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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57)화 (157/161)

157화

비오데르의 정중한 말에도 아델리아의 표정은 더욱 가라앉았다.

‘백작 부인이 그랬어. 쉬고 싶을 땐 테라스로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그러면 상대를 존중하는 신사들은 절대 허락 없이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테라스는 은밀한 남녀의 시간이 흐르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그러니 저는 테라스보다 가문의 휴게실로 가시는 걸 추천해요.

예법을 가르쳐 주던 밀레 백작 부인은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백작 부인의 말대로 차라리 휴게실로 가는 게 나았을까.’

휴게실은 연회장의 위층에 있었다.

사람들을 급히 피하느라 테라스로 들어왔는데,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날파리 하나가 따라올 줄이야.

비오데르의 말이 이어졌다.

“영애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이렇게 인연을 맺을 수 있길 기대하고 있었죠.”

비오데르가 아델리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검을 쓰는 레이디라니. 얼마나 매력적일까, 머릿속으로 항상 영애를 상상하곤 했습니다.”

거짓말.

여자가 검을 들었다는 이유로 아델리아를 깔보고 조롱하던 비오데르였다.

아델리아가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다시 비오데르가 다가왔다.

“영애. 저도 검을 쓰는 기사입니다. 영애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남편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논리라면 검을 쓰는 기사 모두가 최고의 남편감이 아닐까요?”

그러자 비오데르가 비열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영애. ……침대에서 영애를 만족시켜 줄 기사는 저뿐일 겁니다.”

검을 맞대는 것만큼, 몸을 맞대는 일도 중요한 일이라며 기어이 끝말을 덧붙였다.

비오데르의 말에 아델리아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지금, 저 인간이 뭐라는 거야?!’

아델리아가 어금니를 악다물자, 리그하르트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님! 뭘 참으세요! 장갑 던져요! 저 더러운 주둥이 위로 장갑을 던져 버리시라고요!]

저런 쓰레기는 따끔한 칼침 맛을 봐야 한다며 리그하르트가 방방 뛰었다.

‘그래, 이건 용인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섰어.’

아델리아가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끼고 있던 장갑 끝을 잡고 천천히 빼냈다.

“델트에먼 경. 방금 그 헛소리—.”

그때. 테라스의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장갑 빼는 것을 잠시 멈춘 아델리아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하, 이거 참.’

테라스 이거, 아무나 다 들어오는 공간이잖아?!

미간을 바짝 구긴 아델리아가 문으로 들어온 사람을 알아보고서 놀란 눈을 떴다.

카르세스였다.

“내 파트너가 어딜 갔나 했더니.”

느른하지만 공기를 짓누르는 목소리였다. 그 묵직한 목소리에 비오데르도 놀라 몸을 돌렸다.

카르세스를 알아본 비오데르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했다.

“황태자 전하……?”

딸깍—. 카르세스는 테라스에 들어온 뒤 문을 닫고 잠금쇠까지 걸어 잠갔다.

잠금쇠가 걸리는 작은 소리를 포착한 아델리아의 시선이 카르세스의 손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카르세스가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인 채로 비오데르의 위아래를 훑었다.

“날 알아보는 걸 보면 에스테르 영애가 내 파트너라는 것도 알고 있다는 이야긴데.”

“…….”

“델트에먼 경. 그쪽 파트너는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던데, 자신의 파트너나 제대로 챙기지 그래?”

그러자 비오데르가 말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멍청한 계집. 황태자 하나 붙들고 있지도 못하고.’

비오데르는 자신의 파트너인 영애를 부추겨 황태자에게 접근하도록 했다.

-잘만 하면 황태자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용기를 내세요, 영애.

비오데르의 말에 그의 파트너는 연거푸 와인을 석 잔이나 마신 뒤, 비틀거리며 카르세스에게로 다가갔다.

그 사이 자신은 아델리아와 잠깐 대화를 나눌 계획이었다.

‘그런데 벌써 돌아올 줄이야…….’

비오데르가 금세 못마땅해하던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여신의 가호 속에서 평온하시기를……. 델트에먼 후작가의 첫째, 비오데르 델트에먼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건넨 비오데르가 선선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전하. 저는 에스테르 영애께서 힘겨워하시는 듯하여 걱정되어 따라왔을 뿐입니다.”

능청스레 이야기하는 비오데르를 보며 카르세스가 성큼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비오데르도 작은 체구가 아니었는데, 그와 마주 선 카르세스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 기세에 놀란 비오데르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카르세스는 비오데르를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파트너인 내가 할 일이지.”

다시 한 걸음. 그에 맞춰 비오데르도 다시 뒷걸음질 쳤다.

‘헉!’

기세에 압도당해 뒷걸음질 치다 보니 어느새 난간이 허리에 닿았다. 자칫 난간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놀란 비오데르가 옆으로 몸을 슬금슬금 빼내며 아델리아를 흘깃거렸다.

일단, 후퇴다. 전할 말은 다 전했다.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에스테르 영애의 표정을 보아하니 거의 다 넘어온 게 분명했다.

비오데르가 더듬더듬 말했다.

“에, 에스테르 영애. 아까 제가 했던 제안, 잘 생각해 보시고……, 컥!”

말을 이어 가던 비오데르의 상체가 난데없이 카르세스에게로 끌려갔다.

카르세스가 비오데르의 멱살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저, 전하?”

비오데르가 당황하여 버둥거렸다. 그에 비해 카르세스는 담담했다. 카르세스가 비오데르의 멱살을 쥐고 위로 들어 올리며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제안?”

그러자 아델리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침대에서 저를 만족시켜 주겠다던데요.”

그녀의 말에 카르세스의 한쪽 눈썹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침대……?”

카르세스가 제 손아귀에 붙들려 버둥거리는 비오데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고작 네가?”

“켁, 저, 전하. 이, 이것부터 컥, 노, 놓으시고.”

탁탁, 숨이 막힌 비오데르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멱살을 거머쥔 카르세스의 손등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야.”

아야……? 아델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곧장 카르세스는 비오데르를 난간 쪽으로 밀어붙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델트에먼 후작가에서 황족을 시해하려 들다니.”

“예에?! 저, 전하!”

시, 시해라니요! 케엑.

놀란 비오데르가 몸을 물리려 했지만, 카르세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황족을 시해하려는 자는 제국법에 의해 즉결 처형이었지.”

카르세스가 멱살을 쥔 주먹에 힘을 더욱 실었다. 그러자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비오데르의 상체가 난간 밖으로 크게 휘청거리며 넘어갔다.

“전, 전하! 살려, 살려……!”

기어이 비오데르가 눈물을 흘리며 바지까지 적셨다.

“어머.”

아델리아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비오데르가 흐느끼며 말했다.

“제, 제가 잘못, 잘, 잘못했……. 흐윽.”

쯧, 카르세스가 더러운 오물을 본 것처럼 인상을 구기더니 비오데르의 멱살을 던지듯 놓았다.

허으, 허윽, 흐윽. 아슬아슬하게 난간 안으로 떨어진 비오데르가 난간 기둥을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르세스가 그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아델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사내가 취향인 줄 몰랐는데. 그새 취향이 바뀌었나?”

“네?”

“내가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가 해서.”

그러자 아델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쳤다.

“절대 아니에요! 난 저런 놈 싫다고요!”

저런 놈. 싫다고요.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고요한 테라스를 맴돌듯 울려 퍼졌다.

난간을 끌어안고 있던 비오데르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아델리아를 원망하듯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카르세스는 그제야 잔뜩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향해 걸어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연회는 충분히 즐긴 것 같은데. 다른 데로 옮길까.”

여긴 너무 어수선해.

그러자 아델리아는 자신의 손을 잡은 카르세스의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연회장은 그만 됐어요.”

그리고 바닥에서 흐느끼고 있는 비오데르를 힐끔거렸다.

연회장으로 돌아가면 저런 놈들이 또 있을지 모른다. 아무래도 귀족파가 휘청이는 지금, 사교계에 데뷔하게 된 에스테르의 공녀는 제법 가치 있는 상품일 테니까.

그런 벌레들이 꼬일 것을 생각하니,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사람 많은 곳은 됐어.’

적어도 오늘만큼은 충분했다.

비오데르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손을 꼭 붙잡고 그를 살짝 당겼다.

아델리아가 당기는 힘에 카르세스의 얼굴이 자연스레 끌려왔다. 그리고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작게 속삭였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요.”

“…….”

그러자 아무 생각 없이 아델리아를 향해 내려왔던 그의 상체가 덜컥, 움직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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