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0)화 (1/141)

<프롤로그>

프라이움의 랩소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로판 소설이었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에 정령물 설정을 뒤섞은 그 소설의 여주인공, 샤스티아는 남편에게서 학대당하며 살아가다 갑작스레 과부가 된 여자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에 어린 딸까지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상처 입고 숲속에 쓰러져 있는 기사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와 보살핀다.

그 기사가 바로 소설의 남주인공,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었다.

로베릭은 생명의 은인인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여인을 마치 필연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베릭은 황실 제1기사였으며, 온 세상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위대한 정령사였고.

또한 황태자의 최측근이었다.

비록 형식적이라지만 약혼녀도 있었으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두 사람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여느 소설이 그러하듯 사랑의 방해물은 그들을 막지 못했다.

로베릭과 샤스티아는 갖은 역경 끝에 결국 신분을 극복한 사랑을 이뤄냈다.

로베릭의 원래 약혼녀는 죄 없는 여인이자, 이제는 헤일리안의 대공비가 된 샤스티아를 질투하고 악행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가문의 작위마저 몰수당한 뒤 변방의 시골로 쫓겨난다.

샤스티아는 일개 평민 과부에서 헤일리안 대공비가 되었고, 그녀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헤일리안 대공녀가 되었다.

그렇게 로베릭은 아내와 의붓딸과 함께 하하호호 행복하게 살아갔다는 이야기…….

“그런데 왜 다 끝난 뒤에 환생한 거냐고.”

나는 길가에 핀 들꽃을 꺾으며 중얼거렸다.

그랬다.

내가 태어나서 전생의 기억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제국 신문에 ‘헤일리안 대공 일가의 화목한 한때’라는 기사가 떡하니 실려 있던 시점이었다.

뭐, 설사 일찍 태어났더라도 시골 평민 출신에 불과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원작에 끼어들었겠냐만은.

이번 생의 어머니는 나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외할아버지의 손에 자랐다.

별다를 것 없는 소박한 전원생활이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이 생활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느 할아버지들처럼 부자도 귀족도 황족도 아니셨지만.

그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해 주셨으니까.

‘이디스, 할아버지가 미안하구나. 좀 더 좋은 옷, 장난감, 맛있는 간식도 넉넉히 사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랑 이렇게 사는 게 제일로 좋아요!’

‘……나도 그렇단다, 우리 아가.’

솔직히,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오히려 할아버지께서 조금 유난이신 편이셨다.

이 정도면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생활 수준은 충분히 웃도는 것 아닌가.

“완성했다!”

나는 얼기설기 완성된 화관을 바라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할아버지께 선물해 드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집 가까이 도착했을 때였다.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백마 한 마리가 집 앞 버드나무의 곁에 서 있었다.

“우와…….”

나는 무심코 감탄사를 흘리며 백마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누구의 말일까?

아무리 봐도 귀족의 것 같아 보이는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 한 마리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그냥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아.”

생경한 목소리가 불현듯 탄식을 흘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알이 빠질 만큼 눈을 부릅떴다.

내가 그를 쳐다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살랑이는 봄바람이 불어와 찬연한 은빛 머리칼이 공중에 가붓이 휘날렸다.

새하얀 속눈썹에 싸인 붉은 눈동자가 얕게 떨리며 하염없이 나를 응시해 왔다.

새벽이슬을 머금고 고개를 살포시 숙인 한 떨기 꽃처럼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청년이 어느새 나타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와…….

나는 입을 헤벌렸다.

뭐야, 저 꼭, 로판 남주처럼 생긴 남자는.

왜 이런 시골 한복판에…… 저런 초절정 미남이 나타난 거지?

그런데 캐디가 꼭 걔…… 같지 않나?

로베릭 말이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고,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소설 ‘프라이움의 랩소디’에서 꾸준히 반복되던, 두 마리의 백마와 그 가운데 카멜리아 꽃이 박힌 휘장이 그의 가슴팍에 당당히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나는 입을 벌렸다.

너…… 설마 남주야?

아니, 갑자기 댁이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 건데?

“……네가.”

그 순간, 그가 풍성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마리에트의 딸이구나.”

툭.

귓가에 들려온 이름에, 나는 그만 들고 있던 화관을 떨어뜨려 버렸다.

……마리에트?

왜 이미 완결 난 소설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악녀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거지?

……그리고 뭐? 딸?

마리에트의 딸이라고?

내가?

……저놈이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나를 향해, 남주는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그리고…… 내 딸이기도 하고…….”

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처연한 눈망울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 발짝, 내게 더 다가서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야 너를 만나는구나. 내 자식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아가, 사실 내가 네 아버직!!”

까앙-!

그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짱돌이 애절하게 말을 잇던 남주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철퍼덕-

머리통을 가격당한 남주는 그대로 기절하며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라?

“이 망할 자식이, 어디다 손을 대!”

하, 할아버지?!

남주의 머리를 짱돌로 내리친 간덩이 부은 인간이 누구인가 했더니, 우리 할아버지잖아!

“은혜도 모르는 금수 같은 놈이, 내 딸이 네놈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다 떠났는데 어딜 염치도 없이 찾아와?!”

할아버지께서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신 채 마구 고함을 지르셨다.

“……아?”

나는 바닥에 무참히 얼굴을 박은 남주와, 이번엔 더 큰 짱돌을 들고 와 씩씩거리는 할아버지를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꿈에도 그린 적 없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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