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 잠시만!”
턱-
하지만 로베릭의 손이 더 빨랐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로베릭의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로베릭은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허둥거리며 말했다.
“네 이름이 이디스라는 걸 알았단다. 미안하구나, 딸의 이름을 이제야 알다니.”
……왜 이렇게 절절하게 구는 거야?
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쎄한 직감이 날카로운 경보음을 울리는 것 같았다.
당장 이놈을 떼어내지 못한다면 내 인생이 여러모로 피곤해질 것 같다는, 그런 경고.
로베릭은 내 침묵을 뭐라고 생각했던 건지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가득해 보였다.
“어제 페리온이 난입했다고 들었다. 만약 그가 한 말이 있다면 기억하지 말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것이니.”
‘……외모는 대공 각하를 꽤 닮았긴 하나, 제 어미의 본성이 어디로 가진 않았겠지요. 부디 이 아이가 대공녀로 인정받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걸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페리온은 아이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또한 그의 두 눈동자에 생생했던 적의, 경멸, 혐오.
내가 영혼까지 어린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지, 진짜 아이였다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을 기억이었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말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빨리 보내 버리자.
얼굴 더 맞대고 있어 봤자 내 정신 건강에 좋을 건 없어 보인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께 들었어요. 아저씨가,”
“아저씨……?”
로베릭이 멍하게 내 말을 반복했다.
그럼 네가 나한테 아저씨가 아니면 뭔데.
설마 아버지라고 불러 주길 바라는 거니?
나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제 아버지라는 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를 생각은 없어요. 가세요. 할아버지 돌아오시기 전에.”
나는 말을 끝맺으며 다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아, 잠시만!”
하지만 로베릭의 손에 다시금 막혔다.
나는 인상을 팍 쓰고 로베릭을 쳐다보았다.
물기를 머금은 청초한 붉은색 눈망울이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줄 수는 없겠니?”
그리고 나왔다.
내가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극도의 거부감에 상상조차 시도하지 않았던 그 발언이.
야이 씨, 이게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니, 남주야.
“너를 몰랐던 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단다. ……네 어머니가 내게 사실만 말해 주었어도, 내 피를 이은 너를 이렇게 존재조차 모르고 방치하며 살고 있진 않았을 텐데…….”
로베릭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기색으로 힘겹게 말했다.
“이디스. 네가 나를 아버지로 여길 수 있도록, 단 한 번만 내게 기회를 다오.”
절절한 애원이었다.
대체 왜 이토록 내게 매달리는 걸까.
내가 자기 딸이라서?
너 딸 있잖아. 대공저에 있을 알레아.
아, 설마……. 나는 얼굴을 굳히고 생각했다.
알레아는 친딸이 아니고, 나는 진짜 제 피를 이은 친딸이라서 이러는 거야?
“…….”
원작을 읽을 때부터 로베릭은 내게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끔찍한 과거에서 그를 구원해 주었던 바스테반 공작.
바스테반 공작이 있었기에 로베릭은 아픔과 고통 없는 평화로운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녔음에도, 황태자의 측근 기사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던 바스테반 공작의 도움 덕분이었단 것이다.
사랑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로베릭을 이해해 보려 해도, 그러기엔 로베릭이 바스테반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가련한 과부를 향한 연정에 모든 신의를 저버릴 만큼 가벼운 은혜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니 나는 로베릭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할 수 없었다.
그가 남주였음에도.
그건 샤스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약혼자의 일방적인 바람 끝에 갑작스러운 파혼 통보를 받은 마리에트와 대면했을 때, 되레 적반하장으로 나왔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토록 잔인하게 말씀하시나요? 그분은, 로베릭 경은 저를 사랑하세요. 진심으로요! 그분께서 공녀님께 파혼을 말씀하시기 전까지 얼마나 눈물 흘리시고, 얼마나 괴로워하셨는지 아시나요? 그럼에도 저에 대한 사랑에 결단을 내리신 거예요. 그러니 공녀님께서도…… 이만 그분을 놓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다시 생각해도 참 답 없는 커플이었다.
……전권을 질러 버리지만 않았어도 당장 하차했을 텐데!
쾅-
“이디스!”
나는 두 번 망설이지 않고 문을 닫았다.
말이 안 통하는 것들을 상대로 말싸움하다 어린 나이에 욕지거리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
나는 굳게 닫힌 문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제발,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어쩌다 마리에트의 딸로 태어나서…….”
으으으,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아직도 로베릭이 서 있을 게 분명한 문가를 떠났다.
하지만 역시나일까?
로베릭은 아주 끈질겼다.
진상 남주이다 못해, 마침내 진드기로 진화하기라도 한 것처럼.
* * *
어제의 일이 있고 다음 날, 오전 11시.
“이디스! 어제는 아버지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구나. 다시…….”
쾅-!
“…….”
그다음 날, 오후 2시.
“이디스! 어제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지. 네가 좋아할 것 같은 과자를 가져왔는데 아버지와 같이…….”
콰앙-!
“하…….”
그그다음 날, 오후 3시.
“이디스! 제발, 대답하지 않아도 좋으니 한마디라도 들어 주면…….”
콰아앙-!
“저 자식이…….”
그그그 다음날, 오후 12시.
“이디스! 지난번에 이 말을 눈여겨보는 것 같던데 아버지와 같이 타 볼…….”
쾅, 쾅쾅!
그그그그다음 날, 오전 11시.
“이디스. 오늘은 네가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 문 앞을 떠나지 않겠다. 제발 문만이라도 닫지 말아 주면 안 되겠…….”
쾅, 쾅쾅쾅!
“미친!”
나는 문을 부서져라 닫은 뒤에도 빡침이 가시지 않아 발로 문을 걷어찼다.
또 찾아왔잖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문가를 노려보았다.
로베릭이 징글징글하게 달라붙은 지도 오늘로 벌써 닷새째였다.
그 집념이 점점 공포스러워진다.
저 미친놈은 딱 할아버지께서 집을 비우셨을 때만 귀신같이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집 주위에 감시꾼이라도 숨겨 놨나.
나는 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분명 아직도 바깥에 서 있겠지.
어제인가 그제인가 창문으로 몰래 훔쳐보았을 때처럼,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몰골로 하염없이 집을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오늘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할아버지께서 오시든 말든 아예 떠나지 않겠다고 선포하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닫았던 문을 열었다.
달칵-
“이디스!”
드러난 문틈 사이로 로베릭은 만면 가득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이다, 드디어 아버지와 대화할 마음이 생겼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꺼림칙한 기색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로베릭의 말간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이토록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7년.
긍지 높은 공작가의 영애를 변방의 시골로 추방한 후 흐른 세월이었다.
그토록 냉정하게 내쳤던 여인의 자식인 나를 대함에 있어, 한 점 거리낌 없는 그의 태도가…….
어딘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왜 자꾸 오는 거냐고요. 저 아저씨 따라갈 생각 없어요.”
내가 툭 내뱉은 말에 로베릭의 미소가 깨졌다.
로베릭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디스. 지난번에…… 너에게 기회를 줄 수는 없겠느냐고 물었었지. 정말로 아버지와 함께 갈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거니?”
나는 대답 대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내 답이다.
로베릭은 입술을 꾹 깨물다 간절히 말했다.
“생각해 보렴. 이토록 낡고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보단 아버지와 함께 가는 게 훨씬 낫단다. 이런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나은 환경에서 네가 하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모두 누리며 네가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마.”
“…….”
기분이 다시는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저하되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물었다.
“왜 어머니를 버리셨어요?”
그의 가장 민감한 치부를 찌르는 말을.
“……뭐?”
붉고 찬란한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나는 로베릭의 당황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한 번, 사랑하는 여인과 그 딸을 해치려 했다는 죄목하에 또 한번 매몰차게 내버렸던 여자의 자식.
그런데 어째서, 로베릭은 이토록 절절하게 애원하면서까지 나를 데려가기 위해 애를 쓰는 걸까?
마리에트는 세간에서도 두고두고 그 행적을 씹히는 악녀였다.
그런 여인의 자식인 내가 로베릭을 따라가 봤자 주위의 적의와 경멸에 시달릴 것은 뻔한 일이다.
아무리 머리가 꽃밭이라고 해도 명색이 대공인 그가 이 결과를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그러니 더더욱 나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알고 싶었다.
원작이 끝나고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른 뒤의 로베릭이 마리에트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나 또한 알지 못하는 영역.
지금의 로베릭이 마리에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나를 대하는 이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네 어머니에 대한 건…….”
로베릭은 내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중요하지 않다고요?”
이게 무슨 망언이란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이디스.”
로베릭은 새하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 섞인 어조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직 어린 너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네가 원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네 어머니는, 네가 그동안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지는 모르겠으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은 아니란다.”
……뭐라고?
나는 망연히 로베릭을 올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니,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듣기 좋은 말도 아니지 않니.”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게 끝이야?
자기 딸 앞에서…… 어머니라는 사람에 대해 해 줄 수 있는 말이?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으세요?”
나는 차마 믿지 못할 심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이디스…….”
로베릭은 그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를 얕게 일그러뜨리며 대꾸했다.
“내가 미안한 사람은 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