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52)화 (152/161)

152화

아델리아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낯선 침실이었다.

‘여긴…….’

어디지? 어딘가 낯설지 않은데?

닫혀 있던 커튼 틈새로 창밖의 밤하늘이 보였다.

‘아직도 밤이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델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머리가 핑— 돌긴 했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옷이…….’

잠행용 검은 옷과 복면은 온데간데없고 프릴이 가득한 연분홍 잠옷으로 갈아입혀진 상태였다.

왜 자신이 이런 상태인지 알 길이 없어 주위를 잠시 둘러보고 있자니, 난데없이 머릿속이 요란해졌다.

[누니이이이임!!]

으앙! 누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누님! 누니이임!

리그하르트가 야단을 떨었다. 머릿속이 징징 울려 대는 바람에 아델리아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릭……. 그만.’

진정 좀 해.

말귀를 알아들은 것인지, 리그하르트가 잠깐 조용해졌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아델리아가 다시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훌쩍이던 리그하르트는 눈물 머금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게요오…….]

리그하르트가 말끝을 늘이며 뜸을 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 황태자 침실이에요, 누님.]

‘……뭐어어?!’

놀란 아델리아가 주변을 다시 두리번거렸다.

황태자의 침실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낯설지 않다던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딱 한 번, 이전 생에서 카르세스의 침실에 들어온 적이 있다.

‘그때보다 더 조촐하네…….’

아델리아가 침실을 천천히 둘러보며 생각했다.

말없이 주위만 두리번거리고 있자,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기억 안 나세요? 쥴리아노 백작저에서 빠져나온 다음 곧장 정신을 잃으셨어요.]

심지어 말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칠 뻔했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그때, 전하께서 구해 주셨다고?’

[네!]

아델리아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왜 그곳에 있으셨던 거지?’

[그거야 저도 모르죠? 조금 이따가 오면 그때 한번 물어보세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펄쩍 뛰었다.

‘물어보라고? 미쳤어?! 오시기 전에 도망가야지!’

[예? ……도, 망이요? 아니, 왜요?!]

‘10년 만에 처음 마주친 자리에서 전하도 알아보지 못하고 검까지 겨눴어.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그 몰골로 정신까지 잃고 전하의 침실까지 차지했다고!’

슈미엘이라는 흑마법사를 상대하며 아델리아의 행색은 엉망이 되었다.

전신을 적신 땀은 물론이고, 슈미엘이 만든 그림자들의 진득거리는 파편이 온몸에 들러붙어 몸에서는 악취까지 났다.

‘아아아아!’

쪽팔려!

‘내가 생각한 재회는 그런 오물 범벅이 아니었어!’

아델리아가 자신의 손바닥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러다 곧장 고개를 들었다.

‘아니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달아나야 해. 여기서 마주칠 수 없다고!

아델리아가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때마침, 테이블 위로 입어 달라는 듯 곱게 접혀 있는 옷가지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델리아는 그 옷들 중 제 몸집보다 조금 큰 적갈색 망토만 걸쳤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가리기에 딱 좋았다.

그리고 문을 살짝 열어 바깥을 살폈다.

‘없지?’

램프의 불빛마저 꺼져 있는 복도는 매우 어두웠다.

[정말 이대로 가시려고요? 황태자가 찾지 않을까요?]

구해 줬더니 말도 없이 가는 경우가 어디에 있냐며, 리그하르트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주위를 경계하던 아델리아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사과는 나중에 하면 돼.’

일단 지금은 전하랑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아델리아는 복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황태자 궁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음…….”

루드가 달아나는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도망가시는데요?”

“그러게.”

팔짱을 낀 채, 기둥에 기대어 있던 카르세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날이 아직 어둡기도 하고 괜히 민망해할까 봐, 침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적당히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두면 깨어나는 대로 찾아오겠지, 했더니 대충 망토만 걸치고 줄행랑을 칠 줄이야.

어쩐지 그녀다운 행동인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혹시 몰라 마차를 미리 준비해 뒀으니 돌아가는 길이 어렵진 않을 테지.’

루드가 물었다.

“다시 모셔 올까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고개를 저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아니, 내버려 둬.”

어차피 금방 다시 보게 될 테니까.

카르세스는 아델리아가 황태자 궁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몸을 돌렸다.

***

보란 듯이 준비되어 있던 마차를 얻어 타고 공작저로 돌아왔다.

마차 안에서도 아델리아는 민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차까지 준비해 두셨어…….’

내가 도망갈 걸 미리 알아차리신 게 분명해.

‘설마, 도망가는 걸 보고 계셨던 건 아니겠지?’

아델리아는 조심스레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온종일 벽난로에 불이 타오른 덕분인지, 방 안의 공기와 이불 속의 온기 모두 여전히 포근했다.

아델리아가 침대에 누워 자리를 잡자, 리그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음흉하지 않아요?]

‘응? 누가? 전하가?’

[네! 황태자 궁에 방이 몇 갠데. 왜 하필 자기 방이냐 이거죠! 그러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리그하르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성년식을 코앞에 둔 공작저의 공녀가 황태자의 침실에 드나드는 것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이유야 어찌 되었건 카르세스나 아델리아의 평판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하지만…….

아델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 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전하의 침실이거든.’

이전 생에서 카르세스의 호위를 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였다.

카르세스는 숱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런 위협에서 자신을 지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중 하나가 결계였어.’

그러나 힘없는 황태자를 위해 마력을 사용해 줄 마법사는 없었다.

‘결계에 필요한 마석도 귀한 편이었고.’

황태자 궁 전체를 보호할 결계는 당연히 사용할 수 없었고, 그나마 황태자의 침실에만 결계를 걸어 놓았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복장을 한 공작가의 공녀를 아무 방에나 눕힐 수는 없었을 테고. 그랬기 때문에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자신이 아는 가장 안전한 장소에 데려다 놓은 셈이었다.

[어, 음. 그러니까……. 황태자는 가장 안전한 방을 누님께 내어 줬던 거네요?]

‘응…….’

크, 크흠. 그건 또 몰랐네. 리그하르트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했다.

‘게다가 문양이 없는 마차까지 준비해 주셨잖아. 아마 들킬 일은 없을 거야.’

이쯤 되니 인사도 없이 도망쳐 나온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감사 인사는 다음에 하자……. 조금 멀쩡한 모습으로.’

그때.

“아……!”

심장께로 가벼운 통증이 스쳤다.

[왜 그러세요, 누님?]

‘어……. 아니야…….’

아델리아는 심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랄까. 누군가가 심장을 슬쩍 움켜쥐었다가 놓는 느낌? 그러한 감각이었다.

쥴리아노 백작저에서 한계까지 오러를 썼던 게 문제였나…….

아델리아가 원인을 찾는 사이, 심장의 통증이 잦아들었다.

‘어? 또 괜찮네?’

[누님? 역시 무리하셨던 거죠?! 그렇죠?!]

그래! 그러니까 헛소리도 하시고 정신도 잃으셨지!

리그하르트가 또 잔소리를 시작하자, 아델리아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시끄러워, 릭! 나 자야 해! 아침에 이야기하자, 아침에!’

[치이.]

리그하르트가 작게 투덜거리다, 이내 조용해졌다.

고된 또 하나의 하루가 그렇게 끝이 났다.

***

어두운 침실. 침실은 여느 귀족 영애들의 방처럼 화려했고 사치품으로 가득했다.

순백색의 아주 얇은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에는 슈미엘이 누워 있었다.

시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었다. 가슴 위로 모아 올린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뼈가 앙상했다.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슈미엘의 눈꺼풀이 서서히 벌어졌다.

새카맣게 물든 눈동자가 침대 천장을 공허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커억!!”

슈미엘이 난데없이 피를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쿨럭, 켁켁. 시커먼 핏덩이가 여러 차례 침대 이불 위로 쏟아졌다.

‘큰일 날 뻔했어…….’

소멸 직전까지 갔던 것이 10년 전이었다.

아직 그때만큼의 힘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기에 무리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만 궁금했는걸.’

휴시안이 숨기고 있던 아이.

알고 보니 자신이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에스테르 공작의 핏줄이라지.

그래서 만났다.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냈다. 에스테르 공작보다 월등히 완벽한 그릇을.

“하하,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슈미엘이 고개를 젖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몸만 가지면 자신의 흑마법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인가. 강한 흑마법을 마음껏 사용해도 견뎌 낼 수 있는 완벽한 그릇!

“아델리아, 아델리아 에스테르!”

슈미엘이 미친 듯 웃었다. 그 순간.

퍼억—!

“꺄악!”

슈미엘의 종잇장 같은 몸이 침대에서 밀려나 벽에 처박혔다.

끄윽…….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린 슈미엘이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방 한편에서 걸어 나오던 휴시안과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야, ……휴시안.”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