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바라크와 접선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으음, 내일이라고……?”
오늘은 자폭환의 밀거래 현장을 덮치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올리비아에게서 티파티 초대장이 왔다.
초대장을 내려다보던 아델리아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자 세라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기다리시던 초대장이었잖아요?”
“응, 그렇긴 한데…….”
백작저에 초대하겠다던 올리비아는 일주일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진짜 잠입을 해야겠어.
-[뒤는 제게 맡겨 주세요!]
밀거래 현장을 정리하고 백작저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던 찰나, 초대장이 날아온 것이다.
‘새벽에 밀거래 현장을 처리하고 아침에 들어와서 후다닥 준비한 뒤 마차를 타면 되겠……, 지?’
말로는 가능한 일인데, 잠도 자지 못하고 새벽 내내 검을 들고 날뛰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러를 사용하게 될 일도 있을 것이고 달아나는 잔당들을 쫓아야 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그 모든 상황을 감안하고서도.
‘가능, ……하겠지?’
[……누님 편을 들어 드리고 싶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냉정한 녀석.’
[이왕이면 냉철하다고 해 주시죠.]
흥, 아델리아가 초대장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세라를 향해 말했다.
“내일 시간 맞춰서 도착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줘, 세라.”
“물론이죠,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응……. 세라 걱정은 안 해. 내가 문제지. 아델리아가 눈꼬리를 내려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다. 이번에 올리비아의 초대를 미루게 되면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
아델리아가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빠르게 처리하고 돌아와서 티파티에 참석하고 만다.’
***
수도에서 서쪽에 위치한 루키나 영지. 루키나 영지는 항구 도시로도 유명했다.
늦은 새벽 시간임에도 드나드는 배들의 불빛과 사람들의 활기로 항구는 항상 환하게 반짝거렸다.
그러나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보렐트나 해안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시커먼 절벽이 하늘로 솟구치고 거대한 파도가 날카로운 절벽을 쉬지 않고 때렸다. 거친 암석 절벽 한편의 작은 동굴에서는 희미한 물안개가 흘러나와 으슥한 분위기가 짙어졌다.
한동안 파도 소리만이 전부였던 그곳에 사람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로시안트 제국에 남아 있는 자폭환은 이게 전부라 보면 됩니다.”
“흥. 어차피 다시 만들면 될 것을.”
생색내기는. 남청색 망토를 걸친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자폭환이 든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던 갈색 망토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을 이제는 구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음,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소. 재료들의 이동 경로와 출처들을 죄다 기록하고 감시한다지.”
“예. 10년 전 전쟁에서 자폭환이 무차별적으로 남용되었던 탓이지요. 멍청한 귀족 놈들.”
퉷, 갈색 망토를 두른 사내가 침을 뱉으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 말에 턱 끝을 매만지던 남청색 망토의 사내가 넌지시 물었다.
“그럼 다른 나라에서 만들면 될 것이 아니오? 그러니까, 자폭환 제조법을 넘겨준다면…….”
그러자 갈색 망토 사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 하다못해 자폭환을 개발한 자를 우리 제국으로 잠시 빌려준다면.”
채앵—.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갈색 망토를 입은 사내가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함께 온 수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검을 뽑았다.
“조용히 상자만 들고 떠나시오. 더 이상의 욕심은 용납하지 않겠소.”
“…….”
동굴 안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숨 막히는 공간을 가로질러 조롱 섞인 미성의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기다리다 숨넘어가겠네. 사내놈들이 검을 빼 들었으면 뭐라도 베고 찔러야지, 뭘 그리 멍청하게들 서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그 목소리에 사내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향했다.
동굴 안쪽이었다. 철벅철벅,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둠 속에서 은색 검날만이 반짝였다.
“누구냐!”
남청색 망토를 입은 사내가 소리쳤다.
‘동굴 안쪽에서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이곳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디서 기밀이 새어나간 거지?
빠드득, 사내가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자 동굴 안쪽에서 걸어 나온 아델리아가 작게 웃었다.
“시간 없으니까 통성명은 관두자고.”
검은 망토와 복면으로 위장한 아델리아는 곧장 리그하르트를 휘두르며 튀어 나갔다.
물이끼로 미끌거리는 바닥을 거리낌 없이 달렸다.
“죽여라!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사내의 명령 하나로 그곳에 모인 괴한들의 검이 모두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복면 속 아델리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순간, 아델리아가 오러의 일부를 성검에 흘려보냈다. 그리고 바닥에서 동굴 천장까지 튀어 오른 아델리아는 몸을 비틀며 검을 횡으로 베었다.
촤아아악—!
비명이 들릴 새도 없이 괴한들의 절반이 나가떨어졌다.
남은 괴한들이 멈칫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가늠하지 못해 넋이 나간 듯 보였다.
“뭣들 해! 공격하란 말이다! 이 멍청한 것들!”
그나마 정신을 붙들고 있던 것은 밀거래를 주도하던 양쪽 우두머리였다.
바닥에 착지한 아델리아가 뒤로 몸을 물렸다가 벽을 차며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까앙—. 아델리아가 내려찍듯 검을 휘두르자, 남청색 망토의 사내가 힘겹게 검을 받아 냈다.
끼기기긱. 아델리아는 곧장 검의 각도를 바꾸어 사내의 목을 깊숙이 찔렀다.
“커억!”
남청색 망토의 사내가 동굴 바닥 위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빠르게 검을 뺀 아델리아는 쉴 틈 없이 갈색 망토의 사내를 향해 몸을 돌렸다.
헉, 갈색 망토를 입은 사내 뒤로 그의 수하들이 두려움에 숨을 들이켰다.
‘무능한 놈들!’
갈색 망토의 사내가 겁에 질린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오러를 가진 실력자다! 오러를 보였다는 것은 어차피 우리를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죽여라! 우리가 살길은 그것뿐이다!”
오? 아델리아가 눈썹을 들썩였다.
“똑똑하네. 한꺼번에 덤벼. 나 진짜 시간 없거든.”
“이……!”
조롱당했다는 생각에 갈색 망토의 사내가 소리치며 아델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뒤로 수하들도 함께 검을 치켜들었다.
채앵—. 챙, 챙. 동굴 안에서 난투가 벌어졌다. 아델리아에게로 쏟아지는 무차별적인 검날은 그녀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였다.
수하들이 하나둘 목숨을 잃게 되자, 갈색 망토의 사내가 기회를 엿보다 동굴을 빠져나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아델리아는 그를 급히 뒤쫓기보다, 남은 수하들을 먼저 빠르게 처리했다.
마지막 수하까지 처리하고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자폭환 상자를 바닷속으로 집어 던졌다.
몸을 돌린 아델리아가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실 다 처리하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 두 세력이 서로 칼부림하고 남은 세력을 상대하려 했다. 그러나 두 세력은 검만 빼 들었지, 서로 눈치만 보며 미적거리고만 있었다.
가뜩이나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아델리아는 그냥 한꺼번에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제조법과 자폭환을 개발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아델리아는 생각을 바꿨다.
‘제조법과 개발자가 살아남아 있는 이상, 자폭환은 또 어딘가에서 만들어질 거야.’
한번 당한 경험이 있으니, 그들의 수법은 더욱 교묘해지고 악랄해질 것이다.
‘또 어린아이들이 이용당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그래서 아델리아는 계획을 바꾸었다. 이 자리에 모인 놈들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갈색 망토는 살려서 보내기로.
‘그리고 그 뒤를 쫓아 개발자를 찾는다.’
짠 내 가득한 바닷바람이 아델리아의 검은 망토를 흔들고 지나갔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어두운 시야로 희미한 빛줄기가 곡선을 그리며 나타났다.
갈색 망토의 사내가 지나간 흔적이었다.
조금 전 아델리아가 검을 겨누면서 자신의 오러를 갈색 망토를 입은 사내에게 붙여 놓았다.
덕분에 아델리아의 눈에만 보이는 백금색의 가느다란 오러가 실처럼 흔적을 남긴 것이다.
‘릭. 가자.’
[네! 누님!]
아델리아가 그 흔적을 찾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속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다그치며.
***
오러의 흔적은 루키나 영지와 수도의 경계가 맞물려 있는 외곽까지 이어졌다.
폐가와 다름없는 저택 앞에 선 아델리아가 건물 안으로 이어진 오러를 바라보았다.
‘몇 명?’
[스무 명 정도 됩니다, 누님.]
리그하르트가 건물 안 인원을 파악한 뒤 대답했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적네.’
대대적으로 자폭환을 만들어 전쟁에 조달한 단체치고는 예상보다 조촐했다.
[어, 그런데 누님.]
‘응?’
[뭐,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자기들끼리 칼부림이 났는데요?]
‘어……?’
그때였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저택의 문이 박살이 나며 안쪽에서 사람이 날아와 돌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쿨럭. 튕겨 나온 사내가 피를 토한 뒤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갈색 망토의 사내였다.
“이런 미친 자식!”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저택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사내를 보며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를 고쳐 잡았다.
‘아, 또 무슨 일이야? 저 녀석은 죽으면 안 된다고! 고문! 고문해서 털어먹을 정보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조법도 찾아야 하고 개발자도 찾아야 한다고!
[누님, 고문 말고 심문.]
‘그게 그거지!’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저택의 3층. 수많은 창문 중, 한곳에서 모른 체하려야 할 수 없는 강렬한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라색 오러……?’
어쩐지 낯익은데?
아델리아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서둘러 갈색 망토의 사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