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악녀의 딸
‘프라이움의 랩소디’ 의 악녀.
마리에트 아이딘 바스테반 공작 영애.
그녀는 바스테반 공작의 금지옥엽 외동딸로 태어났다.
라벤더색 고수머리, 매서운 황금빛 눈동자, 이지적인 외모.
마리에트는 보는 누구나 다 감탄하는 뛰어난 미인이었다.
여주인공 보정을 잔뜩 받아 비현실적으로 처연하고 아름다운 샤스티아만 제외하면.
남자주인공 로베릭은 헤일리안 대공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선대 황제는 로베릭의 아버지를 질투하여 그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웠고, 그로 인해 로베릭은 부모를 잃고 작위조차 잃어버린 채 죄인의 아들이 되었다.
미치광이 황제를 향한 두려움에, 그토록 고귀한 가문에 남겨진 유일한 후계자였음에도 아무도 받아 주지 않던 고아를 거두어 준 사람은 선대 대공의 친우였던 바스테반 공작이었다.
그래. 악녀의 아버지 말이다.
그러한 사연을 바탕으로 마리에트와 로베릭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났다.
두 사람은 친구보다는 긴밀하며 남매보다는 먼 사이를 유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리에트는 로베릭을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보았고.
로베릭은 마리에트를 누구보다도 가깝고 소중한 친구이자 은인의 딸로만 여겼다.
악녀의 아버지, 바스테반 공작은 일찍이 딸의 마음을 눈치채고 정성을 다해 로베릭을 보살폈다.
죄인의 아들인 로베릭이 황실의 1기사이자, 제국에서 추앙받는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바스테반 공작이 로베릭의 뒷배가 되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로베릭은 바스테반 공작 일가에게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미안해, 마리에트…….’
로베릭에게는 은혜보다 사랑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해. 그녀는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거야. 나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리, 파혼하자.’
로베릭은 은인과 친구를 배신하고 샤스티아를 선택했다.
그의 배신에 마리에트는 뼛속 깊이 분노했다.
자신과 아버지가 로베릭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돌아온 것은 배신과 세상의 조롱이었다.
고귀한 바스테반 공작 가문은 졸지에 닭 쫓던 개라는 치욕스러운 오명을 뒤집어썼고.
귀족들은 남자 마음 하나 못 잡아 평민 출신 과부에게 약혼자를 빼앗겼다며, 뒤에서 마리에트를 비웃었다.
고매하고 자존심 드높았던 마리에트는 복수를 결심했다.
그녀는 샤스티아와 로베릭이 순탄히 이어지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방해했다.
백성들에게 샤스티아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흩뿌리고, 사교계의 인맥을 활용해 샤스티아를 노골적으로 배척했다.
샤스티아와 그 딸의 목숨을 여러 번이나 위험에 처하도록 만들거나, 바스테반 공작가의 힘을 이용하여 로베릭의 지위를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마리에트는 결국 패배했다.
로베릭은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지켜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샤스티아와 결혼했다.
마리에트는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해피엔딩’이라는 무대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참으로 씁쓸한 결말이었다.
사실 나는 로베릭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샤스티아보다 주체적이고 총명했던 마리에트를 더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비록 그 총명함을 악행에 사용했더라도.
그래. 그랬는데.
“어디서 이 사실을 주워듣고 찾아왔느냔 말이야! 설사 알았더라도 오지 말았어야지, 네놈에게 양심이 털끝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렇다고 내가 악녀의 딸로 태어나고 싶었다는 말은 아니었지!
아니, 어떻게 마리에트가 로베릭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거야?
나는 기가 차서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상황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할아버지께서는 기어이 기절한 로베릭의 위로 더 큰 짱돌을 들어 올리셨다.
아예 남주를 골로 보내 버리시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 잠시만! 할아버지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나는 다급히 두 손을 뻗었다.
“멈추십시오!”
그때,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바탕에 화려한 금빛 자수가 들어간 기사 복장의 남자가 할아버지와 기절한 로베릭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전 공작 각하셨다고 한들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한 갈래로 곱게 땋아 내린 연녹색 머리카락이 내 눈앞에서 흔들렸다.
할아버지를 막아선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로베릭의 휘하 기사이자, 연녹색 머리카락, 적안의 미청년이라면…….
원작의 서브 남주밖에 없잖아?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생각에 잠겼다.
로베릭의 가장 충실한 부하이자, 할데바르트 백작가의 자제.
페리온 미하일 할데바르트.
원작에서 샤스티아를 향한 연모와 로베릭을 향한 충심 사이에서 고뇌했던 인물.
끝내 샤스티아에게 감정을 고백하지 않고 뒤에서 지켜보는 역으로 남았던, 꽤 불쌍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분은 헤일리안 대공 각하십니다. 작위도 박탈당한 당신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분이지요.”
나는 페리온이 내뱉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저 어린아이가 아무리 대공 각하의 따님이라 추정된다 한들, 당신이 얻어 갈 권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귀족 모욕죄로 처벌받고 싶지 않으시다면 무례한 행동은 이쯤에서 그만두십시오.”
불쾌했던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페리온의 무례한 발언에 아득, 소리 나게 이를 가시며 불쾌감을 드러내셨다.
“권력? 할데바르트에도 망조가 들었구나. 내가 이깟 금수만도 못한 놈의 권력을 갉아먹기 위해 내 손녀를 키웠다는 말이냐?”
“아닐 것도 없지요. 권력에 눈이 멀었던 따님과 아주 잘 맞으시지 않았습니까?”
페리온은 오만하게 대꾸했다.
죽은 자식을 아무렇지 않게 모욕하는 발언에 할아버지께서는 주먹 쥔 손을 파르르 떠셨다.
“네놈이 하다 하다, 이젠 죽은 내 자식까지 끌고 와 모욕을 자행하는구나! 스스로가 수치스럽지도 않으냐!”
페리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본인의 행적이나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페리온이 몸을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적의와 혐오로 가득한 눈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훑어내렸다.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외모는 대공 각하를 꽤 닮았긴 하나, 제 어미의 본성이 어디로 가진 않았겠지요.”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부디 이 아이가 대공녀로 인정받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헤일리안에는 이미 작은 카멜리아가 피어나 있으니까요.”
작은 카멜리아.
헤일리안의 대공녀를 칭하는 표현이었다.
샤스티아의 딸, 알레아를 뜻하는 말이겠지.
“당연한 소리 지껄이지 말아라, 내가 내 손녀까지 죽게 만들 성싶으냐?!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에게는 보내지 않을 것이다. 가자, 이디스! 저따위 놈의 말 같은 건 기억하지도 말거라!”
할아버지께서는 분명한 어조로 페리온의 빈정거림에 대꾸하며 내 손을 잡아끄셨다.
쾅-
거세게 문이 닫혔다.
할아버지께선 무릎을 꿇고 나와 시선을 맞추셨다.
페리온의 앞에서 호통을 치던 모습과 달리 나를 살피는 눈빛은 다정했다.
“이디스.”
“……할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야 했다.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지금껏 속여서 미안하구나. 네 어머니가 숨을 거두기 전, 네가 웬만큼 자랄 때까지 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숨겨달라고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단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나의 어머니는 그 어떤 출중한 사내보다도 똑똑했으며, 매사에 두려움이 없었고, 그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셨다고.
하지만 어머니가 사실 악녀 마리에트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할아버지의 말씀을 믿기가 어려웠다.
악녀인데.
아무리 총명하고 담대했다고 한들, 악행을 벌였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데.
“그 사람, 할아버지한테 맞고 기절한 그 아저씨가…… 정말 제 아버지예요?”
그리고 어떻게 로베릭과의 사이에서 나를 가진 거지?
설마 로베릭 이 자식, 말로는 샤스티아를 사랑한다 했으면서 마리에트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았던 건가?
남주가 악녀와 여주 사이에 양다리를 걸쳤다고?
“……그래. 네 아버지가 맞다. 네 어머니가 분명히 말했으니까. 믿지 못해 불의 신전까지 찾아가 친자 검사를 해 본 적이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확실히 말해 주더구나. 네 아버지는 그 망할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 맞다고.”
나는 입을 헤벌렸다.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알고 봤더니, 내가 소설 속 남주와 악녀 사이에 태어난 숨겨진 친딸?
……뭐야, 이 줘도 안 읽을 것 같은 막장 설정은.
“하지만, 이디스.”
할아버지께서 내 양손을 꼭 붙잡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아직 어린 너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네 친아버지에겐 이미 아내와 자식이 있어. 그리고 네 어머니도 네가 그 자식…… 아니, 네 아버지를 따라가는 것은 바라지 않을 거다.”
당연히 나도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여주인공과 그 딸이 떡하니 버티고 있을 대공가로 가겠는가?
서브 남주였던 페리온 자식조차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한테 온갖 적의를 내비치는데.
대공가 사용인들이 그보다 덜할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악녀의 딸이라는 꼬리표는 끝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쏟아지는 적의와 혐오 속에서 꿋꿋이 살아남아, 결국에 눈부신 명예와 사랑을 얻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냐고?
응, 그딴 거 줘도 안 받는다.
하루하루 안온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이 내 목표니까.
“그러니 오늘 일은 잊으려무나. 이 할아비는 네가 무럭무럭 자라서 착하고 성실한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만을 보기 위해 살아간단다. 그리고 네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 미래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게야.”
할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아버지 같은 거 없어도 잘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야.
“할아버지 말씀대로 할게요.”
“장하다, 우리 손녀.”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끌어안으셨다. 나는 포근한 품에서 눈을 감았다.
갑자기 남주가 내 아버지라며 들이닥쳤다 한들, 내 일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끼익-
“이디스!”
……왜 낮 12시에 문을 여니 집 앞에 남주가 있는 거죠?
내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짓든 말든 로베릭은 기쁘게 웃었다.
으어우, 나는 몸서리를 치며 다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