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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59)화 (159/161)

159화

카르세스가 이야기 도중 아델리아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신의 나무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를 빼내며 말했다.

“앉지.”

“네, 전하.”

아델리아는 의자에 앉아 다시 신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카르세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냥 추측일 뿐이야. 그 능력을 쓰려면 희생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저 나무가 저렇게 시들었던 해에는 그 어떠한 희생도 없었어. 그러니 더욱 이해가 되질 않는 거지.”

카르세스의 설명이 이어지는 중간중간, 아델리아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갔다.

‘전하가 열두 살일 때, 난 일곱 살이었어.’

자신이 시간을 돌아온 해였다. 그리고 그해에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졌다던 저 나무가 시들었다고?

설마……. 설마 내게 벌어진 일과 저 나무가 연관된 걸까?

‘만에 하나, 혹시라도 정말 연관되어 있다면. ……전하께서 말씀하신 저 희생은 뭐지?’

아델리아가 테이블 아래로 내린 주먹을 슬며시 움켜쥐며 조심스레 물었다.

“희생, ……이라면 어떤 희생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실의 비밀이긴 한데.”

카르세스가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나무를 돌아보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족의 피.”

“……네?”

아델리아의 눈이 서서히 커다래졌다. 카르세스가 확인해 주듯 말했다.

“그 희생이 황족의 피라고 했어, 영애.”

황족의 피?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을 이어 갔다.

“황족의 피를 바치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심장을 얻는다고 들었다.”

새로운 시간, 심장……. 그리고 황족의 희생.

“뭐, 모두 고서에 적힌 설화에 불과하겠지만.”

다시 나무로 향한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르세스와는 신의 나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뒤 빠져나왔다.

“오늘 이곳에 온 건 비밀이야, 영애.”

“물론이죠. 저 생각보다 입 무겁습니다, 전하. 걱정하지 마세요.”

아델리아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

황태자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아델리아는 잠자리에 들기 전 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신의 나무, 새로운 시간과 심장, 희생, 그리고. ……황족의 피.

얼마 되지도 않은 그 문장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님…….]

리그하르트가 걱정된다는 어투로 중얼거리자, 아델리아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릭. 오히려 회귀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으니 이제부터라도 알아보면 돼!’

신의 나무에 관한 정보는 바라크에게 부탁해야겠어.

황실이 보관 중인 고서에 접근할 수도 없으니, 당장 아델리아가 의문을 품는다고 해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일수록 길드를 통해 알아내야지.’

그러려고 키운 길드 아니겠어?

‘그리고, 황족의 피랬어.’

말은 황족의 피라고 했지만, 실상 황족의 희생. 즉, 황족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 나무가 황족의 목숨을 거두고 시간을 되돌렸다면, 그 목숨의 주인은 카르세스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왜?’

악시덤을 끌어내리는 일에 인생을 걸었던 카르세스였다.

‘그런 전하께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시간도 아니고, 굳이 내 시간을 되돌린 이유는 뭘까?’

자신이 죽고 난 뒤 카르세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 줄 사람도, 정답을 알고 있는 이도 없었기에 더욱 답답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어…….

아델리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일단 사냥제를 무사히 넘기고 생각하자.’

연회의 두 번째 날은 사냥제가 열린다. 당장 내일로 다가온 이번 사냥제엔 카르세스도 참가한다고 했다.

-전하께서도 사냥제에 나가신다고요?

-10년이나 자리를 비웠던 황태자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 줄 좋은 자리니까.

카르세스는 사냥제에 참석하는 귀족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하긴 전하께서 오러를 드러내는 순간, 뒤에서 투덜거리던 귀족들도 입을 닫게 될 거야.’

10년이나 황태자가 제국을 떠나 있다 보니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황제는 카르세스가 제국을 떠난 뒤, 황태자가 후계자 수업을 위해 유학을 떠났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제국민들은 평소 유약했던 황태자가 결국은 사망한 게 아니냐며 수군대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사실처럼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연회장에 등장한 전하를 보며 귀족들이 놀란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황태자가 예상을 벗어나 건장한 모습으로 등장했으니.

‘건장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함이 있지.’

건장하기만 했던가? 잘생기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셨지.

[허?]

특히 귀족파 귀족들의 표정이 썩어 가는 게 어찌나 통쾌하고 재밌던지.

‘아, 오러에 대해 여쭤보는 걸 깜빡했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 신의 나무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다른 대화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건 뭐, 사냥제 시작하면 여쭤봐도 되니까.

[좋아요, 누님! 기분 전환도 할 겸 이번 사냥제에 참가하셔서 우승도 하셔야죠!]

첫 여성 참가자! 그리고 우승!

‘이왕 참석하는 거, 그래 볼 생각이야.’

아델리아도 카르세스를 따라 사냥제에 참석하기로 했다.

-사냥제 재밌겠다.

아델리아가 부럽다는 듯 중얼거리자, 카르세스가 뭐가 문제냐며 말했다.

-참가하든가.

-이때까지 여성 참가자는 없었거든요?

카르세스는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미소 지었다.

-그 선례를 영애가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원래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거야. 그리고 영애는, ……그 처음을 우습게 깨부술 만큼 능력이 있기도 하고.

-…….

안 그래? 하며 웃던 카르세스의 표정이 선명했다.

‘사냥제라.’

아무래도 검보다는 활이 좋겠지?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 제가 누님 손에 딱 맞는 맞춤형 활도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활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 마시라고, 리그하르트가 단단히 말했다.

아델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겠다고도 하겠네.’

[오……?]

‘오?’

너, 설마……. 정말……?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까르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요! 설마, 진짜로 기대하신 건 아니죠? 쇳덩이가 어떻게 사람이 돼요? 제가 뭐 신도 아니고. 푸하하!]

‘…….’

[누님 표정 정말 웃긴 거 아세요? 진짜로 기대하셨나 봐!]

깔깔깔!

리그하르트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델리아가 전에 없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말발굽이 된 뒤에도 그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

그러자 아델리아를 한참 비웃던 리그하르트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런 리그하르트의 반응에 아델리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네 덕분에 웃는다, 웃어.’

리그하르트가 일부러 더 밝게 행동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 돌아온 뒤로 눈에 띄게 가라앉았던 아델리아의 기분을 알아차렸던 까닭이다.

그래서 고마웠다. 함께 시간을 돌아와, 항상 곁에서 힘이 되어 준 존재이니까.

그때, 가슴께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어……!”

아델리아가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찌르르한 감각이 또다시 가슴을 관통했다.

“아으…….”

[누, 누님?]

가슴 위로 손을 올려 옷을 움켜쥔 아델리아는 몸을 둥글게 말고서 고통을 참았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갑작스레 찾아왔던 통증은 또 갑작스레 사라졌다.

후우, 짧게 심호흡한 아델리아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냈다.

‘통증이 머무는 시간이 조금 길어진 것 같아.’

통증의 강도도 강해진 것 같고.

[누님…….]

‘걱정하지 마. 날이 밝으면 바로 펠슨 선생을 찾아갈 테니까.’

[약속하신 거예요.]

‘응.’

아델리아가 힘겹게 미소 지었다.

***

다음 날 아침.

펠슨의 작업실이 있는 별관으로 넘어온 아델리아는 지나가던 하녀를 붙잡고 물었다.

“펠슨 선생은?”

그러자 하녀가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대답했다.

“조금 전 공작 각하의 집무실로 가셨어요.”

하녀의 말에 아델리아가 눈썹을 슬며시 올렸다.

“……그래?”

아델리아가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그때 하녀가 물었다.

“제가 모셔 올까요?”

“아니.”

아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갈게. 어차피 나도 아빠한테 볼일이 있었거든. 알려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아가씨.”

아델리아는 곧장 테오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본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기척을 숨겼다. 지나가는 고용인들조차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오러 큐브를 단련한 덕분에 오러나 자신의 기운을 숨기는 일은 꽤 쉬웠다.

테오스나 데릭을 상대로 숨긴 적은 없지만, 작정하고 숨기자면 들킬 것 같지도 않았다.

에스테르 공작저의 본관 2층.

테오스의 집무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좀 어떻습니까?”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테오스가 담담하게 물약 병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이 약도 내성이 생기신 모양입니다. 지금 다른 약을 개발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라. 분명한 건 처음보다 잘 보인다는 거니까. 선생의 약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테오스가 펠슨을 위로하며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진심이다. 오러로 망가진 시야를 물약으로 치료하다니. 다시 한번 자네의 실력에 놀라고 있을 뿐이다.”

“예, 각하…….”

침울해진 펠슨을 보며 테오스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선생에게 큰 짐을 맡겼군.”

“아닙니다, 각하. 오히려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각하를 치료하며 배운 점도 많았으니까요.”

그의 대답에 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 우리에게 시간은 많다.”

“하지만……. 무려 10년입니다, 각하. 10년간 각하의 시력을 완벽하게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아가씨를 속여 왔다는 사실도. ……저를 고뇌하게 만드는 일이지요.”

그때였다.

드르륵—. 집무실의 문이 예고도 없이 거칠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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