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 *
실피드는 작은 날개를 열심히 파닥이며 날아갔다.
모든 권력과 원한에서 배제되어 고고히 존재하는 지혜知慧의 성역을 향해.
[삐삐!]
동그란 눈망울이 주인이 머무는 성채를 담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삐?]
그 순간, 실피드의 시야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누군가가 새하얀 옷깃을 하늘에 나부끼며 가만히 손짓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삐!]
■■■ ■■였다.
앳된 소년의 모습을 한 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실피드를 불렀다.
실피드는 그의 부름에 복종했다.
그의 왕은 아니었으나, 그 또한 엄연한 왕이었으니.
“네 주인에게 전달하려는 거니?”
[삐로롱!]
실피드는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리 주렴.”
[삐삐?]
이걸 왜? 실피드는 작게 갸웃거렸다.
이건 실피드의 왕께서 총애하시는 늙은 주인에게 갈 서신이었다.
소년은 유리알에 가려진 눈매를 가만히 휘며 말했다.
“내가 대신 전달해 줄게.”
[삐…….]
잠시 고민에 잠겼던 실피드는 소년의 말에 복종했다.
하위 정령에 불과한 그가 감히 이 소년의 말에 불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착하구나. 이제 가서 쉬렴.”
[삐삐삐.]
그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실피드는 대기에 몸을 누이며 형체를 흩트렸다.
홀로 남은 소년은 드넓은 창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개전의 문이 열렸구나.”
작게 읊조린 말은 어둠으로 흘러가지 않고 허공에 비산했다.
소년은 성곽을 떠났다.
실피드에게 건넨 말과는 달리, 그의 걸음은 성채가 아닌 자신의 서고를 향했다.
* * *
이 도시에서 머무른 지도 어느덧 보름이 넘는 시일이 흘렀다.
“왜 이리도 오지 않는 게야…….”
할아버지께서는 창밖을 내다보시며 진한 한숨을 뱉으셨다.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은 더해졌다.
이제 이 도시만 벗어나면 되는데.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침묵이 빨리 끝맺기를 고대하는 지루함과, 종막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불안이 공존하는 기묘한 시간이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시간을 깨뜨린 건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 * *
로베릭이 테르마 시를 향해 오고 있다고 한다.
“빌어먹을, 결국 그놈이 이리로 오는구나……!”
할아버지께서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외치셨다.
내 기분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어디서 꼬리를 잡힌 걸까?
“여관을 옮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페리온의 수하가 말했다.
“……어차피 도시 안을 못 벗어나는데 거처를 옮겨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제 서신도 더는 보낼 수 없는데…….”
어떡해야 하지?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나?
고민해 보았지만 국경을 벗어나는 검문은 이때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만큼 절차가 엄격했다.
그곳에 들어간다는 건 스스로 정체를 까발리며 제발 나를 잡아가 달라고 읍소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최대한 숨을 죽여야겠지.”
할아버지의 금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할아버지의 친구분께서, 사람을 보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 * *
“……각하.”
“페리온.”
해사한 미소가 눈앞에서 만개하듯 피어올랐다.
“입 다물어.”
페리온은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제발, 제발 들키지 말아라. 로베릭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신고가 들어온 곳이 어디라고 했지?”
다정한 목소리가 부하에게 물음을 던졌다.
“테라포포라는 이름의 여관입니다.”
“그래?”
“바로 가시겠습니까?”
로베릭은 고민하는 듯 목소리를 흐렸다.
“아니.”
그리고 명쾌하게 말했다.
“다른 여관부터 쭉 훑고 들어가지.”
의중을 알 수 없는 그의 명에 기사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저, 각하, 송구하지만 어찌하여 그리하시는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로베릭의 눈매가 활처럼 휘어졌다.
“그냥.”
“예?”
그는 즐거운 이야기를 말하듯 덧붙였다.
“재밌잖아.”
……?
기사의 얼굴이 짙은 의문으로 물들었다.
단단히 돌아버렸군.
페리온은 그 광경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로베릭은 이번처럼 강한 분노에 정신을 놓아 버릴 때, 바람의 정령들의 종용에 휩쓸려 재앙에 가까운 재해를 일으키곤 했다.
그렇게 한바탕 쏟아내고 난 뒤 모든 감정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평소처럼 행동했다.
-주위 인간들은 그렇게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 그건 감정을 완전히 정리한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할까? 페리온, 네 생각은 어때?”
분노로 돌아버린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억지로 가면을 뒤집어쓴 것뿐이지.
사실상 저 웃는 낯 아래로 아직도 들끓는 분노가 그의 내면을 산산이 뭉개뜨리고 있을 것이다.
목격이 들어온 여관으로 바로 직행하지 않고 다른 곳부터 수색하겠단 것은, 시오른 바스테반의 숨통을 서서히 조이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증오에서 비롯된 잔혹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일종의 분풀이를 하겠단 것이다.
페리온은 눈을 감았다.
만약 이곳에서 그들이 들키게 된다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끝없이 되새기며.
* * *
“다른 여관부터 순차적으로 수색하고 있다 합니다. 어떻게 하실 건지 선택하십시오.”
결국 눈앞으로 닥쳐왔다.
“……이디스가 가장 중요하다. 나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걸까.
“이디스를 숨길 곳이…….”
할아버지께선 입술이 넝마가 되도록 짓씹으셨다.
“여관의 뒤편에 궤짝이 쌓여 있었지.”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할아버지께서 중얼거리셨다.
할아버지의 두 손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디스, 이 할아비 말 잘 들어야 한다.”
……어떻게 하시려는 거지?
“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작게 대답했다.
“비켜라.”
할아버지께서 문가를 가로막듯 선 페리온의 수하를 향해 고갯짓하셨다.
“……순순히 붙잡히시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할아버지께서 눈을 부릅뜨셨다.
살벌한 예기가 할아버지의 금안에 감돌았다.
이런 때가 자주는 아니었지만, 할아버지께서 진심으로 분노하시는 순간이 가끔씩 찾아오곤 하면 나는 오금이 저리는 감각을 느끼고는 한다.
“…….”
본래의 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과 몸엔 세월의 흔적이 깊게 남아 초췌한 노인의 모습을 지녔더라도.
“다시 말하지. 비켜라.”
숨겨지지 않는 기백이 있다.
원작에서 할아버지께서 젊었던 시절에 대한 서술은 일절 나오지 않아 내가 알 길은 없지만 과연 어떤 분이셨을지 궁금하다.
……이토록 급박한 상황에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다니.
나는 스스로를 힐난하며 손바닥이 피가 나도록 꽉 그러쥐었다.
“……알겠습니다.”
페리온의 수하는 끝내 물러났다.
할아버지께서는 갓난아이를 싸매듯 내 몸을 망토로 칭칭 감으신 뒤 바삐 걸음을 옮기셨다.
* * *
불빛 하나 없는 여관의 뒤편은 밤이 내려앉아 어둑어둑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고 그림자로 쌓은 벽처럼 보이는 궤짝 수십여 개가 또렷하지 않게 시야에 들어찼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궤짝 위에 내려놓으신 할아버지께서는 수십 개에 달하는 궤짝을 일일이 열어 보며 그 안을 확인하셨다.
내가 들어갈 만한 공간을 찾으시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견디다 못해 입을 열었다.
“아무 말 하지 말거라.”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미리 아시기라도 하는 걸까.
할아버지께선 내 말을 막으셨다.
나는 아프게 입술을 짓씹었다.
저 멀리 바깥에서는 정령이 빛을 발하는 전구가 아득히 빛나고 있었건만, 내가 머무르는 곳엔 짙은 그림자만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실 이 도주는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듯 기댔다.
그래도 기대했다.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결말은 결국 이런 것이었다.
“휴…….”
할아버지께서 거친 숨을 고르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고생하시는 게 싫었다.
나 때문에 모든 안온함을 포기하고, 노쇠한 몸으로 고난을 자처하는 할아버지의 행동에서 느껴지는 지극한 사랑에 행복해하다가도 이내 괴로워지고 만다.
그 사랑은 할아버지를 태워서 나오는 것이었으니까.
원작을 떠올리면 그 죄책감은 더욱 짙어졌다.
그 누구의 관여도 허락지 않고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으며, 누구보다도 고고한 태도로 삶을 거닐던 바스테반 공작.
그 오만하고 고귀했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견딜 수 없는 착잡함이 올라왔다.
당신께서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걸 위해서라면, 만약 내가 그 일을 이뤄낼 수 있다면…….
“이디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하니 시선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땀에 젖은 것이 여실히 보이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어느새 나를 보고 있었다.
“잘 듣거라. 앞으로 어떤 소리가 들리든, 누가 네 이름을 부르든 간에 절대 이 궤짝 바깥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설사, 이 할아비가 부르더라도 말이야.”
“……할아버지.”
“뚝, 울지 말거라. 울어서는 안 된다. 울음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로베릭은 할아버지를 어떻게 할까?
한때의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위해를 가할까?
아니야, 그러지는 않을 거야.
할아버지께서는 무사하실 테고, 나는…….
할아버지의 손이 나를 들어 어린아이 두어 명이 들어갈 정도의 커다란 궤짝 안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나는 다급히 고개를 들어 궤짝의 뚜껑을 붙든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웃고 계셨다.
“눈 꼭 감고, 잠을 잔다고 생각하렴.”
그러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어둠 속에서 흐리게 빛나고 있었다.
“할아버지, 안 돼요, 그냥, 그냥…….”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토해내는지도 모른 채 두서없이 외쳤다.
“……사랑한다, 우리 손녀.”
“할아버지!!”
그러나 할아버지의 마음은 변치 않았고, 어둠은 나를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나는 궤짝을 닫는 할아버지의 손길을 끝내 막지 못했다.
“안 돼…….”
홀로 남겨진 칠흑 같은 공간 속.
내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스러졌다.
* * *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 궤짝 안은 마치 바깥과 괴리된 듯했다.
“…….”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 잘 될 거야, 그럴 거야…….”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끝없이 되뇌었다.
그래야만 발치에서부터 스산하게 올라와 나를 집어삼키는 공포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었으니까.
“…….”
그럼에도 시간은 지독하리만큼 흘러가지 않았다.
“……정령.”
시간을 때우기엔 그것만큼 적절한 것이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자장가를 대신하여 들려주시곤 하셨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태고에 이 우주는 끝없는 어둠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로서는 알지 못할 신비한 섭리로 인하여 그 어둠 속에서 생명의 일리피아가 태어났고, 그 뒤를 따라 죽음이 태어났지.
그 후 어둠뿐이었던 공허 속에서 생명과 죽음의 뒤를 이어 다채로운 생명들이 탄생했단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는 그것을 정령이라고 부르게 되었지.
수많은 정령들이 세상을 채웠고, 그들의 시조가 되는 정령왕들은 각자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
불의 정령왕 피닉스.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
전기의 정령왕 아스트라페.
빙황 프린셔.
그리고, 지혜의 로어.
누군가가 빠졌다고 생각하니?
그래. 그들보다도 먼저 우주에 존재하던 어둠이 있었지.
어둠에게도 이름이 있었단다.
그건 바로-’
끼이익-
“!”
귓가를 긁는 소음이 잔뜩 예민해진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감았던 눈을 퍼뜩 떴다.
할아버지?
서서히 열리는 어둠 너머로 별빛이 찬연한 밤하늘이 들어찼다.
“할아버지……?”
나는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한 탓에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힘겹게 들었다.
“오랜만이구나.”
그러나 시선의 끝에는 붉은 눈동자가 걸려 있었다.
내가 바라 마지않던 찬란한 황금빛 금안이 아니었다.
나는 전신을 뒤흔드는 경악에 숨소리 한 자락 내뱉지 못했다.
그런 나를 마주 응시하며, 그 불길한 붉은 눈동자는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이디스.”
밤하늘을 등진 채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보며 로베릭은 아름답게 웃었다.
지독하게 아름다워서, 역겨울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