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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45)화 (145/161)

145화

로샤크 전쟁이 마무리되고 세월이 빠르게 흘렀다.

그 사이 황족과 신전의 세력이 귀족파를 월등히 넘어섰고 로시안트 제국의 안팎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귀족파는 숨죽인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나, 황제파의 귀족들은 전쟁의 선두에 서서 큰 공적을 세우며 세력을 더욱 견고히 했다.

그 과정에서 데릭 에스테르가 새로운 전쟁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로시안트 제국은 건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치열한 겨울이 가고 꽃향기 그득한 봄과 짧은 여름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왔다.

아델리아 에스테르 19세, 성년식을 한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에스테르 공녀님요?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들 하죠.”

정원의 나무들이 붉은 잎으로 옷을 갈아입은 계절. 따사로운 햇살 아래 정원에서 티파티가 열렸다.

티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의 대화 주제는 단연 아델리아의 행보였다.

10년 전, 아델리아는 돌연 데뷔탕트 이전에는 그 어떤 사교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마 이른 나이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쌓이는 초대장 때문에 그런 선언을 한 것 같았다.

그랬던 아델리아가 한 달 전부터 티파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교계에 발을 들일 준비를 하시는 모양이에요. 그럴 나이가 되긴 하셨죠.”

그러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영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한 달 전부터 티파티에 나오기 시작하셨다면서요? 그래서 저도 이 티파티에 나왔잖아요. 혹시 뵐 수 있을까 하고.”

“저도요.”

“사실, 저도 그래요.”

적지 않은 수의 영애들이 아델리아와의 인연을 맺기 위해 참석했다며 손을 들었다.

“그런데 티파티에 나와 조용히 차만 마시고 돌아간다던데요.”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말이에요.

대화를 주도한다거나, 자신의 재력과 권력을 드러내는 일도 없이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아델리아의 존재감은 남달랐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그 티파티는 어째서인지 그녀가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안 오시려나 봐요.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걸 보면.”

영애 한 명이 정원 입구를 흘깃거리며 눈꼬리를 내렸다. 이윽고 티파티를 주최한 백작가의 영애가 개최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주최자가 입을 열었을 그때.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원 입구에서 아델리아가 들어왔다.

그러자 시무룩해 있던 주최자도, 기대에서 실망감으로 물들었던 참석자들의 표정도 환해졌다.

테이블로 걸어오는 아델리아의 걸음이 가벼웠다. 연보라색 드레스의 밑단 레이스가 잔디밭 위를 가볍게 쓸었다.

드레스의 중심을 사선으로 내지른 레이스는 은하수를 옮긴 듯 반짝이는 비즈로 가득했고 치맛자락 군데군데 달린 조화가 가을 분위기와 몹시도 잘 어울렸다.

아델리아가 얼굴 옆으로 흘러내린 은발을 귀 뒤로 넘기며 자리에 앉았다.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 착 달라붙는 의상 덕분에 기다란 팔이 돋보였다.

아델리아가 자리하자 본격적인 티파티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티파티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오고 가는 대화의 주제는 여전히 아델리아였다.

“그럼, 에스테르 공녀께서는 아직도 검술을 훈련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답니다.”

아델리아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영애들이 감탄하듯 입을 벌렸다.

“저, 저도 검술을 배울 수 있을까요?!”

어느 한 영애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는 다정하게 눈매를 접어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에스테르 검술 교습소로 연락해 주세요. 영애들의 연락은 언제든 환영이니까요.”

에스테르 검술 교습소.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교습소가 생긴 지, 벌써 5년이었다.

처음에는 바라크가 찾아낸 인재를 키우고 그리젤 길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작은 규모로 시작했다.

그러나 아델리아의 영향인지, 귀족 영애들도 더러 찾아와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규모도 커졌다.

여자가 검을 들었다는 이유로 질책과 경멸 어린 시선을 받아야만 했던 과거와는 달리, 사회적인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영애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아델리아는 생각했다.

영애들이 더 늘어나면 교습소를 분리해야겠어. 거친 녀석들과 한데 섞여 훈련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해 보이니까.

‘아. 아니지. 나 같은 영애 하나쯤 더 있어도 재밌겠는데?’

아델리아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티파티가 순조롭게 끝이 나고 아델리아는 조용히 마차에 올라타 공작저로 돌아갔다.

‘여기도 없었어.’

오늘도 허탕이네. 작게 중얼거리자,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벌써 한 달째. 아델리아는 자신의 친우인 올리비아 쥴리아노를 찾고 있었다.

올리비아에게 티파티 초대장을 보낸 가문의 티파티는 거의 참석했으나, 올리비아를 만날 수는 없었다.

-나도 그 벨리타 백작 영애의 티파티에 초대받았어, 아델! 같이 가자!

마지막 서신을 끝으로 올리비아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델리아는 달리는 마차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올리비아는 카를리나를 제외하고 아델리아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절친한 벗이었다.

콧등에 희미한 주근깨와 풍성한 곱슬머리를 가진 작은 아이는 어느새 커서 약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패트릭 영식은 되게 순수해. 난 그가 시를 읊어 줄 때의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어!

약혼 날짜가 정해지고 두 뺨을 붉히던 올리비아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말도 없이 요양을 떠날 아이도 아니고, 도착한 뒤라도 편지를 보냈을 거야…….’

[뭔가 이상하죠, 누님?]

‘그러게.’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아델리아가 직접 쥴리아노 백작가로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만날 수 없었다. 쥴리아노 백작은 올리비아의 건강이 나빠져 요양을 떠났다고만 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려 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것이 이상했던 아델리아가 바라크에게 의뢰를 넣었다.

<……찾고는 있는데, 쉽지는 않아. 한 달 전부터 교류하던 귀족 가문이 있는데, 다른 대륙에서 온 가문이라서 정보도 많지 않고.>

바라크 역시 알아내는 일이 쉽지 않은 듯 보였다.

‘다른 대륙에서 온 귀족 가문이라…….’

[쥴리아노 백작의 얼굴도 좀 이상했어요. 새파랗게 질린 게…….]

‘그러게. 전에 봤을 때보다 많이 초췌해 보였어.’

아델리아가 쥴리아노 백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흑마법 같은 건 아니었어?’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침음했다.

[사실 그게 오묘해요.]

‘오묘해?’

[네. 직접적으로 흑마법이 깃든 건 아닌데……. 기운이 탁한 건 사실이었거든요.]

‘네 말은 영향이 아예 없을 가능성도 있지만, 엮여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거지?’

[확신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오묘하다고 말씀드린 거고.]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바라크의 연락을 조금 더 기다려 보자.’

[네, 누님!]

***

며칠 뒤. 아델리아는 또 다른 티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쥴리아노 백작저에서 올리비아 영애를 봤다는 소식이야. 요양지에서 돌아온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백작저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멀쩡히 잘 걸어 다닌다고 했어. 이틀 뒤, 빌리언트 후작가의 티파티에 참석한다고 하더라.>

바라크의 서신을 받자마자 쥴리아노 백작저에 소식을 넣었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아델리아는 빌리언트 후작가의 티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올리비아의 상태를 직접 확인해야 해.’

빌리언트 후작가에 도착한 아델리아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에스테르 영애.”

연회장 입구에서 주최자인 빌리언트 영애와 마주쳤다.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죠.”

빌리언트 영애가 아델리아를 반기며 티파티가 준비된 연회장 안으로 안내했다.

“모두들 에스테르 영애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제가 늦은 건 아니죠?”

“제때 오셨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델리아는 빌리언트 영애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렸다.

티파티가 준비된 테이블과 가까워지자,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조금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제일 끝 테이블에 앉아 있는 올리비아를 발견했다.

아델리아가 기쁜 마음에 속으로 외쳤다.

‘……릭, 저기 올리비아야!’

[…….]

그러나 올리비아와 가까워질수록 아델리아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저건 누구지? 올리비아 뒤에 서 있는 하녀.’

올리비아와 친하게 지내다 보니, 그녀의 곁에 있는 하녀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올리비아의 뒤에 서 있는 하녀는 처음 보는 하녀였다.

무엇보다.

‘저게 뭐야……?’

아델리아가 올리비아 뒤의 하녀를 응시하며 올리비아가 앉아 있던 테이블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올리비아가 아델리아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 아델.”

오랜만이야. 하며 인사를 건네는 올리비아의 낯빛이 파리했다.

“어……. 올리비아, 오랜만이야.”

잠깐 그녀를 바라보던 아델리아는 다시 하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하녀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그저 새카만 머리카락에 검은색의 눈동자였는데, 공허한 기운이 가득했다. 마치, 까마귀가 떠오르기도 했다.

‘릭……. 저 기운.’

아델리아가 미간을 설핏 구겼다. 리그하르트가 작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네, 누님. 저거, 그거예요.]

흑마법.

올리비아의 곁에 붙어 있던 하녀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흑마법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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