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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5)화 (6/141)

<5화>

* * *

[십여 년 동안 연락 끊어 놓고, 갑자기 망명 신청이라. 너도 참 대단하구나. 어울리지도 않는 정치판에 몸담는다고 하여 내가 알던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참.”

시오른은 바람의 정령 편에 들려온 친우의 편지를 읽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자신이 염치없다는 사실은 그도 느끼고 있었다.

[네 딸아이는 지금도 기억해. 잊을 수가 없는 아이였지. 감상에 잠기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로샨 제국의 공녀만 아니었어도 내 후계자로 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다름 아닌 그 아이의 딸이라니, 기대되는구나.]

“또 시작이군.”

시오른은 혀를 찼다.

친우의 기묘한 취향이 또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당연히 정령사겠지? 각성은 아직이니? 아니다, 너 생각하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건 피했으면 좋으련만. 아무튼 돌아오는 서신 편에 네 손녀 이름도 적어서 보내. 참, 이 정도 말했으면 아무리 돌대가리라도 알아들었겠지? 망명 신청은 허가야. 빨리 튀어와.]

예상대로의 답신이었다.

시오른은 한시름 놓으며 잠든 아이의 이마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으음…….”

“……정말로 마리에트를 닮았구나.”

아이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을 때면, 시오른은 자신이 현재에 머무르는 것인지 수십 년 전의 과거에 존재하는 것인지 모를 아득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반려를 잃은 그의 품속에 작고 사랑스러운 딸만이 남았던 시절.

밤이 내려오면 낮에 억지로 몰아냈던 슬픔이 아귀처럼 몰려들었고, 그에 잠 못 이루던 시오른이 유일하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곤히 잠든 딸아이의 곁이었다.

“마리에트…….”

이디스는 그토록 사랑하는 딸이 세상에 남기고 떠난 유일한 혈육이었다.

‘……아버지. 비록 저는 이렇게 떠나지만…….’

“지키겠다.”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메마른 목소리는 시오른의 심장을 산 채로 갈라내는 듯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사무치게 그리워, 그래서 이 밤.

시오른은 다시금 죽은 딸에게 맹세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아이를 지키겠다.”

단단한 속삭임은 고요한 방을 가득 채우고 홀로 굳세게 메아리쳤다.

* * *

지난밤,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은 예정대로 손녀를 데리고 도망쳤다.

“할데바르트 경.”

그들이 떠나고 어둠에 잠긴 마을을 내려다보던 페리온은 곁으로 다가온 수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지금 명령을 수행할까요?”

약간의 고민이 입가에 맴돌았으나.

“그래.”

답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수하는 깊게 묵례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콰광-!

모든 침묵을 비웃으며 포효하는 불길이 몰아친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우성치는 비명, 불타 무너지는 건물, 차마 빠져나오지 못하여 애타게 토해내는 절망.

“-어쩔 수 없다.”

묵묵히 그 참상을 응시하던 페리온은 자신을 달래듯 중얼거렸다.

비록 과거에는 위명이 대단했다고 하나,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서는 일개 늙은 노인에 불과한 자와 어린아이의 도주.

그 허접한 계획을 로베릭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면 이 정도쯤 되는 사고는 벌여 주어야 했다.

부디 로베릭이 자신의 유일한 친자식 또한 저 화재를 피하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믿기를 바라며.

페리온은 두 눈을 감았다.

붉은빛을 받아 기묘하게 빛나는 연녹색 머리칼이 그의 등 뒤로 길게 휘날렸다.

* * *

“……어?”

사방이 검게 타들어 간 잿더미 한가운데, 유일한 백색으로 존재하던 사내가 망연히 입술을 벌렸다.

차마 말이 되지 못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송구합니다, 각하. 어젯밤 일어난 대화재가 마을을 전부 전소시켰습니다. 아뢰기 끔찍한 일이오나, 전 바스테반 공작의 자택도 함께 전소되었습니다. 마을 외곽으로 나와 있었던 이들을 제외하고 생존자는 없으며 감시를 맡겨 놓았던 수하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보아 의도가 명확한 방화였다고 추론됩니다.”

페리온은 로베릭의 곁에서 준비한 보고를 읊었다.

“…….”

그런데, 로베릭이 이상했다.

“각하?”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페리온이 그의 기색을 살필 겨를도 없이 로베릭이 걸음을 내디뎠다.

“각하!”

페리온은 당황에 잠겼다.

서둘러 로베릭의 뒤를 따라갔지만, 로베릭의 발걸음은 정처가 없었다.

대체…….

번뜩 떠오른 가정에 페리온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 아이를 잃은 것이 그토록 충격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헤맨다고 생각했던 로베릭의 걸음은 시종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이 살던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 * *

페리온이 자신의 뒤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도,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로베릭은 그저 걸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이의 모습이 피어났다 지기를 반복했다.

얼마 만에 되찾은 혈육이었던가.

‘로베릭, 나오지 말거라, 너만은 살아남아야 한다! 약속하거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아버지, 아버지!!’

광기에 물든 선황의 잔악한 손아귀에 잃었던 아버지.

친정에서 그 소식을 접하고 다급히 대공저로 돌아오던 길에 영문 모를 사고로 비명에 떠나셨던 어머니.

열 살이라는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어버린 로베릭의 가슴은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공허로 물들어 있었다.

시오른과 마리에트가 그의 가족이 되어 주었지만 그들은 피를 나눈 진짜 혈육이 아니었다.

로베릭이 마리에트를 저버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샤스티아를 선택하고 나서 후회한 것이 있었다.

바로 샤스티아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라는 사실이었다.

마리에트가 아닌 샤스티아를 선택함으로써 로베릭은 다시는 피를 나눈 혈육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로베릭은 애써 괜찮다고 생각했다.

샤스티아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이제 그의 자식이 된 알레아를 아끼며 해소되지 못한 욕망을 채웠다.

그러나 ‘진짜’ 혈육과 재회한 순간, 그가 느낀 환희와 지극한 애정의 크기는 알레아와 샤스티아를 향한 것과는 비할 바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로베릭은 그 짧은 시간 내에 이디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은 아이는 로베릭을 끝없이 밀어낼 뿐이었다.

로베릭에게는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가라앉은 여인을 되새기며, 그를 차갑게 거부했다.

“아직…….”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는데.

아버지로서, 가족으로서 해 주고 싶었던.

정말 꿈에 그리던 일은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를 떠나는 거니?”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내 이야기를 들어 줄까, 마음을 열어 줄까.

그런 생각으로 꿈꾸며 설레는 마음으로 드나들던 작은 집은 원래의 형체조차 찾아보지 못할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로베릭의 손아귀에서 붉은 핏물이 뚝, 뚝 흘러내렸다.

화마에 타들어 가지 않은 숲의 거대한 나무들이 아우성을 질렀다.

“각하!”

멀리서 페리온의 목소리가 메아리쳤으나 로베릭이 상관할 바 아니었다.

곁에 다가오는 이가 존재한다면 당장에 목과 사지가 베어질 듯 사나운 칼바람이 로베릭의 곁으로 휘몰아쳤다.

[로베릭…….]

[너에게는 이제 우리밖에 남지 않았어. 우리에게 의지해.]

[다 죽여 버리자, 모두 다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만들어!]

수많은 정령들의 목소리가 로베릭의 이성을 혼탁하게 어지럽혔다.

“안 됩니다, 각하!”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페리온은 경악에 휩싸여 간절히 외쳤다.

맙소사, 로베릭이 이렇게까지 정신을 놓아 버릴 줄은…….

페리온은 예상 밖으로 진행되는 상황에 무력하게 입술만 짓씹었다.

[정신 차려.]

그 순간이었다.

순수한 악의에 물든 수많은 목소리들과는 달리 명료한 이지가 깃든 미성이 로베릭의 이성을 일깨웠다.

“……에리얼?”

로베릭은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그 이름을 읊었다.

화아아악-!

그의 부름에 화답하듯 흉포한 바람이 모두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작은 구체는 한순간 눈을 뜨지 못할 만큼 폭발하며 휘몰아쳤다.

그 폭풍이 순식간에 잦아든 순간, 로베릭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꽤나 오랜만이네.]

목소리의 주인이 눈매를 옅게 휘어 미소를 지었다.

하늘을 담은 긴 머리칼이 굵게 땋아 늘어뜨려져 휘황한 금빛의 장식을 두른 채 그의 몸체 뒤에서 허공을 유영하듯 흔들렸다.

하얀 깃털로 이루어진 귀걸이가 그의 귓가를 장식하였고,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마치 날갯짓하듯 잔잔히 나부꼈다.

로베릭과 시선을 마주하는 날카로운 눈매 속 보석처럼 박힌 눈동자는 머리카락의 색과 동일한 하늘빛을 띠고 있었다.

날카롭고 시원한 이목구비를 띤 가는 몸피의 미청년이 느른한 자세로 공중에 부유한 채 로베릭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이었다.

“네가, 어째서…….”

로베릭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에리얼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퍼뜩 떠오른 생각에 로베릭은 비로소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신을 놓고 있어 알아채지 못했다.

이디스가 살아가던 집의 잔해는 이미 바람에 뒤엎어져 흩어진 지 오래였다.

“아, 안 돼……!”

어리석은, 어떻게 그대로 정신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로베릭은 스스로를 증오하며 격렬히 흔들리는 눈길로 스러진 잿더미를 응시했다.

두 속성에 달하는 축복을 잃어버린 여파로 바람의 정령들에게 자아를 휘둘렸다 한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유해가 있어야……!”

[실망스럽구나. 로베릭.]

그에게서 축복을 거두고 떠나갔던 정령왕의 음성이 로베릭의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안 돼, 일리피아!”

로베릭은 광인처럼 고함을 질렀다.

“에리얼, 나를 좀 도와줘. 내 아이, 내 아이의 유해를 찾아야 해!”

생명의 정령왕의 권능을 사용한다면 이디스를 되살릴 수 있었다.

그러니 에리얼이 유해만 찾아 준다면, 일리피아를 소환해 이디스를 되살리면 된다.

이미 그를 떠난 정령왕이 그 부름에 응답할 리 없었지만.

로베릭은 거기까지 생각할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심해서 더는 못 봐주겠군.]

비소가 뒤섞인 목소리에 로베릭의 사고가 멈추었다.

로베릭은 멍하게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에서 범람하던 모든 혼란이 멎었다.

환각이 아니라면, 에리얼은 마치 로베릭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에리얼……?”

멍하게 그의 이름을 읊조리는 로베릭을 향해, 에리얼은 마치 적선하듯 말했다.

[네 딸, 안 죽었어.]

귀가 먹먹했다.

“……뭐?”

로베릭은 에리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런 로베릭에게 쐐기를 박듯, 상체를 숙여 로베릭과 시선을 마주한 에리얼은 말했다.

[그 전에 너에게서 도망쳤으니까. 제 외조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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