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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53)화 (153/161)

153화

매번 무감하고 심드렁하던 휴시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뭐가 널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을까.”

슈미엘은 환희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휴시안의 모습이 어쩐지 통쾌하기도 해서.

슈미엘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휴시안에게로 걸어갔다.

“날 죽이러 왔니? ……고작 그 여자아이 하나 때문에?”

슈미엘이 상처받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시안. 우리 10년 만에 만난 거야. 할 이야기가 참 많은데, 넌 다짜고짜 날 죽이려고만 하는구나.”

슈미엘의 삐쩍 마른 손가락이 휴시안의 뺨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난 네게 고마워하고 있어, 휴시안. ……모두 네 덕분이거든.”

“…….”

슈미엘이 휴시안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그렇게 티 나게 숨기는 바람에 찾을 수 있었어. ……완벽한 그릇 말이야.”

키득키득, 호흡을 헐떡이면서도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에스테르 공작을 그릇으로 삼으려던 계획이 실패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슈미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휴시안이 입을 열었다.

“그 아이, 건드리지 마.”

그러자 슈미엘이 휴시안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싫어.”

“슈.”

휴시안이 눈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내 손으로 널 죽이게 하지 마…….”

그러자 슈미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휴시안. ……넌 너무 물러.”

슈미엘이 뒷걸음질 치며 창가를 등지고 섰다. 휴시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바로 날 죽였어야지…….”

“슈.”

“넌 지금 다신 없을 기회를 놓친 거야, 휴시안.”

그리고 곧장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와장창,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슈미엘이 창밖으로 떨어졌다.

“슈!”

놀란 휴시안이 창가로 달려가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휘이이이—. 창틀과 유리 파편이 3층 아래로 후두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슈미엘은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휴시안이 망가진 창틀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바로 날 죽였어야지. 넌 지금 다신 없을 기회를 놓친 거야, 휴시안.

지난 10년간, 슈미엘의 행적을 뒤쫓으며 최대한 아델리아와는 마주치지 못하도록 손을 써 두었다.

‘마지막 행적이 로시안트 제국과 꽤 거리가 있어서 방심했어…….’

불안한 마음에 로시안트 제국으로 돌아와 슈미엘의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나타났다. 이제는 더 이상 숨어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이라도 하듯이.

휴시안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정말, 그 방법밖에 없나…….’

***

며칠이 지나고 쥴리아노 백작저에서 올리비아가 찾아왔다.

“미안해, 아델…….”

올리비아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말했다.

올리비아는 제 손으로 아델리아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사실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가문에 접근한 낯선 이방인에 대해 조금 더 신중하게 알아보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아델리아가 올리비아를 위로하며 말했다.

“내게 미안해하지 마, 올리비아. 네 의지로 그런 게 아니잖아.”

“그래도…….”

올리비아를 비롯하여 쥴리아노 백작가의 사람들은 슈미엘과 관련된 일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나마 슈미엘과 직접적으로 접촉이 있었던 올리비아만이 희미하게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빙의 같은 거야?”

올리비아가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델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세뇌에 가까워. 빙의 단계였다면 아마 다시 제정신을 차리는 게 힘들었을 거야.”

“그렇구나…….”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랑 어머니, 그리고 고용인들은 그 여자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해.”

“그럴 거야. 흑마법사들은 흔적 남기는 걸 극도로 꺼리거든.”

아마 올리비아가 흐릿하게나마 기억하는 이유는 슈미엘이 직접 올리비아의 신체를 이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은 어때? 괜찮아?”

“응……. 가끔 악몽을 꾸는 것 말고는 괜찮아.”

올리비아가 눈꼬리를 내리며 쓰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아델리아. 너도 무리해서 며칠 앓아누웠다며.”

“앓아누운 걸로 끝나서 다행이지, 뭐. ……어쨌든,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델리아가 걱정하지 말라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사실, 올리비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리 말했지만 슈미엘의 힘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강해도 너무 강했어.’

같은 오러를 가진 기사와의 대련이면 조금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힘과는 상반되는 마법, 마력. 거기에다 흑마법.

교활하고 변칙적이며 그 무엇보다 강력한 힘.

‘다시 만나면 이길 수 있을까.’

슈미엘은 자신의 힘을 모두 쓴 것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나는 한계까지 힘을 쏟아 냈었어.’

물론, 아델리아 역시 전성기 시절의 능력을 절반도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오러를 더 꺼내서라도 그 먹구름 같은 걸 소멸시켜야 했었나…….’

그러다 아델리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더는 안 돼.’

다시 과거처럼 심장과 몸이 망가지도록 둘 순 없어.

‘조금만 있으면 성년식이야.’

제대로 신체가 준비되면 아마 오러 큐브도 한 차례 더 성장을 이루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만 된다면, 예전처럼 오러를 사용할 수 있어.’

성년이 된 아델리아의 신체가 오러를 한결 편하게 받아들이고 운용할 테니까.

아델리아는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아델리아.”

“응?”

“이제 곧 데뷔탕트잖아. 파트너는 정해졌어?”

그러자 아델리아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빠는 그날 미리 입궁하실 것 같고, 난 아마 오빠랑 같이 갈 것 같아.”

아델리아의 대답에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데릭 경은 로즈힐 영애랑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아……. 맞다!”

아델리아가 잊고 있었다며 눈을 크게 떴다.

데릭과 카를리나는 약소하게나마 약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데릭이 본격적으로 전장을 나가기 시작하고 카를리나는 사업을 확장하게 되면서 결혼은 자연스럽게 미뤄졌다.

‘난 뭘 당연하다는 듯이 오빠랑 같이 가겠다고 한 거야?’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은 데릭과 카를리나가 연회장에 같이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은 항상 어긋났었다. 데릭이 전장에서 돌아오면 카를리나가 사업차 다른 제국에 가 있었고, 카를리나가 제국에 머물 때면 데릭이 출정을 나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번에 모처럼 두 사람 다 제국에 있으니까 함께 등장시켜야지!’

두 사람이 약혼식을 치른 뒤로 함께 사교계에 나타난 적이 없다시피 하다 보니,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엄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참에 소문도 잠재울 겸…….’

“그래서?”

“응?”

생각에 빠져 있던 아델리아에게 올리비아가 다시 물었다.

“아델의 파트너는 누구야?”

“…….”

아델리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

시간이 흘러 제국의 가장 큰 축제인 건국제가 시작되었다.

이번 건국제의 첫째 날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거기 귀걸이 좀 갖다 줘!”

“네!”

드레스! 구두! 머리띠!

“여기 향유가 다 떨어졌어!”

“지금 가요!”

에스테르 공작저는 새벽부터 분주했다.

올해 건국제에서 열리는 연회는 아델리아에겐 데뷔탕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라를 중심으로 수많은 하녀가 아델리아의 방을 드나들었다.

“아가씨 잠시만 팔 좀 들어 주시겠어요?”

“응.”

오늘 아델리아가 입을 드레스는 선물 받은 드레스였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에서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구하기 힘들다는 최고급 옷감을 구해, 유명한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쳤다.

그저 마네킹에 입혀 놓았을 때도 예술 작품 같았는데, 막상 아델리아에게 입혀 놓으니 신이 직접 빚은 조각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가씨의 잘록한 허리와 가늘고 길쭉한 팔이 돋보이는 드레스야!’

허리끈 리본은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주고, 가느다란 목을 타고 내려온 목걸이도 아가씨의 눈동자를 닮은 루비로 달자.

기다란 은빛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땋아 왼쪽 가슴 앞으로 내리니 기품 넘치는 우아한 예술 작품이 따로 없었다.

세라가 아델리아의 머리카락에 머리핀 몇 개를 갖다 대며 비교하다가 옆에 서 있던 하녀에게 말했다.

“이 머리핀 말고 은은한 보랏빛이 도는 장미꽃을 가져다줄래?”

“이거요?”

“응, 그래. 그거.”

보랏빛 장미꽃은 드레스를 선물한 사람이 함께 보내온 장신구 중 하나였다.

‘어쩜 이리 아가씨께 딱 어울리는 것들로 챙겨 보내신 걸까.’

세라는 선물을 보낸 사람의 탁월한 감각에 한 번 더 감탄했다.

땋아 내린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금화 크기만 한 보라색 장미꽃을 꽂아 넣어 고정했다.

그 장미꽃 옆으로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새끼손톱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꽂아 장식을 마무리했다.

이거지! 이거야!

세라는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화장대 위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립스틱을 집었다.

“아가씨, 입꼬리를 살짝만 올리셔서 미소 지어 보세요.”

“이렇게?”

“네, 잘하셨어요.”

세라가 싱긋 웃으며 아델리아의 도톰한 입술 위로 복숭아색 립스틱을 조심스레 펴 발랐다.

“어쩜, 우리 아가씨께서는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이토록 사랑스러우실까.”

이제는 아름답기까지 하시네? 세라가 능청스레 칭찬을 늘어놓자, 아델리아가 맞받아치며 눈웃음을 지었다.

“매년 듣는 소린데도 안 지겨워. 더 해 줘, 세라.”

“매일매일 해 드리죠.”

까르륵. 아델리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세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렇게 준비가 마무리되었을 때쯤.

아델리아의 침실로 하녀 하나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아, 아가씨! 오, 오셨, 오셨어요! 아가씨를 모시러 오셨다고요!”

그러자 방 안에 있던 하녀들은 물론, 아델리아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아델리아가 비장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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