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 *
“이디스.”
“네?”
할아버지의 부름에 나는 갈색의 국물을 헤집던 것을 멈추었다.
“어디가 아픈 것이야? 왜 도통 먹지를 못해.”
고개를 들자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아뿔싸, 눈치채셨다.
“아니에요. 조금 뜨거워서 천천히 먹고 있었어요.”
나는 동요를 감추고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이리 주거라. 할아비가 식혀 주마.”
접시를 들고 가는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바라보며 나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릭이 찾아오지 않은 지 오늘로 사흘이 흘렀다.
어떻게든 내쫓긴 했지만 이대로 단념하고 물러날 인간이 아닌데.
……어떡하지.
로베릭이 생각보다 유하게 나와서 내 선에서 물리치는 게 가능했지, 만약 그가 자신의 신분과 권력을 내세워 찍어 누른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솥을 바꾸든가 해야지, 뜨겁긴 뜨거우면서 재료는 설익고…….”
나는 앞날을 향한 막막함에 휩싸이고, 할아버지께서는 시원찮은 솥의 성능에 혀를 차며 중얼거리시던 때였다.
똑똑.
“……?”
“!”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그리고 선명하게.
쨍그랑-
손에서 수저가 떨어졌다.
귀가 아플 만큼 요란스러운 소음이 진동했다.
……설마.
나는 차갑게 식은 입술을 사리물고 문가를 바라보았다.
로베릭이 찾아온 건가?
할아버지께서 계시든 말든 이판사판으로 나오겠다는 거야?
“앉아 있으렴.”
자리에서 일어난 할아버지께서 문을 여셨다.
두근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던 순간, 열린 문틈 새로 드러난 얼굴은, 예상 밖으로.
“……네놈!”
페리온이었다.
“……?”
니가 여기서 왜 나와?
“…….”
어둠을 등진 사신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페리온은 굳은 기색으로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당장 썩 꺼지지 못해!”
할아버지께서 노성을 지르셨다.
이때껏 페리온이 해 왔던 행동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비켜라!”
그럼에도 페리온은 묵묵부답이었고, 할아버지께선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당기셨다.
턱-
“이 녀석이…….”
그러나 페리온의 손아귀가 매섭게 닫히던 문을 붙들어 막았다.
며칠 전, 로베릭의 머리에 짱돌을 박아 넣던 것과 다름없는 살벌한 목소리가 할아버지의 목울대에서 넘실거렸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돌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왜 찾아온 거야, 이러다 진짜 싸움 나기 전에 이유부터 말하라고!
“헤일리안 대공 각하와 관련하여 긴히 나눌 대화가 있습니다.”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페리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
험악한 눈길로 페리온을 응시하던 할아버지께서 눈에 띄게 동요하셨다.
“듣지 않으셔도,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페리온은 반쯤 닫힌 문틈 새로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로베릭과 관련하여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예상치 못한 페리온의 발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간 끌지 말고 용건부터 말해라. 그리고 꺼져.”
그의 말에 대한 할아버지의 답은 정해진 것이었다.
탁, 할아버지께서 손을 거두시자 페리온의 출입을 막아서던 낡은 문이 완전히 열렸다.
“……완력은 여전하시군요.”
“닥쳐라.”
페리온은 이마 위로 얼핏 흘러내린 진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로베릭의 것과 색채가 비슷하나 그보다 더 날카롭고 탁한 빛을 띤 적안이 내게 향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토록 갑작스레 찾아온 거지?
나는 그를 향해 경계심을 숨기지 않고 내비쳤다.
“……저 아이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 순간, 페리온은 그가 이토록 갑작스러운 한밤의 밀회를 택한 이유를 밝혔다.
“……뭐?”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 당신에게 하나의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페리온은 달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 * *
나는 탁자 위에 어지러이 올려진 자루와 금고의 열쇠로 추정되는 금속 몇 가지, 그리고 도통 알 수 없는 용도의 패(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네 녀석의 제안은.”
“대공 각하께서 당신들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십시오.”
로베릭의 눈을 피해 느닷없이 방문한 페리온이 꺼낸 ‘제안’은 바로 이것이었다.
“도주에 필요한 모든 재화를 지원하겠습니다. 당신은 이동을 금지하기 위해 신분 패를 박탈당한 상황이니 그를 대체할 위장 신분 패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대공 각하의 눈을 피할 수 있게 제 심복 중 하나를 붙여 목적지까지 호위하도록 명령하지요.”
“……네놈이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무엇이지? 네 지금 이 행동에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의 사주가 섞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도라도 있느냐?”
할아버지께서는 미간을 깊게 좁히며 말씀하셨다.
페리온은 대답하기 전, 눈을 미끄러뜨려 나를 응시했다.
나는 흠칫 몸을 떨며 손을 그러쥐었다.
“증명이라.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는 당신의 외손녀가 헤일리안의 대공녀로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페리온은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현재의 상황이 가장 조화롭습니다. 그 평화를 모두 부서뜨릴 존재가 바로 저 아이고요.”
페리온은 로베릭의 유일한 친자인 나의 등장으로 샤스티아와 알레아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는 듯했다.
“……저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나 대공 각하께서는 당신의 외손녀를 대공녀로 받아들이고자 하십니다.”
“뭐라고?! 그놈이 무슨 자격으로!”
로베릭이 지난 일주일 동안 끔찍하게 질척거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할아버지께서 경악한 목소리로 외치셨다.
“……자격은 충분하시지요. 어찌 되었든 친부이시니.”
아무리 작위 박탈과 악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여인의 자식이라 해도, 대공의 피와 고귀한 바스테반 공녀의 피를 물려받은 나.
그리고 대공가의 피는 단 한 방울도 물려받지 못한 채, 출신 불명의 평민 부모를 둔 알레아는 감히 비할 수 없는 격차를 두고 있었다.
게다가 로베릭까지 나를 대공녀로 데려가고자 하는 확고한 의사를 품었다고 하니.
페리온은 초조함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기색으로 덧붙였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가능한 조건은 최대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손녀가 헤일리안의 대공녀가 되는 일은 원치 않으실 것 아닙니까.”
참으로 그다운 이유였다.
나는 페리온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진저리를 냈다.
이미 자신의 주인과 결혼까지 한 여자와 그 딸을 주인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지켜 주고 싶을까.
나에게야 좋은 일이지만, 아무튼 제정신 아닌 건 주군이나 수하나 똑같다.
“……하.”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게 된 할아버지의 안색에는 혼란스러움이 역력해 보였다.
“내가, 네놈을 어찌 믿고.”
그 혼란엔 페리온을 향한 증오와 불신이 자리해 있었다.
페리온은 주인공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바스테반 공작가의 몰락에 일조한 인물이었으니까.
“선택이 어려우십니까?”
페리온은 시리게 얼어붙은 낯으로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그럼 하나 더 말씀해 드리지요. 헤일리안 대공 각하께서는 저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계십니다.”
“……뭐?”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페리온까지 눈치챌 정도로 굴었냐? 미친놈.
“그놈이 왜, 아니, 애초에 아비니 뭐니 망발을 지껄이면서 찾아온 것부터가 불길하긴 했지만…… 허나 수치라는 것을 아는 인간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을…….”
“되었고, 확답부터 받아야겠습니다. 이 제안. 승낙하시겠습니까?”
페리온의 제안은 분명한 기회였다.
나를 대공녀로 데려가고자 하는 것이 로베릭의 결정이라면, 나와 할아버지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로베릭의 결정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해결책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로베릭이 찾지 못할 곳으로.
제국의 국경선을 넘어, 머나먼 타국으로 도망치는 것.
“…….”
할아버지께서는 치열한 고민에 휩싸이신 듯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생각도 나와 같은 결말에 이른 듯했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승낙의 말이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끝내.
* * *
‘빠른 시일 내로 목적지를 정하십시오. 채비가 늦어져서는 안 됩니다. 제 선에서 대공 각하의 시선을 돌리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페리온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그가 폭탄처럼 떠안기고 간 금화 자루와 은행의 금고 열쇠들, 신분 패는 탁상 위에 여전히 올려져 있었다.
“…….”
그러나 이 무거운 침묵은 과연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나는 소파에 앉아 발을 흔들거리며 아까 전부터 침묵을 유지하시는 할아버지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저렇게 심각하실 만도 했다.
나 하나 때문에 지난 칠 년 동안 머물러 온 삶의 터전을 떠나, 증오스럽기 그지없는 페리온의 조력에 의지하여 알 수 없는 머나먼 땅으로 도망쳐야만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지도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망할 로베릭.
그놈만 없었어도 난데없는 도주극을 벌일 이유는 없는데.
그저 이때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지루함마저 느껴지는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했을 텐데.
……어떻게 내 존재를 알게 된 거지?
나는 어쩌면 진작에 가졌어야 했던 의문의 불씨를 피워냈다.
지난 7년 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왔으면서.
갑자기, 왜?
“이디스.”
“네?”
상념 속으로 점점 깊게 가라앉던 나를 불러일으킨 것은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나는 놀란 나머지 약간 높게 올라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들자 복잡한 미소를 머금은 할아버지께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아까 그 남자와 할아비가 대화하던 것을 들었겠지.”
“……네.”
나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할아버지의 미소가 살짝 떨리는 듯했다.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거다. 하지만 상관없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도 돼. 전부 이 할아비가 해결할 테니까.”
따듯한 손길이 내 어깨를 무겁게 감쌌다.
“그리고…… 이디스, 이곳을 떠나서 조금 먼 곳으로 이사를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입안의 살을 살짝 깨물었다.
“네가 싫다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거라. 그냥 네가 하고 싶은 선택을 하렴.”
내 머뭇거림을 어떻게 생각하신 건지 할아버지께서 덧붙이셨다.
바보같이.
나는 미지의 선택지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둘러싸여 두려움에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았다.
안 그래도 힘든 할아버지께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사실 예전부터 마을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저는 어디든 좋아요.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떨어져서 로베릭 같은 놈의 딸로 살아가는 건 죽어도 싫었다.
그렇다면, 떠나야 했다.
“……그래.”
아픈 미소가 할아버지의 입가에 맺혔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렸구나.”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오늘따라 유독 힘없이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런데…… 어디로 갈 생각이세요?”
나는 할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다 조심스레 물었다.
이름 없는 소국일까?
아니면…… 니샤도 가능성이 꽤 있었다.
로샨 제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취하는 왕국이니, 그 사상이 조금 껄끄럽다고는 해도 도망치기엔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옛 친우가 머무르는 곳.”
“네?”
그러나 되돌아온 말에 담긴 생경한 단어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할아버지의 안색에 맺힌 미소는 어느새 아픔에서 회한에 가까운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든 왕국과 제국 간의 이해관계에서 분리된 곳이니…… 우리가 떠나기엔 그보다 적합한 곳이 없지.”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눈만 깜박였다.
뎅- 뎅-
입을 열어 그것을 물어보려던 순간, 시계 종소리가 어둠에 잠긴 집을 크게 울렸다.
“시간이 늦었구나.”
할아버지께서는 온화하게 웃으셨다.
“아홉 시는 뭐 하는 시간이지?”
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답했다.
“……착한 아이는 꿈나라로 갈 시간이요.”
“잘 아는구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할아버지께서 내게 손을 내미셨다.
“오늘은 좋은 꿈을 꾸게 될 거란다. 모든 걱정은 잊고, 네 꿈에서도 이 할아비가 나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