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아델리아는 테오스와 데릭을 제외하고 누구를 파트너로 데려갈까,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다.
바라크? 아니야, 바라크가 등장하면 그곳에 있는 영애들이 죄다 얼어붙거나 눈물을 터트릴걸.
아, 그럼 펠슨 선생? 아……. 그 사람도 아니야. 요즘도 계속 밤을 새워 가며 약을 만드는 것 같던데, 그런 부담감을 줄 순 없지.
‘공작가의 매그너스 기사 중에 부탁해야 하나…….’
아렌트? 데프? 그런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던 찰나 황태자의 서신이 도착했다.
황궁의 인장이 찍힌 서신과 함께 드레스와 구두, 세기에도 벅찰 정도로 많은 장신구를 함께 보내왔다.
<아델리아 에스테르 영애, 정식으로 파트너 요청을 드립니다. 상황상 직접 찾아가 인사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합니다.>
정중하지만 간결하고, 미사여구 하나 없었지만 목적은 뚜렷한 서신이었다.
‘요, 청……?’
명령은 아닌데 어쩐지 명령 같은 내용이 황태자답다고 해야 하나.
얼떨떨하긴 했지만, 아델리아는 그 서신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파트너를 정하는 일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던 탓이다.
정식으로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 데뷔탕트는 귀족 영애에겐 일생일대의 중요한 행사였다.
-아델, 잘 들어. 데뷔탕트에 혼자서 입장하는 영애는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돼. 그것도 아주 부정적인 쪽으로!
올리비아는 세상이 무너져도 꼭 파트너를 구해야 한다고 했고.
-데릭을 빌려줄게요, 아델!
카를리나는 자신은 파트너 따위 필요 없으니 데릭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대체 이게 뭐라고.’
기사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던 부분이라 아델리아는 굉장히 귀찮은 관례라고 느꼈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지금, 귀족 영애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남은 일생을 기사로 살 것이 아니라면, 이번 데뷔탕트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검만 알고 있던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졌지…….’
연무장에서 기사들과 흙바닥의 먼지를 뒤집어쓰는 시간보다, 귀족 영애들과의 수다와 차향을 즐기는 시간이 월등히 많았다.
그리고 아델리아는 기사로 살아가던 시절만큼, 지금의 삶에도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데뷔탕트를 망칠 수는 없어.’
물론, 황태자와 함께 입장하게 되면 한동안은 귀족 영애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참석하는 티파티마다 질문 세례가 쏟아지겠지?’
아……. 그건 조금 귀찮은데.
‘그냥 단순한 파트너일 뿐이라고, 도무지 파트너가 구해지지 않아서 황태자 전하께서 도와주신 것뿐이라고 해도 안 믿겠지?’
귀족들은 다른 귀족들의 사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부풀리는 것을 즐기는 편이니까.
‘에이, 그래도.’
설마, 연회장에 한번 같이 등장한 일로 그렇게까지 엮이겠어?
‘나랑 황태자 전하가?’
푸하하. 말도 안 되지.
아델리아는 잠시 복잡해졌던 머릿속을 재빨리 갈무리하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저택을 빠져나오니 정문에서 대기 중인 마차가 보였다.
그리고 그 마차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잠행 중 한번 마주쳤었기에 그의 체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은 복장을 벗어 던지고 화려한 제복을 갖춰 입은 모습은 확실히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가을바람에 살랑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거리는 저 보라색 눈동자는 언제 보아도 신비로웠다.
반쯤 내리깐 그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해 있었다.
높고 날카로운 콧대, 단단하지만 날렵한 턱선,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
넓고 두툼한 어깨 아래로 오랜 시간 단련된 탄탄한 상체와 길쭉하게 뻗은 튼실한 하체까지.
이제는 그 어디에서도 소년의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아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좋은 신체다.’
아델리아가 탐이 난다는 듯한 시선으로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내들보다 더욱 많은 훈련을 했지만, 아델리아는 가질 수 없는 체형이었다.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한계가 뚜렷했던 탓이다.
그래서 과거에도 카르세스의 체형을 부러워했다. 자신이 지향하던 완벽한 신체라고 생각했다.
괜히 만져도 보고 싶고 눌러도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울컥울컥 치솟을 때가 있었다.
과거에 대련을 핑계로 몇 번이고 몸을 맞대고는 했었는데, 그때마다 돌덩이 같은 그 단단함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그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꿀꺽, 아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가까이 다가가니 카르세스는 손목의 커프스 링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기다란 손가락과 핏대가 불거진 손등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와……. 저렇게 보니까, 정말 그 ‘옛날’의 황태자 같네요.]
리그하르트도 감탄하고.
‘그러게……. 어쩜 저리 훌륭하게 자라셨는지…….’
아델리아도 조금 전의 생각도 잊어버리고는 그의 아름다운 자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델리아의 시선이 다시 카르세스의 얼굴로 향했다.
그때, 카르세스의 고개가 아델리아를 향해 돌아왔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
아델리아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카르세스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보라색 눈동자에 발목이라도 붙잡힌 것처럼 몸이 굳었다.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손목 언저리에서 움직이던 손끝도 이내 멈추었다.
조금은 의아한 침묵이었다.
분명 카르세스 성격상, 아델리아를 심드렁하게 쳐다보다 무뚝뚝하게 “가지.”라고 말해야 옳았다.
그게 아니라면 며칠 전 그 몰골을 보았으니 조롱 섞인 미소를 짓다가 잔뜩 꾸며진 아델리아의 모습을 놀린다거나.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이 멈춘 듯, 둘은 서로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델리아였다.
“오, 오셨습니까, 전하.”
“…….”
아델리아는 겨우 걸음을 떼어 내며 카르세스에게로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그때까지도 카르세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델리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까지 키가 크실 일인가.
‘안 보던 사이에 대체 뭘 드신 거야.’
아델리아는 그의 자줏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데리러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하.”
이렇게 인사하라고 했었지.
예법을 가르쳐 주던 귀부인의 말을 떠올리며 드레스를 슬쩍 들었다 놓았다.
“…….”
그러나 여전히 카르세스는 말이 없었다.
인사법이 틀렸나?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시는 거야?
[푸힛.]
킥킥, 크히힛. 기분 나쁜 리그하르트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때.
“타지.”
낮고 굵은 음성이 귓가를 짧게 스쳤다. 그리고 이내, 카르세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 위로 손을 올리던 아델리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가 알던 완전한 카르세스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모시던 주군, 기사의 충성을 바쳤던 황태자.
그래서 그런가, 감회가 새로웠다.
죽는 순간까지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황태자. 자신의 능력을 아껴 주고 끝없는 신뢰를 보여 주었던 그 카르세스와 겹쳐 보였다.
‘이게 뭐라고 떨리는 거야.’
하하하. 아델리아가 애써 미소 지으며 마차에 올랐다.
그 어색한 침묵은 마차에서도 계속되었다.
맞은편에 앉은 카르세스는 간단한 안부도 묻지 않은 채, 그저 아델리아를 쳐다보기만 했다.
숨이 막혔다. 참다못한 아델리아가 물었다.
“저, 혹시. 뭐가 이상합니까?”
그녀의 질문에 카르세스가 뒤늦게 대답했다.
“……뭐가.”
“아니, 뭔가 못마땅하신 듯 쳐다보셔서…….”
“…….”
분명 세라나 다른 하녀들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감탄할 정도였는데.
아델리아 스스로가 보아도 오늘은 역대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예뻤다.
그러나 카르세스는 그런 아델리아의 꾸며 놓은 자태를 보고서도 그 어떠한 말이 없었다.
어쩐지 10년 만의 재회-제대로 갖춰 입고 만난 재회-가 흐지부지된 것 같아서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다시 침묵이 계속되자, 아델리아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 날씨가 참 좋네요!”
고개를 돌렸음에도 카르세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왼쪽 뺨이 그 시선에 달궈지기라도 한 듯 홧홧해졌다.
‘대체 왜 저러시냐고!’
마차 창문 바깥의 풍경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몸은?”
대답 대신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리아가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쥴리아노 백작저에서 정신을 잃었던 일을 묻는 것 같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무엇보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애는 여전히 용맹하더군.”
내가 그렇게나 주의를 줬는데도 말이지.
“예?”
아델리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순진한 표정을 지으니, 카르세스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됐어. 10년 만에 만나 잔소리를 할 순 없으니 여기까지 하지.”
게다가 오늘은 데뷔탕트가 아닌가. 귀족 영애들에게는 그 어떤 날보다 중요한 날이라고 했다.
얼마 전 카르세스의 집무실을 찾아온 루드가 말했다.
-전하. 이번 연회에서 에스테르 영애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파트너?
그 순간. 10년 만에 귀국한 황태자가 사교계에 첫 데뷔를 앞둔 영애와 동시에 입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고민이 길게 이어졌다.
결론은 옳지 않다였다.
-에스테르 공작가와 정치적으로 엮으려는 세력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굳이 그들에게 우리 쪽에서 먼저 미끼를 던져 줄 필요는…….
-그렇다면 다른 영식에게 그 기회가 돌아가겠군요.
-뭐?
루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레 말을 이어 갔다.
-쥴리아노 백작가 앞에서 구해 오셨을 때도, 분명 행색이 엉망이긴 했지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훌륭하게 성장하셨다는 것을. 전하께서도 모르시진 않으실 텐데.
-…….
-다른 영식들도 눈이 있으니 에스테르 영애의 파트너 자리는 빠르게 채워지겠군요. 뭐,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싫으시다니.
-……가겠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하?
-가겠다고. ……서신을 보내.
-현명하십니다, 전하.
카르세스가 지금 아델리아와 마주 앉아 있는 이유가 그러했다.
‘그 농간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카르세스는 자신의 그러한 선택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지금의 결정이 에스테르 가문을 곤란하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델리아를 보고 있자니, 오히려 자신이 직접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카르세스가 잠시 아델리아를 바라보다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영애, 혹시 그 드레스. 내가 보낸 게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