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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61)화 (161/161)

161화

아델리아가 놀라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가를 더듬거렸다.

‘아, 놀라라…….’

어쩐지 그의 손끝이 쓸고 간 자리가 화끈거렸다.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중얼댔다.

‘그렇게 티가 나나?’

찬물로 세수를 몇 번이나 하고, 세라가 화장으로 피부 위를 몇 번이고 덮어씌웠는데도 카르세스의 눈을 속일 순 없었던 모양이다.

크흠. 아델리아가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울다뇨.”

하하, 제가 그럴 사람인가요, 어디?

아델리아가 억지웃음을 짓자, 카르세스는 따라온 시종에게 말고삐를 넘기고 아델리아의 곁에 섰다.

“아니긴. 따라와.”

카르세스가 아델리아에게 턱짓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델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데리고 간 곳은 자신의 임시 막사였다.

“우와. 역시 황태자 전하의 임시 막사라서 그런가 어지간한 저택보다 큰데요?”

“유난스럽긴. 여기 앉아.”

카르세스는 아델리아를 의자에 앉혀 놓고 물주머니에 얼음을 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대고 있어.”

“……그렇게 티가 많이 나요?”

아델리아가 얼음주머니를 건네받고서 눈가에 대며 물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의자를 하나 더 끌고 와 아델리아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조금만 자세히 보면 알아차릴 만큼.”

“……그 말씀.”

아델리아가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절 계속, 자세히, 눈여겨보셨다는 고백으로 들리네요?”

키득키득, 아델리아는 응당 돌아올 카르세스의 핀잔을 기대하며 장난을 걸었다.

그러나.

“…….”

“…….”

돌아온 것은 예상 밖의 침묵이었다.

어……. 음…….

아델리아가 어색한 분위기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쩔그럭쩔그럭. 눈가에서 빙글빙글 돌리는 얼음주머니의 소리만이 막사를 채웠다.

아델리아를 응시하던 카르세스가 가슴팍 앞으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사실.”

사실……?

아델리아의 긴장된 시선이 카르세스의 입술로 향했다. 아델리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 사실……. 뭐?’

쩔그럭. 아델리아가 얼음주머니를 한 바퀴 더 돌렸을 때였다.

카르세스가 무감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는 영애가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러자 아델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제에에?’

아니, 그건 벌써 10년 전에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

‘이제야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고?’

와……. 징하다, 정말.

아델리아의 표정을 보며 카르세스가 옅게 웃었다.

“어쨌든, 내 사람이 눈이 퉁퉁 부어 나타났는데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는 거지. 루드나 아스틴이었어도 마찬가지다.”

뭐, 그 두 사람은 울어서 눈이 부어 올 일은 없지만.

“하하, 고맙습니다……. 드디어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셨네요…….”

너무 고마워서 또 눈물이 날 것 같네요.

아델리아가 투덜거리자, 카르세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그래서. 대체 왜 운 건데?”

“…….”

아델리아가 얼음주머니를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제가 아버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음, 카르세스가 작게 침음하며 아델리아의 말에 조용히 집중했다.

“절 위한 아버지의 희생이 고마우면서도,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아델리아가 시무룩해지자, 카르세스는 기다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자책하지 마. 그건 오히려 공작의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야.”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람 마음이 뭐, 마음먹은 대로 되나요? 아델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카르세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속사정이야 내가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봐. 아마도 영애 역시 같은 상황이라면 공작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

카르세스의 말에 아델리아가 잠시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세스가 작게 웃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지.”

카르세스는 자신이 악시덤에게 고통받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저 공기처럼, 그림자처럼, 달아날 생각도 하지 말고 죽은 듯이 살아라. 그게 너와 네 아비의 목숨을 부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악시덤은 카르세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황제의 안위를 들먹였다.

카르세스는 단순히 그가 주는 고통이 두려워 입을 다물었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황제를 지킬 힘이 없었기에, 아버지인 황제 역시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기에.

정말 악시덤이 귀족파를 부추겨 당장이라도 반란을 일으킬까 봐, 그것이 두려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금방 마음을 정리한 것 같아서 다행이군.”

그러자 아델리아가 씩 웃었다.

“제 장점 중 하나가 그거죠. 좋지 않은 감정은 오래 끌고 가지 않는다.”

“가만 보면 장점이 참 많은 영애야.”

“제 진가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헤헤, 아델리아가 얼음주머니로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웃었다.

‘나 참.’

카르세스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아델리아를 따라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사냥제의 시작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들려오자,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막사를 빠져나왔다.

“무조건 많이, 큰놈으로 잡아 오면 되는 거죠?”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지.”

“그건 기본이죠.”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때, 루드가 다가왔다.

아델리아와 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카르세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아델리아의 눈치를 살피는 듯 보였다.

‘내 이야기인가?’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된 영애 네 명이 사냥제에 참석했다는데요? 지금 인사를 하러 가야 한다고 그러네요.]

리그하르트가 귓속말 내용을 죄다 떠들어 댔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엄하게 꾸짖듯 말했다.

‘너 이 녀석, 내가 그런 거 함부로 엿듣지 말랬지!’

[에이, 궁금해하셨으면서.]

크흠, 아델리아가 헛기침했다.

‘……그나저나, 황태자비 후보라.”

카르세스가 황태자비를 들여야 했을 나이인 건 맞는데, 사냥제에 황태자비 후보들이 왔다고?

[보통 사냥제에서 엄청난 사냥물을 영애들에게 선물하기도 하잖아요? 아마 그걸 노리고 온 게 아닐까요!]

사냥제는 상품을 걸고 벌이는 일종의 대회였다.

가장 많은 맹수를 사냥한 사람이 상품을 차지하게 되고, 사냥한 맹수를 가장 많이 선물 받은 귀족 영애는 그와 비슷한 명예를 가지기도 했다.

아델리아가 귀족 영애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햇살을 가려 줄 커다란 천막 아래, 그들만의 작은 티타임이 열리고 있었다.

영애 중 사냥을 위해 복장을 갖춰 입고 온 사람은 아델리아, 혼자였다.

그때, 천막 아래에 있는 올리비아와 카를리나를 발견했다.

올리비아가 아델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델리아도 화답하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카를리나도 왔네. 바빠서 참석 못 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니.’

그리고 이내,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세 명의 영애들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들인 것 같아요.]

‘응, 그렇지 않아도 시선이 전하만 바라보고 있어.’

그런데 한 명이 안 보이는데? 네 명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사이, 카르세스가 영애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루드에게 말했다.

“이런 일을 미리 처리하라고 널 곁에 두는 거다, 루드.”

“송구합니다. 저도 뒤늦게 연락받은지라.”

쯧, 카르세스의 미간이 평소보다 많이 구겨져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공적인 자리에서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분이신데.’

[그런데 죄다 미인들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비 자리가 예쁘기만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는 아니거든?!’

아델리아가 퉁명스레 대답하자, 리그하르트가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아이고, 네네. 아무렴요, 그렇고 말고요.]

큼, 아델리아가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분명 카르세스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반강제적인 이런 자리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영애는 먼저 가도 좋다.”

“네, 전하.”

아델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카르세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영애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먼저 가도 좋다고는 했지만,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의 조금 뒤에 선 채로 그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카르세스가 뒤를 슬쩍 돌아보며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왜 안 가?’

그가 소리 없이 입을 뻥긋거렸지만, 아델리아는 못 들은 척 그냥 어깨만 들썩였다.

그때, 다가온 세 명의 영애 중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드레안 백작가의 차녀, 델리나 미드레안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여신의 가호 속에서 평온하시기를.”

풍만한 육체미가 돋보이는 드레스를 빼입고 자신감 넘치는 우아한 인사가 이어졌다.

그 뒤로 다른 영애들의 인사도 이어졌지만, 카르세스는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 딱히 대꾸하진 않았다.

예상치 못한 냉대에 영애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영애들의 시선이 황태자를 비켜나 그의 뒤에 선 아델리아를 힐끗거렸다.

그때였다.

“제가 조금 늦었군요.”

[새로운 여자가 등장했습니다, 누님!]

‘이게 사냥제야, 맞선 자리야?’

아델리아가 속으로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세 명의 영애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영애의 복식은 로시안트 제국의 것과는 다소 달랐다. 그래서 시선이 더욱 쏠렸다.

화려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 새하얀 도자기 같은 피부는 햇살을 받아 더욱 아름다웠다.

먼저 도착한 세 명의 존재감을 단박에 지워 버릴 정도로.

곁에 서 있던 시녀가 입을 열었다.

“예르나 왕국의 왕녀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한 나라의 왕녀가 사냥제를 구경하러 왔다고?!

모두가 그 왕녀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을 때, 왕녀를 바라보던 아델리아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어? 누님……. 저 여자…….]

리그하르트가 왕녀를 가리키며 의아하다는 듯이 말하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다른 나라의 왕녀라고 했다. 결코 접점이 있을 수 없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이 흑마법의 기운은 낯설지가 않았다.

‘……슈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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