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일어나셔야죠!”
해가 뜨기 직전, 겨우 집에 도착한 아델리아는 부랴부랴 씻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한 시간도 채 잠들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세라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우웅……. 일어날게.”
아델리아가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벼 가며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서 씻고 나와서도 멍한 상태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와, 꿈에서도 황태자 전하가 나왔어.’
어제의 재회가 퍽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꿈에도 카르세스가 나타난 걸 보면.
그는 비록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아델리아는 그 복면 너머의 얼굴을 알고 있다.
20대의 카르세스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까닭에 복면 위로 그의 성장한 얼굴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다.
그런데도 조금은 얼떨떨했다.
이번 생에서 10대의 황태자와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어제 마주쳤던 카르세스는 어째서인지 낯설기까지 했다.
‘그래……. 이번 생의 전하께서도 언제까지고 10대일 리 없지.’
10대의 카르세스와 지내며 20대의 카르세스 모습을 잠시 잊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카르세스는 건장한 사내가 되어 돌아왔다.
복도를 가득 채우던 낮고 밀도 높은 목소리도, 어지간한 사내 하나쯤은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정도의 커다란 체구도.
어린 시절의 모습을 덧씌우기에 더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모습이었다.
미래를 바꾼 영향인지, 지금의 카르세스는 이전 삶의 카르세스를 이미 뛰어넘은 상태였다.
……가씨. 아가씨.
“아가씨?”
세라의 목소리에 아델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응?!”
“왜 그렇게 멍하니 계세요? 많이 피곤하세요?”
“아냐. 피곤하기는……. 그런데 왜 불렀어?”
“드레스는 어떤 걸로 할지 여쭈었어요.”
“아.”
아델리아는 가장 오른쪽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걸로 할게.”
“네, 아가씨.”
아델리아가 남청색 드레스를 고르자, 세라가 방긋 웃으며 다른 드레스를 정리했다.
‘전하 때문에 정신을 놓고 있었네.’
이러면 안 돼. 지금은 올리비아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아델리아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올리비아를 만나기 위해 쥴리아노 백작저로 향했다.
“어서 와, 아델!”
“……어, 그래.”
쥴리아노 백작저에 도착한 아델리아는 속으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해맑은 모습으로 아델리아를 맞이한 까닭이다. 얼마 전, 티파티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음침하고 어두운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다.
“어서 오세요, 에스테르 영애.”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쥴리아노 백작님.”
올리비아의 아버지, 쥴리아노 백작까지 환한 미소로 아델리아를 반겼다.
‘문 앞에서 돌아가라며 험악한 얼굴로 쫓아낼 때는 언제고.’
그런 일은 싹 잊어버렸다는 듯, 백작저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평소처럼 화사하고 쾌활했다.
“가자, 아델. 네가 좋아하던 유리 온실에 자리를 마련했어.”
“응.”
아델리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아, 오늘 초대된 사람은 아델리아 너뿐이야.”
“응? 티파티라며.”
“티파티에 꼭 많은 인원을 초대하란 법은 없잖아?”
“으응. 그건 그렇지?”
아델리아는 올리비아를 따라 쥴리아노 백작저의 유리 온실로 향했다.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꽃과 싱그러운 나무들이 자란다는 그 온실이었다.
온실 한가운데, 작은 분수대 옆으로 올리비아의 성격을 고스란히 닮아 있는 아기자기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어.”
자리에 앉자마자, 차와 디저트가 준비되어 나왔다.
“그동안 연락이 뜸했었지?”
올리비아는 미안하다며 쓰게 웃었다.
“사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할아버지 댁으로 요양을 다녀오던 차였어.”
“그랬구나. 정말 걱정 많이 했었어. 그런데,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았는데?”
“근래 생긴 새로운 취미에 너무 빠졌었나 봐. 밤낮없이 몰두하다 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았어.”
“아, 보석 세공?”
“응.”
반년 전이었던가. 올리비아는 보석 세공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반짝거리는 보석을 좋아했었다. 그러더니 기어이 자신이 직접 보석을 세공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천한 자들이나 하는 일이라며 백작 부부는 말렸지만, 올리비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제법 실력도 좋았고.’
아델리아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그 하녀는 어디에 있어?”
“응? 하녀? 어떤 하녀?”
“빌리언트 후작가 티파티에 동행했던 하녀.”
“으음.”
아델리아가 까마귀같이 새카맣던 하녀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고민하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런 애가 있었나? 글쎄, 누군지 기억이 안 나.”
“……그래.”
아델리아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랬었지. ……그런데 시기가 좋지 못했어.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자리를 비우셨거든.”
“그래? 어떤 분인데?”
이번 질문에도 올리비아는 난처하다는 듯 미소 짓더니 말을 돌렸다.
“조만간 다시 자리를 마련할게. 그건 그때 직접 보고 판단해.”
“응……. 그래.”
올리비아는 태연하게 차를 마시며 소소한 일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몹시도 편안해 보였다.
‘릭. 이상한 거 없어?’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때 봤던 사역마조차도요.]
‘거처를 옮긴 건가…….’
이 모든 상황이 너무도 평화롭고 따스했다.
초췌하고 파리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백작 부부와 올리비아. 저택 곳곳에 배치된 고용인들까지.
완벽할 정도로 평온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졌다.
‘분명 뭔가 있는데…….’
그러나 티파티가 끝날 때까지, 예상했던 흑마법의 흔적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해.’
백작저의 분위기도 그렇고 백작 부부나 올리비아, 고용인들이 모두 그저 미소 지을 줄밖에 모르는 인형처럼 느껴졌다.
‘역시, 그런 건가…….’
[뭐가요, 누님?]
‘티가 나게 숨기고 있어.’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고, 궁금하지 않냐고.
‘일종의 초대장이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뭘 숨기고 뭘 초대하는데요?]
올리비아와의 티타임을 마치고 마차에 오른 아델리아는 한동안 침묵했다.
[누님! 누님!]
‘짹짹거리지 좀 마. 생각 정리 중이니까.’
칫, 리그하르트가 투덜거렸다.
공작저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늦은 밤.
잠자리를 봐 주던 세라까지 방에서 나가자, 아델리아는 슬며시 일어났다.
‘초대를 받았으니 가야지.’
[이제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응. 쥴리아노 백작저로 갈 거야.’
[또요?]
아델리아는 오늘 티파티가 누군가의 초대장이라고 판단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인위적인 백작가 사람들의 모습. 초대장을 보낸 사람은 그 상황을 아델리아가 궁금해하고 의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흑마법을 사용하는 자겠지.’
[어떻게 하시려고요?]
‘말했잖아. 초대받았으니 초대에 응하겠다고.’
[지금, 이 시간에요?!]
‘응!’
***
아델리아는 조용히 공작저를 빠져나와 망설임 없이 말을 타고 달렸다.
티파티를 위해 쥴리아노 백작저를 방문했던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드레스가 아닌 잠행용 복장이라는 거였다.
눈만 빼고 다 가려지는 검은 복면과 머리카락까지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후드가 달린 검은 망토까지.
복장만으로도 목적이 확연히 달라졌음이 드러났다.
쥴리아노 백작저 앞은 스산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하필 날씨도 좋지 못했다.
쿠르르르, 콰르르르. 하늘은 요란하게 천둥이 울리고 간헐적으로 번쩍거리며 번개가 내리꽂혔다.
[히익!]
그 음산한 모습에 긴장했던 것인지, 리그하르트가 천둥소리 한 번에 비명을 내질렀다.
‘쫄보.’
[쪼, 쫄아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천둥이 시끄러워서 그런 거거든요!]
‘아, 네네. 그러셨어요.’
[진짜예요! 시끄러워서!]
‘그래그래.’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를 달래며 눈앞의 백작저를 살폈다.
낮에 봤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것은 아델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낮에는 개나리를 떠오르게 할 만큼 화사하게 보였던 노란 지붕과 상아색 벽돌로 지어 올린 쥴리아노 백작저의 모습이 어딘가 섬뜩했다.
벽면을 타고 올라간 넝쿨이 무질서하게 뒤엉켜 오래된 건물이 삭고 갈라진 것처럼 보였다.
까악, 까악, 까악―.
검은 이끼가 군데군데 생겨난 노란 지붕 위는 시커먼 까마귀들이 빙글빙글 돌며 스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얼마 전 다녀왔던 폐가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상하지. 철문도, 저택의 정문도 모두 활짝 열려 있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린 괴물처럼.
아델리아가 저택을 노려보며 씨익 웃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번개의 섬광이 번쩍이고, 붉은 눈동자가 유난히 번뜩거렸다.
‘안에 뭐가 있든, 후회하게 해 주겠어.’
내 친구를 건드리고, 날 초대한 것을 말이야.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를 꽉 거머쥔 채, 열린 철문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