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물론이죠, 전하.”
아델리아가 싱긋 웃으며 카르세스의 손바닥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두 사람은 연회장 가운데로 향했다.
음악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감미로운 음률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가볍게 맞닿은 두 사람의 몸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무대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갔다.
박자에 몸을 맡긴 둘의 합이 예상보다 훌륭했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무대 위에서 가볍게 흔들렸고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우아한 곡선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카르세스가 보일 듯 말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
“발등을 밟힐까 봐 걱정했는데.”
잠시 멀어졌던 아델리아의 허리를 카르세스가 살짝 끌어당기자 다시 두 사람의 몸이 가볍게 맞닿았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카르세스의 다리를 스치며 바스락거렸다.
카르세스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연습을 게을리하진 않은 모양이야.”
제법인데?
그러자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작게 대답했다.
“제가 안 해서 못하는 거지, 한번 작정하고 배운 건 잘하는 편이에요.”
“아, 자수처럼?”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자, 아델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실수인 척하고 발등을 콱 밟아 버릴까.’
[찬성입니다.]
그때, 카르세스가 아델리아의 몸을 부드럽게 돌렸다. 단단한 그의 팔이 다시금 아델리아의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아델리아가 상체를 뒤로 살짝 넘겼다가 세우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돌아오시면 보여 드리려고 열심히 연습했어요. 약속했었잖아요. 기억하시죠?”
아델리아의 말에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약속?”
“다음에 다시 만나면 깜짝 놀라게 해 드리겠다고요.”
그러자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미 놀랄 만큼 놀랐는데.”
“네?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델리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대꾸하자, 카르세스는 그저 웃으며 아델리아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음악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춤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춤은 뒤로하고 어느덧 관객이 되었다.
따스한 음률과 어우러진 우아한 두 남녀는 한 폭의 그림처럼 설레고 아름다웠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그렇게 무르익어 갔다.
***
‘겨우 도망쳤네.’
카르세스와 첫 춤을 성공적으로 끝낸 아델리아에게 많은 영식이 접근했다.
-에스테르 공녀께 춤을 신청합니다.
-공녀님, 다음은 저와 함께.
-베리무트 백작가의 데시오르 베리무트입니다, 공녀님. 함께 춤을…….
-공녀님. 저는……!
공녀님, 공녀님!
정신없는 와중에 카르세스는 여유롭게 웃었다.
-다녀와. 그동안 갈고닦은 춤 실력을 보여 주고 오라고.
그 모습이 어쩐지 얄미웠다.
그렇게 많은 영식과 춤을 마친 아델리아는 도망치듯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의 문을 닫고 난간에 기대어 로시안트 제국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달아올랐던 몸의 열기가 한순간 흩어졌다.
‘티파티와 연회는 차원이 다른 거였어.’
조용조용히 대화를 주고받던 티파티와 달리, 쉴 새 없이 걸어오는 말에 일일이 대꾸해 줘야 했고 춤까지 춰야만 했다.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은 없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자리여서인지 생각보다 빨리 지쳤다.
그래서 마지막 춤을 끝낸 뒤, 부랴부랴 테라스로 숨어든 것이다.
‘앞으로 이런 연회에 계속 참석해야 한다는 거지?’
[누님께서 귀족 영애의 삶을 살아가시는 이상 계속요.]
‘기사였을 때도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렇죠. 그때는 춤 신청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죠.]
갑옷으로 무장하고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에게 누가 춤을 신청하겠냐며 리그하르트가 킬킬거렸다.
‘하긴 그래, 지금 돌이켜보면 괴짜 같긴 했겠어.’
아델리아가 작게 웃었다. 그때.
“아……!”
[누님?]
아델리아가 심장 부근으로 말아 쥔 주먹을 올리며 상체를 숙였다.
[누님! 왜 그러세요!]
놀란 리그하르트가 물었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난간을 움켜쥔 채 잠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이러지……?’
아델리아가 심호흡하며 상체를 다시 세웠다.
[역시 쥴리아노 백작가에서 너무 무리하셨던 거예요! 그 뒤로 계속 그러시잖아요!]
‘그런가.’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심장 위를 문질렀다.
[누님, 그러지 마시고 아버님께 말씀을 드리는 건 어떨까요? 아니면 펠슨 선생에게라도요!]
펠슨은 아델리아를 통해 오러를 연구하고 있었으니, 어떤 사소한 단서라도 알아낼지 모른다.
‘그래, 돌아가면 이야기해 보자. 어차피 펠슨 선생과는 할 이야기도 남아 있고.’
[약속하시는 거예요!]
‘알았어.’
아델리아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리그하르트의 목소리에 작게 웃었다.
그때였다.
삐걱—. 닫아 놓았던 테라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아델리아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테라스 안으로 들어오는 한 인영이 보였다.
“에스테르 영애.”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황태자 전하는 아닌데?
사내의 얼굴은 사선으로 떨어진 건물의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벗어난 그의 얼굴 위로 달빛이 비쳤다.
빙글빙글 꼬여 있는 주황색의 곱슬머리, 처진 눈꼬리에 꾸며 낸 듯한 미소를 머금은 얇은 입술.
‘어?’
[아는 사람이에요?]
‘응. 지금 말고, 과거에 알던 사람.’
아델리아가 눈을 크게 뜨자, 사내가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델트에먼 후작가의 비오데르 델트에먼입니다.”
비오데르 델트에먼. 아델리아는 저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망한 가문의 여자가 황실 기사단이라니. 정당하게 시험을 통과했을 리가 없지. 딱 봐도 예상되지 않아? 저 얼굴에, 저 몸매에. 내가 감독관이라도 넘어갔겠다.
이전 삶에서 황실 기사단에 몸담았던 시절.
아델리아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동기 중 하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편이었다.
-망할 계집! 내가 오늘, 네 실력이 거품이라는 걸 밝혀낼 거다!
아델리아와의 대련에서 매번 굴욕을 맛보던 비오데르는 어느 날, 대련이 아닌 결투를 걸어왔다.
-정정당당하게 검을 뽑아라! 오늘에야말로 네년을 철저히 굴복시켜 줄 테니!
대련과 달리 결투는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게다가 비오데르는 그 결투에 내기까지 걸었다.
-내가 이기면 넌 황실 기사단을 그만두는 거야. 네가 이기면,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물론, 아델리아가 황실 기사단을 그만두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매번 대련에서도 지던 놈이 왜 그리 자신만만한가 했더니, 당시 비오데르는 ‘초월석’을 가지고 있었다.
[아! 그때 초월석을 가지고 도전장을 내밀었다던 놈이 저놈이군요!]
‘맞아. 이번 생에는 없지만.’
그건 이제 내 거거든.
이제 초월석을 줄 악시덤도 없고, 악시덤이 살아 있다 하더라도 이미 초월석은 아델리아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뭐, 어차피 초월석을 가지고도 날 이기지 못한 놈이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본의 아니게 내가 델트에먼 후작가를 구한 셈이네.’
초월석이 악시덤의 손에 그대로 있었다면, 델트에먼 후작가는 악시덤과 손을 잡았을 테니까.
‘그랬다면 지금쯤 악시덤과 엮여서 쓸려 나갔을 거야.’
고마운 줄 알아, 인마.
아델리아가 비오데르를 쳐다보며 속으로 조소했다.
당연히 비오데르를 향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쉴 만하면 찾아와 조롱하고 희롱 섞인 말을 건넸던 탓이다.
당시에는 여유가 없어 일일이 대꾸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런 무심하고 냉랭한 반응이 비오데르의 자존심을 더욱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비오데르를 잠시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델트에먼 경이시군요. 무슨 일이시죠?”
그러자 비오데르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으으, 저 인간이 저렇게도 웃을 줄 아는구나.
아델리아의 미간에 희미하게 실금이 갔다.
비오데르가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처음 뵙는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미친…….”
“……예?”
비오데르가 잘 못 들었다며 되묻자,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말씀이 너무 갑작스럽네요.”
[푸하하하하!]
깔깔깔! 리그하르트가 배꼽이 빠져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비오데르의 말이 이어졌다.
“결혼을 전제로 정식 교제를 신청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 아델리아는 버릇처럼 검을 찾아 자신의 옆구리를 더듬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