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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47)화 (147/161)

147화

순간, 테오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인데.’

제법 가까운 거리였기에 아델리아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숨기지 못한 의혹이 가득했다.

테오스는 펠슨에게 부탁이 아닌,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시력에 관하여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평생 속이지는 못하실 겁니다. 아가씨께서는 굉장히 감이 좋으신 분이지 않습니까?

-펠슨 선생. 나 역시 숨기는 것에 이골이 난 사람이오. 게다가 선생이 있지 않은가.

-저를 믿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언제까지고 아가씨께 거짓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펠슨은 자신이 없다고 했다. 이해한다. 평생을 올곧게 살아온 사람이었으니 그 속도 말이 아닐 테지.

-선생. ……아델리아가 내 시력에 대해 알게 되면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내려 할 것이오. 그런데, 그 이유가 딸아이를 슬프게 할 것이 분명하거든. ……난 말이오. 그걸 바라볼 자신도, 그럴듯하게 위로할 말솜씨도 없소. 그저 숨기는 방법 말고는.

그쯤 말을 해 뒀으니, 펠슨 선생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 이유가 아델리아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최대한 조심해 보겠습니다.

-부탁하지.

그렇게 10년을 숨겨 왔다. 중간중간 위태로웠던 적이 있었으나, 걱정했던 것보다 무사히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효과가 다섯 배는 좋은 약을 만들었다고 했으니, 완치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테오스가 침착하게 아델리아를 불렀다.

“아델리아.”

그러나 아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

“네, 아빠?”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 표정이 더 무섭다는 걸 모르는 걸까.

테오스가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냐?”

그러자 아델리아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빠. 그냥, 오빠도 함께 왔으면 좋았겠다 싶어서요. 다음에는 오빠도 같이 와요.”

“……그래, 그러자꾸나.”

때마침 디저트가 나왔다.

아델리아가 조각 케이크의 끝부분을 포크로 잘라 내어 입속에 넣으며 말갛게 웃었다.

그 표정에 안심이 되다가도, 이유 모를 불안감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다.

***

“안경 뭐야. 안 어울리게.”

“…….”

그리젤 길드의 건물. 바라크의 수하이자, 가장 신뢰하는 벗인 페드로가 길드장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둥그런 안경을 쓰고 책상에 앉아 있던 바라크를 발견했다.

“무슨, 연회라도 참석하는 거야?”

바라크는 저답지 않게 정장을 빼입은 상태였다.

바라크가 검지로 안경을 슬쩍 들어 올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이상해?”

페드로가 소파에 앉으며 가슴팍 앞으로 팔짱을 꼈다. 피식, 바라크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터졌다.

“뭐가? 지금 네 꼴이?”

“어.”

고개를 끄덕이던 페드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상하지.”

음, 짧게 침음하던 바라크가 책상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가 섰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이리저리 관찰하더니 물었다.

“……그래도, 평소보다 좀 덜 험악해 보인다거나.”

“……뭐?”

“암흑가 골목의 부랑자처럼 보이지 않는다거나.”

“…….”

페드로가 침묵하자, 바라크가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아니야? 그대로야?”

여전히 주먹질을 업으로 삼고 살아갈 것 같은 야만인 냄새가 나냐고 묻는 거였다.

그러자 페드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바라크를 쳐다봤다.

“여자 생겼어?”

“무, 무슨!”

바라크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자, 페드로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진중한 목소리로 바라크를 불렀다.

“이봐, 대장.”

“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

페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장도 나도, 평범하게 살긴 글렀어. 알잖아? 여긴 시궁창이고, 시궁창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놈들은 그 냄새를 빼지 못한다는 거.”

페드로의 말에 바라크가 힘없이 몸을 돌려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시궁창…….”

“사람 죽이고 그걸로 돈 벌어 먹고사는 삶이 천국은 아닐 거 아니야?”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바라크는 거울 속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지옥을 벗어났으니 시궁창 정도면 만족해야 하는 게 맞는데.’

그런데도 욕심이 나는걸.

페드로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애써도 씻어 낼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더러운 오물이 묻었고 역한 냄새가 배어 있지. 제아무리 예쁜 포장지로 감싼다고 해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아.”

“난…….”

“그걸 가려야만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자라면, 대장. ……포기해.”

“…….”

그게 마음이 편할 거라고. 페드로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

그날 저녁. 모두가 잠이 든 시각.

“왔어?”

아델리아가 그리젤 길드를 찾아왔다.

바라크가 그녀를 맞이하며 책상을 돌아 나오자, 아델리아는 소파에 앉으며 머리카락과 얼굴을 숨겼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의뢰 하나 더 하려고 왔어.”

그러자 바라크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의뢰?”

“쥴리아노 백작저에 있다는 그 사람.”

“아, 리아르헤르 대륙에서 왔다던?”

“응. 그 귀족 가문을 조사하면서 흑마법에 대해서도 같이 조사해 줘.”

“……흑, 마법?”

그러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 가문은 물론이고 그 가문의 영지, 또는 그 가문이 뿌리내린 제국에서 흑마법의 흔적이 있었는지 알아봐 주면 좋을 것 같아.”

아델리아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던 탓인지, 바라크의 낯빛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알았어. 바로 사람을 보내도록 할게. 그리고 이거. 네가 찾아 달라던 사람.”

“드디어 찾았네?”

“일주일 뒤, 자폭환 밀거래가 예정되어 있어. 그때 나타날 거야.”

바라크의 설명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리아는 바라크에게 자폭환을 설계하고 제작한 사람을 찾아 달라고 했다.

악시덤이 죽고 귀족파 세력의 꼬리를 자르며 증거가 없어져 버려서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아델리아는 바라크가 건네준 서류를 품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 바라크. 이건 내 선물.”

쿵—. 이번에는 아델리아가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의뢰 선수금.”

“너무 많아.”

“남으면 빌로체 보육원 운영 자금에 보태.”

빌로체 보육원은 황태자 카르세스가 후원하던 보육원이자, 바라크가 잠시 몸을 의탁했던 보육원이었다.

아델리아는 A.E의 이름으로 그 보육원을 후원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도 잊지 않고 운영비를 보내시는 것 같긴 하지만…….’

후계자 수업 때문에 유학 중인 전하께서 돈이 어딨겠어.

아델리아는 광산과 대장간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아이들이 곧 미래다!’

카르세스는 출신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라면 곁에 두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좋은 시설과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다 보면 그들 중에서 분명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나올 것이다.

‘앞으로 전하께 도움이 될 거야.’

[어이구. 간이고 쓸개고 다 떼어 주시겠네.]

아델리아의 생각을 읽은 리그하르트가 투덜거렸다.

[10년간 연락 한 통 없는 놈이 뭐가 이쁘다고 이러세요! 이번만 그랬나? 디크레드 영지에 있을 때도 연락이 없었지!]

그러자 아델리아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릭. 난, 전하께서 날 어떻게 대하든 상관 안 해.’

아델리아는 이전 삶에서 카르세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

카르세스는 가족을 잃고 가문을 살리기 위해 기사단에 들어온 아델리아를 가장 먼저 알아봐 주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여자라고 모두가 멸시할 때, 그분은 날 성별이 아닌 실력만 보고 거둬 주셨다고.’

아마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거두지 않았다면, 아델리아는 한참을 더 성별로 시비를 거는 기사들과 다투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악시덤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테오스와 데릭의 죽음을 조사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움직여 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악시덤의 개가 되었을 때도, 전장에서 돌아와 지쳐 있을 때도.

‘변함없이 날 걱정해 주고 챙겨 줬었다고…….’

그러니까.

아델리아가 주먹을 슬며시 쥐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마.

이전 생에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라며, 기다리겠다던 카르세스의 목소리가 여전히 선연하다.

결국, 황궁을 떠나 죽어 버렸기 때문에 영영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전생에 전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벌을 이제야 받는지도 모르지.’

아델리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엇보다 지금 전하께서는 후계자 수업 중이야. 자신의 위치도, 신분도 드러낼 수 없다고.’

악시덤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를 따르던 귀족파 세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이 10년간 조용했다고는 하지만, 그 음흉한 작자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아델리아가 곧장 일어섰다. 그러자 바라크가 그녀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벌써 가려고?”

“응, 밀거래 현장을 잡으려면 미리 지리를 익혀 둬야지.”

“……같이 갈까?”

“아니, 너 바쁘잖아. 내가 맡긴 의뢰만 몇 개야?”

아델리아가 펼친 손가락을 접어 가며 하나둘 세었다.

“일곱 개네, 일곱 개. 그거 다 알아보려면 몸이 열 개래도 부족하시겠는데요? 길드장님?”

“……알았어. 대신, 조심해. 다치지 말고.”

문으로 걸어가던 아델리아가 키득거리며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네네, 명심하죠.”

길드 건물을 나온 아델리아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숨겨 두었던 말에 올라탔다.

이랴! 말고삐를 거머쥐고 박차를 가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잘 대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생각지도 못했던 흑마법이 다시 나타났어.’

게다가 남아 있던 자폭환을 밀거래하려는 자들도.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 난 우연 따위 믿지 않아.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위협의 징조라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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