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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58)화 (158/161)

158화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연회장을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이 쏠린 터라 몰래 빠져나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루드와 아스틴이 적절히 시선을 돌려 준 덕분에 크게 어렵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연회장이 있는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은회색 돌길 위를 나란히 걸었다.

황궁의 웅장한 건물들 사이,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샛길은 일부러 누군가가 출입을 막은 것처럼 적막했다.

아니,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없었다.

확실히 사람들이 북적이는 연회장보다 이런 고요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때, 묵묵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걷고 있던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힐끔거렸다.

‘아까부터 말씀이 없으셔.’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뒤로 카르세스는 어째서인지 아델리아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괜히 불안해진 아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어. ……전하.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습니까?”

그러자 카르세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아델리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전하……?”

밤이었던 탓일까. 채도 낮은 보라색 눈동자는 오늘따라 더욱 어두워 보였다. 흡사 그의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반쯤 내려온 눈꺼풀 사이 가라앉은 시선은 어딘가 모르게 퇴폐적이기까지 했다.

그때, 카르세스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전장에서도 물러서는 법이 없던 그녀였기에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지만, 묘한 분위기를 몰고 온 카르세스의 체향에 몸의 근육들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둘 사이의 공간이 눈에 띄게 좁혀 들었다.

“마음에 드나?”

“네?”

아델리아가 멍한 표정으로 되묻자, 카르세스가 무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용한 곳을 원했잖아.”

“…….”

아델리아가 커다란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카르세스의 위압적인 기운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저는…….”

“그래,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

“…….”

카르세스가 냉랭한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응시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흔들리는 저 순진한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거 참. 어린애를 상대로 무슨 짓인지.’

카르세스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래, 영애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접근한 놈이 잘못이지.”

비오데르 이야기였다. 순간, 바지에 실수한 비오데르가 떠올라 아델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한테 교제 신청을 한 게 주제넘은 일은 아니죠, 전하.”

나름 제국에서 알아주는 후작가의 장남이었다.

물론, 썩 잘난 얼굴도 아니고 상체보다 하체가 더 길어 보여서 그런가, 멋진 제복을 입어도 맵시가 살지 않았으며 얇은 입술은 옹졸해 보이기도 하고 처진 눈은 우울해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 생에서 알게 된 거지만, 생각이 음흉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었으며 속도 좁고 검술 실력도 황실 기사단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었다. 굳이 더 추가하자면 머리카락 역시 머지않아 듬성듬성 두피가 보일 정도로 빠질 게 분명했다.

‘그래도 겉으로 드러난 가문의 명성을 보면, 나쁘지 않은 남편감인 건 확실하지.’

문제는 아델리아가 드러나지 않은 그의 더러운 모습까지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때, 카르세스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그를 따라 아델리아 역시 멈춰 섰다.

“전하?”

“…….”

정면만 응시하던 그가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교제, ……신청?”

희미하게 구겨진 그의 미간은 어쩐지 불쾌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델리아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아, 그 말씀을 안 드렸구나.”

아델리아는 비오데르가 침대를 운운하기 전에 결혼을 전제로 교제 신청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카르세스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사나워졌다.

그가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지?”

그의 질문에 음, 짧게 당시를 회상하던 아델리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딱히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대체 왜……!” 하고 언성을 조금 높였다가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검을 들고 휘두르는 일에는 망설임 하나 없더니…….”

카르세스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어깨를 들썩였다.

“대답할 시간도 없이 전하께서 들어오셨거든요.”

“…….”

아델리아가 씩, 눈매를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가만 보면 말이에요. 전하께서는 제가 활약할 타이밍에 꼭 등장하시는 것 같아요.”

카르세스가 조금만 늦었어도 아델리아가 새하얀 실크 장갑을 비오데르의 주둥이를 향해 집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곧장 주위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덤빌 작정이었다.

‘무기가 없으면 주먹이라도 휘두를 생각이었는데…….’

참으로 적절한 순간에 카르세스가 또 나타났다.

아델리아가 헤헤, 웃음을 흘리자 카르세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영애가 있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아.”

아델리아가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또 그렇게 되네요?”

아델리아가 감탄하자 그 모습에 단단하던 그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휘었다.

카르세스가 다시 걸음을 내딛자, 아델리아도 그를 따라 걸었다.

황태자의 분위기가 한결 유해졌다. 아델리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진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아델리아가 목적지에 대해 재차 물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로시안트 제국의 뿌리.”

제국의 뿌리? 으음, 어디서 들어 봤는데……. 아!

“신의 나무?”

그러자 카르세스가 그녀를 슬쩍 바라보다 대답했다.

“에스테르 가문은 황실에 대해 모르는 게 없나 보군.”

일순, 가늘어진 황태자의 눈빛에 의혹이 스쳤다.

‘아, 아는 척하면 안 되는 거였나?’

이전 생에서 카르세스가 별일 아니라는 듯 설명해 주던 게 떠올라, 아델리아도 그게 황실의 비밀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이전 생의 카르세스가 직접 신의 나무를 보여 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황족의 비밀이니까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었다.

‘남들이 알면 안 되는 거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해 주든가!’

전하의 속은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지.

아델리아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느덧 두 사람은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아델리아는 자신의 키보다 다섯 배는 높다란 문을 올려다보았다. 카르세스가 문으로 걸어가 손바닥을 올리며 말했다.

“수호신 크로노스의 나무가 있는 대정원이다.”

그리고 문과 닿은 카르세스의 손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쿠르르르르— 이내 그 커다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와…….”

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에 아델리아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대리석 벽과 기둥, 그리고 그 기둥 옆을 차지한 황금 조각상.

꽃이 핀 화분과 마석으로 작동하는 램프가 반짝거렸다.

문밖은 서늘한 늦가을의 바람이 불어오는데, 이 장소에서는 봄꽃 향기가 가득했다.

높은 천장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밤하늘의 별빛이 곧장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마, 낮에 왔다면 햇살이 내리쬐는 장관을 볼 수 있었으리라.

그러다 아델리아는 대정원의 한가운데, 화려한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무를 발견했다.

“저 나무가…….”

신의 나무는 과장 조금 보태어 어지간한 별궁 크기만 했다.

그러나 단단하고 거친 표면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고 어쩐지 메말라 보였다.

죽어 버린 나무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잠깐……. 저 나무가 원래 저랬나?’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신의 나무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온다고요? 오러 같은 거예요?

-비슷하다고 보면 돼. 신의 나무가 가진 힘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랬었지. 황금빛!

이전 삶에서 카르세스가 말했다. 신의 나무에서는 황금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고.

나무의 거대한 몸통과 나뭇가지, 그리고 수많은 잎사귀 모두가 황금색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델리아가 천장까지 치솟은 마른 나무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황금색 몸통은커녕, 잎사귀도 안 달려 있는걸?’

아델리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활동을 멈추긴 했지만, 그래도 죽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구나…….

황금색 나무와 잎사귀, 황금빛의 오러까지.

‘한 번쯤은 보고 싶었는데…….’

아델리아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자, 카르세스가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열한 살일 때까지는 황금색 잎사귀가 무성했었어.”

그러나 카르세스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신의 나무는 갑자기 시들어 버렸다.

풍성하던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버렸고 생명력이 넘치던 나무는 퍼석퍼석 말라 버렸다.

“이유를 찾지 못했다. 폐하께서는 오랜 시간 제국을 지탱해 오던 나무가 자신의 대에서 죽어 버리는 게 아니냐며 많이 속상해하셨지.”

“갑자기 왜 저렇게 된 걸까요?”

“글쎄. 황궁 마법사들도 찾지 못했으니, 나 역시 그 이유를 알아낼 방도는 없었어.”

카르세스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또 모르지. 누군가가 신의 나무가 가진 힘을 썼는지도.”

나무를 올려다보던 아델리아가 곁에 선 카르세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힘이요?”

“나무의 주인인 크로노스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었거든. 그래서 황족들은 수호신의 능력을 물려받은 저 나무가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힘?!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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