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55)화 (155/161)

155화

“……예?”

아델리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뭐가 잘못됐나?

“전하께서 보내 주신 드레스가 맞습니다. 이상, ……해요?”

눈치를 살피며 되묻자, 카르세스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분명 저 정도로 심하진 않았는데.’

드레스를 고를 때만 해도 저렇게까지 노출이 심한 드레스는 아니었다.

마네킹이 잘못된 것인지, 드레스를 고른 뒤 수선한 디자이너의 실수인지.

동그랗게 드러난 어깨라든가, 곧게 뻗은 빗장뼈라든가.

저런 것들이 저런 식으로 드러나는 드레스인 줄 알았더라면 결코 선물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 불편하진 않나?”

그런 드레스를 자주 입었을 리 없으니 불편하다면 지금이라도 바꿔…….

“괜찮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아델리아의 대답이 시원시원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거참, ……다행이군.”

카르세스의 시선이 마차의 창문 밖 풍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아델리아는 그런 카르세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이날을 위해 그 험난한 세월을 보냈단 말이지.’

교양과 예법 수업에는 데뷔탕트를 대비하기 위한 수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레스를 입고 행동하는 방법이라든가, 때와 장소에 맞게 드레스를 고르는 방법 따위를 배웠다.

덕분에 많은 드레스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여태껏 입어 본 드레스 중 가장 헐벗은 느낌이긴 하지만.’

아델리아는 카르세스를 슬쩍 흘깃거리며 생각했다.

‘전하의 취향이 이런 드레스였구나.’

[엉큼한 놈! 음흉한 놈!]

‘어허.’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의 입단속을 시켰다.

물론, 드레스 자체는 너무 예뻤다.

하지만 그동안 입어 오던 드레스와는 스타일이 너무도 달랐던지라, 난감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의 선물이었다면 절대 입지 않았을 텐데…….

-이거 정말, 전하께서 보내신 거 맞아?

-네,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데뷔탕트니까 이 정도는 입어 주셔야죠! 황태자 전하께서 드레스 보는 눈도 탁월하신 것 같아요!

-아……. 그래?

세라와 다른 하녀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 내었다.

그걸 듣고 있다 보니 정말 그렇게 보였다.

‘어깨랑 가슴이 좀 휑한 것 말고는 예쁜 건 사실이니까.’

특별한 날이라는 명분이 더해지자, 아델리아는 평소보다 노출이 많은 드레스를 입고도 당당할 수 있었다.

‘또 언제 이런 걸 입어 보겠어.’

데뷔탕트니까 입어 보는 거지. 아델리아는 가슴께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보석 장식을 내려다보며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

연회장 앞에서 마차가 멈추자, 카르세스가 먼저 내렸다. 그리고는 마차 안, 아델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아.”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얼굴과 내밀어 준 손을 번갈아 바라보다 그의 손바닥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린 뒤 마차에서 내려왔다.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의 손을 자기 팔 위에 올려놓고 연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지, 영애.”

그러자 아델리아가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예, 전하.”

쓸데없이 비장한 표정의 아델리아와 평소처럼 담담한 카르세스가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 서 있던 시종이 말했다.

“초대장을 보여 주십시오.”

“여기.”

허억! 아델리아의 초대장과 카르세스의 얼굴을 확인한 시종이 거칠게 숨을 들이켜다 크게 외쳤다.

“에, 에스테르 영애와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연회장 안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거죠? 누구랑 누가 입장한다고요?”

“다 같이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면, 제대로 들으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 황태자 전하랑……. 에스테르 영애라니…….”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두 사람의 입장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아델리아와 카르세스가 입장을 시작하자, 그 웅성거림은 거짓말처럼 멎었다.

문이 열리며 흔들리는 공기를 따라, 황태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신비롭기까지 한 황족 특유의 보라색 눈동자로 느릿하게 연회장을 훑으며 길쭉하게 뻗은 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옮겼다.

“저분이, 황태자 전하시라고요?”

그 유약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분이 맞아요?!

모두가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1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적은 세월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듯, 눈앞의 황태자는 소문 속 존재감 없던 모습과는 완벽히 달랐다.

“세상에…….”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귀족들의 표정은 흡사, 전설 속 드래곤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황태자의 오만한 시선과 표정,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귀족들은 입을 다문 채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절대자의 기세였다.

다음 황위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카르세스는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화려한 황금 장식과 금실로 치장된 검은 제복을 빼입은 황태자는 걸음걸이부터 남달랐다.

당당하고 고압적인, 기품이 흐르면서도 강대한 위엄이 느껴졌다.

“옆에는 에스테르 가문의 그 영애 맞죠?”

검술 교습소를 차렸다던.

잠시 그들의 눈동자에 경멸이 스쳤으나, 카르세스 옆에서 전혀 위화감 없는 아델리아를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맹수 옆에는 역시나 맹수가 있는 법이라 했다.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이 친구가 될 수 없듯이, 맹수의 기운을 가진 황태자 옆에는 그의 기운에 주눅 들지 않는 아델리아가 서 있었다.

‘저 기운이, 이제 갓 성년이 된 영애라고……?’

대체 어딜 봐서?

역시 에스테르 공작가의 핏줄인가.

연회장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아주 살짝 들어 올린 턱과 시선, 우아하고 고귀한 걸음과 꼿꼿하게 등허리를 세운 자태는 황태자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 거칠고 위압적인 황태자 옆에 유일하게 설 수 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귀족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이 정해진 것 같군요.”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긴장되지 않나?”

“긴장하고 있는데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아델리아는 저를 힐끔거리는 귀족들을 살피며 대답했다.

“제가 원래 전장에서는 떨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져요.”

그러자 카르세스의 시선이 아델리아에게로 잠시 향했다가 돌아왔다.

“누가 들으면 셀 수 없이 많은 전장을 누빈 줄 알겠어.”

“아,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귀족 영애들에게는 데뷔탕트가 전장이랑 다를 게 없는걸요.”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걸?”

“네. 각오하고 있어요. 어디서 공격이 들어오든, 공격은 부드럽게 흘려보내고 그 즉시 반격한다.”

“……뭐?”

반격?

카르세스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자, 아델리아가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말이.”

“…….”

카르세스와 아델리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연회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때, 음료가 든 잔을 들고 다니던 시종이 두 사람 곁을 지나갔다. 카르세스가 시종이 들고 다니던 은쟁반 위 유리잔을 하나 집어 들고 아델리아에게 내밀었다.

“마셔 둬.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고맙습니다, 전하.”

아델리아는 유리잔 속 음료를 홀짝거리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가 불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반짝였다.

나뉘어 있는 벽면의 구간마다 비슷한 주제의 명화들이 걸려 있었고 명화 사이사이 자리 잡은 유리 램프 속 촛불이 연회장 분위기를 따라 흔들거렸다.

‘티파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려해.’

[제국의 가장 큰 축제인 건국제니까요!]

그 건국제의 시작을 알리고 많은 귀족 영애들의 데뷔탕트가 치러지는 곳이니 어련하겠냐고,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한동안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를 바라보던 귀족들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천장의 샹들리에보다 더욱 화려하게 치장한 귀족 영애들과 그런 영애들을 힐끔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영식들의 무리가 보였다.

‘좋을 때다.’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잊으셨나 본데요. 누님도 지금 한창 좋을 때거든요?]

쟤들이랑 누님이랑 같은 나이라고요!

리그하르트가 어째서인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 말에 아델리아가 비웃었다.

‘릭, 이제 갓 성년이 된 저 아이들과 내가 어떻게 같아?’

아델리아는 자신의 정신연령을 최소 스물일곱 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몸이 어려졌다 한들 가장 오래 살았던 기억이 스물일곱 살이었으니, 적어도 그 정도는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니 저 앳된 아이들이 뺨을 붉히고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모양새가 그저 귀엽고 풋풋하게만 보였다.

[누님도 이제 또래랑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셔야죠!]

그러자 아델리아가 다시 푸핫,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연애? 결혼? 됐다 그래. 저런 꼬맹이들이랑 무슨 연애야. 아마 날 돌려보낸 신이 염치없다며 욕할걸? 게다가 결혼하는 순간 평화로운 은퇴 생활은 물거품이 된다고.’

경험하진 못했지만, 결혼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다.

여자는 결혼 이후 경제 활동이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제국법으로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결혼 이후 가문의 안살림을 맡아야 한다거나 임신과 출산을 겪게 되며 자연스레 손을 놓게 되었다.

카를리나가 데릭과의 결혼을 미루는 이유 역시 그러했다.

이제 겨우 상승 궤도에 오른 사업을 도무지 놓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내가 바란 은퇴는 그런 게 아니야.’

회귀 이후, 아델리아가 이루고자 했던 1차 목표는 이루었다. 테오스와 데릭이 멀쩡히 살아있고 가문도 굳건했다.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위상이 높아졌다.

이제 올리비아의 일과 슈미엘이라는 흑마법사만 처리하면 꿈에도 그리던 은퇴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힘내자!’

[아자!]

리그하르트도 덩달아 기합을 넣으며 소리쳤다.

그때, 황제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다시금 가라앉고 순식간에 엄중해졌다.

황제의 옆에는 테오스가 함께였다.

‘아빠다!’

아델리아는 손이라도 흔들어 보이고 싶었으나,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그 순간, 테오스의 고개가 정확히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아델리아의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걸까.

아델리아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테오스가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러다 아델리아의 옆에 선 카르세스를 발견하고 급격히 입매를 굳혔다.

이윽고 황제의 축사가 이어졌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긴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 보였다.

[그게 다 우리 누님 덕분인데!]

공식적으로 그 어떠한 포상도 받지 못한 게 새삼 억울하다며 리그하르트가 날뛰었다.

‘에이, 포상이라니. 됐어, 릭. 덕분에 폐하께서 살아 계시고, 그 덕분에 우리 아빠랑 오빠도 살아 있으니까.’

게다가 황태자까지 번듯하게 장성했다.

어쩐지 흐뭇해졌다.

아직 처리해야 할 위험 요소들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회귀한 첫날 마주했던 위협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축사를 끝낸 황제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뒤를 따라나서던 테오스가 미련 가득한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흘깃거렸으나, 아델리아는 그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고요했던 연회장에 다시금 음악이 흘렀다.

그러자 귀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중앙을 차지한 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에스테르 영애.”

그때, 아델리아에게 카르세스가 손을 내밀었다.

“영애의 첫 춤을 함께할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