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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6)화 (7/141)

<6화>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페리온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째서……?

페리온은 떨리는 눈동자로 의미 모를 미소를 머금은 에리얼을 응시했다.

“……그게, 무슨…… 도망쳤다고……?”

영혼이 나간 듯한 로베릭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

이내 그 중얼거림은 격렬한 분노를 담은 고함으로 변모했다.

아, 로베릭이 모든 일의 진상을 알아 버렸다.

유유자적한 미소를 머금고 분노하는 로베릭을 내려다보는 바람의 정령왕에게서 페리온은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어째서, 그가 개입하는 것이지?

바람의 정령왕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페리온의 계획은 완벽했고, 로베릭이 예상치 못하게 정신을 놓아 버리기는 했어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끝날 일이었다.

로베릭은 결코 일의 진상을 알지 못했을 것이란 말이다.

바람의 정령왕이 어떻게 시오른 바스테반과 그 손녀의 도주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을 따로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째서?

지고한 정령왕이 고작 일개 노인과 어린아이에 불과한 인간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이어질수록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그 순간, 하늘을 담은 매서운 시선이 페리온을 돌아보았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격이 서린 존재 앞에 페리온은 무력한 아이처럼 몸을 떨었다.

에리얼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쌀쌀함이 가득 서린 비웃음이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네가 알아서 찾아.]

에리얼은 그 말만을 남기고 거센 바람 한 줄기로 변모하여 사라졌다.

침묵만이 감도는 폐허에는 페리온과 로베릭만이 남았다.

처참하게 흩어진 잿더미를 내려다보던 로베릭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 하하하하!”

막힌 숨을 토해내는 것과 같던 그것은 어느새 광기 어린 웃음소리로 변모했다.

“……페리온.”

망연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페리온은 무릎을 꿇었다.

“기사단 소집해.”

페리온의 손끝이 메마른 대지를 버석하게 긁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토해낼 수 있는 말은 오직 복종뿐이었다.

* * *

“……그러니까, 당신이 아론 헤이트고, 옆의 작은 애가…… 남자애요, 여자애요? 그 로브부터 벗겨 보시오.”

“손자요. 딱 보면 모르겠소!”

어느 한적한 마을이었어야 할 검문소의 중간.

할아버지와 검문 담당 관리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이 주일 전의 한밤중, 할아버지와 나의 야반도주는 상쾌하게 스타트를 맺었다.

태어난 뒤부터 단 한 발짝도 벗어나 본 적 없었던 작은 마을의 경계를 두 발로 딛는 순간 내가 느꼈던 자유는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였다.

소설 속 텍스트로만 접했던 휘황한 도시들을 두 눈으로 구경할 수 있었고, 도주가 목적인지라 제대로 된 관광은 불가했지만 유명한 협곡과 고대 유적, 눈 덮인 설산들을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빌어먹을 로베릭의 이름이 들려오기 전까진.

‘헤일리안 대공 각하께서 60대 후반의 노인과 대여섯 살 외관의 어린 여자아이를 수배한다 하십니다!’

그의 말과 함께 거리에 내걸린 수배지는 할아버지와 나의 인상착의, 외양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졸지에 전 제국민을 대상으로 지명수배범이 되어 버린 나와 할아버지에게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시작한 도주였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끝까지 나아가야 했다.

‘……하는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머리를 염색하시고, 가벼운 분장으로 외모에 변형을 가하십시오. 아이는 성별을 위장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호위 명목으로 우리와 동행한 페리온의 수하가 내놓은 방안을 급하게나마 사용했다.

“당신도 그 수배지는 읽었겠지. 요새 이런 작은 도시에도 얼마나 압력이 들어오는지 아시오? 내 참, 대체 그 노인과 여자애가 누구길래 그 온화하신 헤일리안 대공께서 이리도 강압적으로 나오시는 건지.”

“…….”

관리의 입에서 헤일리안 대공에 대한 찬양의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할아버지의 손에서 힘줄이 불끈불끈 돋아났다.

“아무튼 그 아이 얼굴 좀 봅시다.”

제기랄! 역시 나도 할아버지처럼 얼굴에 손을 댔어야 했는데!

‘안 된다! 이디스의 연약한 피부에 이런 싸구려 화장품을 발랐다가 흉이라도 지면 네가 책임질 것이냐?!’

그러한 할아버지의 과보호로 인해, 나는 얼굴엔 손을 대지 않은 채 남자아이의 옷을 입고 로브로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럼 머리라도 짧게 자르겠습니다.’

페리온의 수하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가위를 들었다.

‘안 된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반대는 또다시 날아왔다.

‘이 예쁜 머리카락을 어찌 그리도 무참히 잘라낸단 말이냐!’

‘……하지만 남자아이로 위장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페리온의 수하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모조리 잘라내는 게 나도 조금 아깝긴 했지만, 완벽한 위장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려던 때였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금안이 나를 애처롭게 내려다보았다.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그 망할 호로자식 때문에 우리 예쁜 손녀 머리카락을 다 잘라내게 생겼구나…… 빌어먹을…….’

그리고 할아버지의 눈빛은 내겐 불가항력이었다.

‘안 자를래요.’

그래, 할아버지께서 저렇게 비통해하시는데 굳이 자를 필요가 뭐 있겠어.

‘하지만!’

‘남자애들도 머리 기르곤 하잖아요. 뒤로 묶어서 내릴게요. 그럼 중성적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내 눈앞으로 서서히 내려오는 커다란 손을 바라보며 과거의 판단을 후회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꼬장꼬장해 보이는 관리인데, 당연히 너무 예쁘장하게 생긴 내 외모에 의구심을 가지겠지? 빌어먹을…….

“읍, 으읍!”

번뜩이는 날붙이가 시야에 스친 것은 그때였다.

어느새 관리는 입이 틀어막힌 채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어라?

의아함에 빠져 고개를 젖히자, 이제는 낯이 익은 페리온의 수하가 관리에 목에 검날을 바싹 붙인 채 할아버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죽이면 난리가 나지 않겠느냐?”

“죽이진 않을 겁니다. 기절시켜서 어딘가에 가둬 둘 생각이니.”

방금 전 관리의 말대로 작은 시골 도시에 불과한 이곳은 마침 지나가는 행인이 아무도 없었다.

“먼저 가십시오. 뒤따라 가겠습니다.”

“……알겠다. 가자, 이디스.”

운이 좋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검문소를 통과했다.

……이번엔 이렇게 넘겼지만, 매번 운이 좋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지.

페리온 이 자식은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했길래 로베릭이 벌써 알아챈 거야?

나는 무능해 빠진 원작의 서브남주를 마구 씹으며 멀리 보이는 마차를 향해 잰걸음을 옮겼다.

* * *

테르마 시.

이곳은 로샨 제국의 국경선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세워진, 제국의 마지막 도시였다.

“이디스, 걷기 힘들면 업히려무나.”

힘겨운 고난 끝에 결국 이곳까지 도달했다.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이곳만 넘어가면 로베릭의 추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친우분의 연락은 아직입니까?”

뒤에서 따라 걷던 페리온의 수하가 물었다.

“이제 서신을 보내야지. 그녀는 모든 바람의 정령을 다스리니 하루 안에 내 서신을 받을 것이다.”

대체 할아버지의 친구분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정령사이긴 한 모양이었다.

원작은 정령물을 표방했지만, 남주 로베릭의 강함을 부각시키는 요소로만 사용했던 터라 로베릭과 페리온을 제외한 주조연급 정령사는 등장하지 않았다.

……아니다, 깜박하고 있었다.

마리에트도…… 지나가는 서술로 정령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샤스티아는 장엄하게 얼어붙은 북해의 빙하처럼 아름다웠던 공녀를 떠올리며 가는 숨을 내쉬었다.

자신처럼 천한 것과는 영혼부터가 다른 고귀한 여인이었다.

지위와 혈통만으로도 추앙받는데, 거기에 강대한 정령사의 힘마저 타고났다 하니…….]

아차, 이걸 잊고 있었다!

마리에트도 분명히 정령사였다는 언급이 등장했었다.

인물 감정선 위주 속독의 폐해가 여기서 드러나다니…….

나는 낭패감에 휩싸여 애꿎은 손끝만 꾹꾹 눌렀다.

“이디스, 들어가자꾸나.”

“앗, 네.”

원작이 서술했던 마리에트의 설정을 필사적으로 되새길 때, 할아버지의 부름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꽤 커다란 크기의 여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관 테라포포]

요상한 이름이네.

“떠나기 전까지 여기서 묶을 거란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여관 입구의 계단에 발을 디뎠다.

* * *

할아버지께선 여관의 방을 잡자마자 곧바로 친구분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셨다.

“[실피드].”

삐로롱,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작은 새의 형체를 띤 바람이 허공에서 두둥실 나타났다.

“메카일라에게 전달해다오.”

삐삐.

대답하듯 종알거린 새는 할아버지의 서신을 부리에 물고 창밖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신기하게 그 광경을 쳐다보자 할아버지께서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돌아보셨다.

“신기하지?”

“……네.”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두 해 전까지만 해도 정령 이야기를 줄곧 해 주었는데, 언젠가부터 하지 않게 되었구나.”

끄응, 나는 약간 찔리는 마음으로 눈을 굴렸다.

“……제가 지겹다고 해서요…….”

“허허, 그랬구나. 그래, 이제 기억난다.”

자기 전이면 침대 머리맡에 앉아 이 세상의 시작과 정령의 탄생과 그들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던 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매일 되풀이하여 듣는 것은 지독한 고역이었다.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세계관 설정을 꿰게 된 건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긴 한데.

“그럼 오랜만에 정령 이야기나 해 볼까. 할 일도 없으니.”

할아버지의 정령 사랑은 도대체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미 시작된 뒤였다.

“태고에, 이 우주는 끝없는 어둠만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지…….”

* * *

여관의 주인은 카운터에 앉아 하품을 삼켰다.

올해로 30세,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졸지에 여관을 물려받게 된 남자는 자신의 처지를 끝없이 비관했다.

철저한 백수 인생을 영위하며 부모님 등골을 쭉쭉 처먹고 살다가 극단의 여배우와 불타는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감행했건만, 경제적 조건을 빌미로 그를 붙잡은 아버지로 인해 그의 사랑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여관을 강제로 떠맡게 되었으니.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 거야.”

한탄하듯 중얼거린 그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돈만 있었다면.

처연히 눈물짓던 연인에게 다시 찾아가 함께 떠나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돈만 있으면.

“……노인네와 어린 여자애라. 이런 널리고 널린 조합을 어떻게 찾아?”

그래서 그는 막대한 보상금이 걸린 헤일리안 대공의 수배지를 내려다보며 불만을 성토했다.

여관에 찾아오는 손님의 면면을 뜯어보긴 했지만…….

아, 그러고 보니 하나 있었나.

끼익-

“!”

바람의 정령왕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삐걱이는 경첩 소리와 함께 작은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래, 저 아이였다.

늙은 맹수처럼 험악하게 생긴 노인과 목석같은 청년 사이에 끼여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다니는, 이상한 남자애.

……남자애가 맞기는 한 걸까.

복장으로만 추측할 뿐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이대는 대략 비슷해 보이고, 목소리도 유리알 굴러가는 것처럼 또랑또랑했다. 수배지에 적힌 것처럼.

동행하는 일행들의 외형이 수배지와는 어긋났으나, 성별 문제만 확실해지면 꽤 가능성은 있어 보이는데…….

“앗!”

그때, 아이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심코 고개를 든 여관 주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툭 튀어나온 모서리에 아이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의 옷자락이 걸려 팽팽하게 당겨졌고, 아이가 다급히 고개를 돌리던 순간 아이의 머리를 가리던 후드가 스르륵 흘러내렸던 것이다.

이건 기회다.

여관 주인은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아이의 모습을 유심히 응시했다.

“……!”

그리고 그는, 코끝에 그윽한 꽃향기가 맴도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선연한 라벤더의 색채를 머금고 있었다.

“망할, 왜 안 빠져…….”

뽀얗고 조막만 한 얼굴을 채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감탄사가 흘러나올 만큼 조화로웠다.

“…….”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나, 그의 말문을 막히게 할 만큼.

“!”

그때, 아이의 영롱한 붉은 눈동자가 카운터를 향했다.

여관 주인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의자에서 몸을 던져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아무도…….”

아이는 작게 중얼거리고도 한동안 주위를 살피는 듯했다.

한참의 시간 뒤, 경첩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탁, 소리가 나며 정적이 흘렀다.

“…….”

여관 주인은 슬며시 상체를 들었다.

방으로 돌아간 건지 아이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는 몽롱한 심경으로 주춤거리며 카운터를 나와 아이가 서 있던 자리의 지척까지 걸어갔다.

“……설마.”

멍하게 중얼거리던 그의 마음속에서 실낱같은 의심이 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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