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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60)화 (160/161)

160화

집무실 안 두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델리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니, 말문이 막힌 표정에 가까웠다.

“아델리아.”

테오스가 먼저 입을 열어 아델리아를 불렀다. 잠깐 아델리아의 시선이 테오스에게 닿았지만, 이내 펠슨에게로 옮겨 갔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

펠슨이 대답하지 못하고 굳어 있자, 테오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델리아.”

“아빠, 잠시만요.”

아델리아가 테오스의 말을 막은 뒤 펠슨을 응시하며 말했다.

“펠슨 선생.”

“예, 아가씨.”

펠슨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델리아는 펠슨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어 갔다.

“난 선생을 신뢰해요.”

아델리아의 말에 펠슨의 눈동자가 설핏 흔들렸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에스테르 가문을 위해 노력해 온 선생의 진심을 믿어요.”

홀연히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에 차지 않았을 계약에 불만을 표현할 수 있었음에도.

펠슨은 묵묵히 에스테르 공작가에 남아 의사로서, 아델리아의 조력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람이 되겠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에스테르 가문의 가주인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델리아가 단단한 눈빛으로 펠슨을 바라보며 물었다.

“의사가 아닌, 나의 벗 펠슨에게 묻습니다. 제 아버지, 테오스 공작 각하와 관련되어 제게 숨기는 것이 정말 없습니까?”

“…….”

아델리아가 질문을 마치자, 집무실의 공기가 한없이 무거워졌다.

“아가씨…….”

펠슨은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테오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테오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스 역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펠슨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아가씨. ……아가씨의 벗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델리아가 펠슨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

펠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아가씨께서 예상하셨던 것처럼 앞이 잘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날카로운 숨을 들이켜며 바로 옆 소파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혹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그래서 펠슨에게 진료를 부탁했고 펠슨은 이상이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테오스를 진료한 이후, 펠슨의 행동이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의 성정을 알기에 그래도 믿었다.

‘그런데, 진짜 눈이 잘 보이시지 않았던 거라고……?’

막상 진실을 듣고 나니 가슴이 옥죄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델리아의 일렁이는 눈동자가 이번에는 테오스를 향했다.

아델리아와 눈이 마주친 테오스는 예상보다 초연한 얼굴이었다.

***

소파에 앉은 테오스와 아델리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델리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펠슨 역시 숨 막히는 적막에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델리아가 초점을 잃은 눈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그런 시력으로 로샤크 전쟁에 나가셨던 거군요?”

“아델리아. 전장에서 시력은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빠…….”

아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아델리아는 고개를 들어 테오스를 바라보며 한탄했다.

“저도 알아요, 아빠가 대단한 분이라는 걸. 하지만 아빠가 그러셨어요.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그래서 만에 하나라는 것을 대비해야 한다고.”

전장에서 완벽한 대비란 없다.

“자신의 실력에 자만하지 말고, 언제, 어떻게 생길지 모르는 변수에 대비해야 한다고도 하셨죠.”

아델리아의 말에 테오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델리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제가 걱정할까 봐 숨기셨던 거라면, 아빠는 더더욱 그런 결정을 해서는 안 되셨어요.”

아델리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셨겠죠. ……그래서, 지금 제가 괜찮은 것처럼 보이세요?”

아델리아는 어금니를 악다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델리아…….”

테오스가 힘겹게 아델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틀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저 아이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출정하기 전에 아델리아의 저런 표정과 마주했다면,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같은 결정을 하겠지만…….

테오스가 나직이 말했다.

“아델리아…….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다시 고개를 들어 테오스를 바라보았다.

“다 내가 잘못했어. 네 말이 맞다. 시력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숨기지 말아야 했고, 적어도 다녀온 뒤에는 네게 털어놨어야 했다.”

테오스가 한숨을 내쉬며 잠시 말을 멈추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될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빠…….”

테오스가 눈썹 끝을 내리며 부탁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를 풀어다오. 다시는 네게 숨기지 않겠다. 그러니 이번만 용서해 주지 않겠니?”

아델리아는 테오스의 진심 어린 표정과 눈빛을 바라보며 울컥 치솟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약속, 하신 거예요. 이제 정말 뭐든 숨기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말씀이요.”

그러자 테오스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약속하마.”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시력이 왜 그렇게 된 건지 말씀해 주세요.”

“…….”

아델리아의 질문에 테오스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돌아왔다.

어차피 이대로 넘어갈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털어놓자니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또 얼마나 상처를 받게 될지.’

그러나 오늘 이 자리를 피하게 된다면, 머지않아 또 이런 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차라리 한 번에 끝내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한 테오스가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의 오러가 폭주했고 테오스는 그 오러를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오러를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시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도.

테오스의 어투는 담담했다.

그러나 테오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델리아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뭐야, 그럼.

‘아빠의 시력이 저렇게 된 건, ……나 때문이라는 말이잖아?’

아빠가 날 살리려고…….

하……. 아델리아의 입가가 떨렸다.

‘혹시, 지난 생에서 아빠가 허무하게 돌아가셨던 것도 시력 때문은 아닐까?’

[누님…….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몰라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전장에서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 변수가 시력이었던 거야.’

그런 결론을 내리고 나니, 아델리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이번에는 여러 보호 장비들이 아빠를 지켰다지만, 지난 생에서는 그런 보호 장비들도 없었잖아.’

그러고 보니 테오스가 그랬다. 전장에서 자폭환과 흑마법을 사용한 아이가 밝은 회색 머리칼을 지녔었다고.

테오스는 그 아이를 보고 잠시 아델리아를 떠올렸다고 했다.

물론, 그것이 테오스를 위험에 빠지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 생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작용했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분명한 건, 아빠의 시력만 정상이었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쉽게 당하진 않으셨으리라는 거야…….’

즉, 시력 때문에 테오스가 죽음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내가, ……아빠한테 화를 낼 입장이 아니었어.’

아델리아는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초점 없는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투두두둑. 아델리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아델리아……!”

“아…….”

아델리아 자신도 놀랐던 것인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탄식했다.

테오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답지 않게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는 서둘러 아델리아에게로 걸어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델리아…….”

아델리아가 테오스를 쳐다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저 때문이었네요.”

엄마가 돌아가신 것도, 아빠의 시력이 그렇게 된 것도.

“모두 제가 태어났기 때문에…….”

아델리아는 자신의 말이 테오스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자 테오스가 아델리아를 다정하게 안아 주며 등을 토닥거렸다.

“아니, 그렇지 않아.”

“아빠……. 저 때문에…….”

“아니다, 아델리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그것은 오롯이 내 선택이었다.”

테오스는 아델리아를 달래며 말을 이어 갔다.

“내 선택으로 인해, 네가 자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다. 그 덕분에 네가 무사할 수 있었고 우리 가족이 한자리에 있을 수 있었어.”

테오스가 아델리아를 품에서 떨어트리며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니까, 차라리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싶구나.”

“하지만, 하지만……. 아빠의 시력이…….”

그러자 펠슨이 나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제가, 제가 무조건 고칠 겁니다. 제 인생을 걸어서라도 각하의 시력은 제가 고쳐 내겠습니다!”

펠슨이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저를 믿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믿어 주십시오! 각하의 시력을 꼭 돌려놓겠습니다!”

펠슨 선생…….

“흐윽…….”

그제야 긴장이 풀렸던 것인지, 아델리아가 다시 눈물을 터트리며 테오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빠…….”

“그래, 아델리아.”

아빠……. 아빠. 아델리아가 그의 품에서 몇 번이고 아빠를 중얼거렸다. 그러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를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제 탓이 아니라고 말해 주셔서.

그래서, 정말 고맙다고.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마음을 전했다.

테오스가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아델리아. 그거면 충분하다.”

그래, 충분하고말고.

***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로시안트 제국의 황실 사냥터에서는 사냥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던 아델리아는 사냥제를 빠질까 하다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몸을 쓰는 일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누님! 신나게 말을 타고 달리시다 보면 머리가 한결 개운해지실 거예요!]

‘응, 잘 부탁해, 릭.’

[저만 믿으세요! 엄한 곳에 화살을 쏘시더라도 제가 알아서 척척 명중시켜 드릴 테니까!]

리그하르트가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 카르세스가 말을 끌고 다가왔다.

“늦었군.”

“아, 전하! 오셨습니까!”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 아델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카르세스의 미간이 빠르게 좁혀 들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델리아의 눈가를 엄지로 문지르며 물었다.

“……울었나?”

“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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