곁을 지켜 줄 에스테르 공작가도 건재하고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기회이고 당연한 절차였다.

그런데, 그런데…….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서운하지?’

당장 내일이라잖아. 이렇게 빨리 떠날 거였으면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이제 당분간 대련도 못 하는 거잖아?

‘좀 일찍 말해 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속으로 투덜거리던 아델리아가 불현듯 깨달았다.

‘하긴, 전하께서 내게 그런 계획을 말할 이유가 없지…….’

[누님…….]

‘내가 뭐라고.’

끽해야 전우. 아니, 지금은 전우조차도 아니다.

‘그냥 힘만 믿고 까불거리는 귀족 영애 정도일지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잘됐습니다, 전하. 무사 귀환을 바랍니다.”

“……그래, 고마워.”

다시 테오스와 카르세스의 대화가 이어졌다.

대충 어느 대륙으로 갔다가 어느 대륙까지 갈 계획이라든가, 언제 돌아올지는 확신할 수 없다든가, 그동안 황실을 잘 부탁한다든가.

그러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사실 아델리아는 그런 이야기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화가 끝난 뒤,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카르세스 역시 할 이야기가 있었던 건지, 흔쾌히 아델리아의 요청을 수락했다.

두 사람은 아델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아델리아가 테이블 위 상자를 카르세스에게 내밀었다.

“생일 선물로 드리려 했는데.”

“생일?”

“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작별 선물이 되었네요.”

하하……. 아델리아가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카르세스가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정교하게 세공된 검집과 매끈하게 뻗은 검신이 드러났다.

“검이로군. ……아타뮴 광석으로 만든 것인가?”

“네, 맞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은데.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저희 가문의 대장장이가 밤잠을 설쳐 가며 온 힘을 기울여 만든 명검 중의 명검이에요.”

카르세스가 상자에서 검을 꺼내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창가로 들어온 햇살이 새까만 검날에 부딪혀 산란했다.

짧게 감탄하던 카르세스가 검날을 살피며 말했다.

“너무 과분한 선물인데.”

“과분하지 않아요. 그 정도는 되어야 전하의 오러를 견뎌 낼 테니까요.”

“영애. 난 아직 오러가 발현되지 않았어. 앞으로 오러가 발현될지도 장담할 수 없고.”

그러자 아델리아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꼭 발현되실 거예요. 그건 제가 장담해요.”

그것도 엄청나게 강한 오러를 가지게 되실 거라고요. 아델리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카르세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영애가 그리 말하니,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아, 정말 그렇게 될 거라니까요?”

아델리아가 콧등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러다 카르세스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디 조심하세요, 전하.”

후계자 수업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했다.

실제로 역사상,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황태자들이 셀 수 없을 만큼이었다.

그런 아델리아의 걱정을 알아차린 것인지, 카르세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영애,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아델리아가 하하……. 힘없이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카르세스가 말했다.

“말했지. 영애가 강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영애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 같다고.”

“네, 그때 하셨던 말씀 기억하고 있어요…….”

그건 다행이군. 짧게 대답한 카르세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내 걱정은 그거 하나야. 내가 돌아왔을 때, 영애를 다시 볼 수 없으면 어쩌나 하는.”

“…….”

카르세스는 허리에 착용하고 있던 기존의 검을 풀어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리고 아델리아가 선물한 검을 검집에 넣고 허리에 착용했다.

카르세스가 검 손잡이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영애.”

“네, 전하.”

“숙부가 사라진다고 해서 제국에 영원한 평화가 오는 건 아니야.”

숱한 역경과 위협 중 고작 하나가 사라진 거라고, 카르세스는 설명했다.

“영원한 평화는 없다.”

단호한 카르세스의 어조에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서 나는 예상치 못한 위협에서 내 사람들을 지켜 낼 방법을 배워 돌아올 거야.”

“전하…….”

“영애 역시, 지금보다 더 강해질 테지.”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강한 사람도 자신을 스스로 아끼지 않으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해.”

“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영애가 건강한 모습으로 날 반겨 주면 좋겠어.”

“…….”

아델리아가 그의 보라색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한없이 진중하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어쩐지 서글퍼 보이면서도 그 속에 담긴 각오는 그 무엇보다도 단단했다.

‘전하께서도 어중간한 마음으로 떠나시는 게 아닌 거야.’

아델리아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왼쪽 가슴 위로 말아 쥔 주먹을 올리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전하.”

그러자 카르세스가 눈썹을 들어 올리다 웃음을 터트렸다.

“명령은 아니었어, 영애.”

뭐야, 그 인사는. 카르세스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웃었다.

***

카르세스가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악시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장소는 수도의 광장이었다.

-나는 그저 제국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다!

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고 악시덤은 참수형을 당했다.

악시덤의 딸인 비올라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였고, 황실에서도 비올라가 제국을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비올라가 사라졌다는 것이 불안 요소로 남기는 했지만, 길고 길었던 악시덤의 천하는 비로소 끝이 났다.

“복귀하겠습니다, 아버지.”

“조심하거라.”

“예.”

오늘은 데릭이 황궁으로 복귀하는 날이었다. 테오스에게 인사를 건넨 데릭이 아델리아를 돌아보았다.

“말썽 피우지 말고.”

“오빠야말로, 내가 보고 싶다고 또 금방 달려오지 마.”

아하하. 데릭이 웃음을 터트렸다.

데릭이 말에 올라탔다. 빠르게 달려 나가는 데릭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두 사람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또 하루가 지나고 밤이 찾아왔다.

아델리아는 잠들기 전, 테라스에 나가 난간에 걸터앉았다. 오랜만에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얼마 만의 여유인지.’

카르세스가 떠나고 아델리아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었다.

제국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아타뮴 광산을 각인했고, 노베트를 주축으로 대장간을 키우기 위해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아, 으슬으슬하다.”

[이제 곧 가을이 오겠죠?]

그리고 축제도 열릴 거고요! 리그하르트가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올해 축제는, 지루하겠다.’

[엥? 왜요?!]

‘뭐랄까……. 다들 떠나가는 느낌이라, 조금 허전해졌어.’

[아…….]

황태자가 제국을 떠났다. 전쟁도 끝이 나고 악의 축이었던 악시덤도 사형되었다.

또 미래가 바뀐 것이다.

아델리아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젠,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게 크게 의미 없을지 몰라.’

회귀 이후 쉬지도 않고 내달렸다. 미래를 바꾸겠다고. 가족과 가문을 지키겠다고.

그리고 해냈다.

그 말인즉, 미래가 바뀌어도 한참은 바뀌었다는 것이다.

‘내가 주도한 미래.’

그랬기에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 바뀔지 감히 예상하기 힘들어진 미래.

이제는 오롯이 제힘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러가 있어. ……릭, 너도 있고.’

아빠도, 오빠도 곁에 있어.

미래는 바뀌었지만, 이전 삶보다 더 안정적이고 훌륭한 힘이 손안에 있다.

‘뭐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이겨 내면 그만이지, 뭐. 안 그래, 릭?’

[물론이죠! 제가 곁에 있는 한! 누님이 제국 최고의 기사……. 아니, 뭐……. 제일 강할 거라는, 뭐, 그런 말이죠.]

리그하르트가 아델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더듬었다.

아델리아가 웃었다.

‘최고의 기사가 될 생각은 없지만, 이 힘을 포기할 생각도 없어.’

앞으로도 가문을 지킬 힘은 필요하니까.

‘아, 어쩐지 내가 원하는 은퇴 생활에 한 걸음 다가간 기분이야!’

으자자자! 아델리아가 기지개를 크게 켰다.

‘그만 들어가서 자야겠어.’

내일도 바쁠 테니까.

‘이번에는 마석 광산을 찾아보자.’

마탑에다 팔면 잘 팔리겠지? 대장간 2호점을 세울 자리도 알아보러 가야겠고.

아델리아의 밤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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