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8)화 (9/141)

<8화>

로베릭이 내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나는 혐오감에 이를 갈았으나 그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안위를 확인해야 했으니까.

“……이디스!!”

“할아버지!”

대공가의 병력으로 보이는 기사들 사이에 무릎을 꿇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 두 눈에 비쳤다.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네놈이 기어코 내 손녀까지 앗아 가는구나!”

할아버지의 얼굴에 처절한 증오가 서렸다.

내 손을 부드럽게 맞잡은 로베릭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말씀은 가려서 하셔야지요.”

할아버지의 곁으로 걸어간 로베릭이 내 손을 놓았다.

나는 그가 그렇게 한 영문도 모른 채,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저는 이디스의 친부입니다. 이디스가 안전하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네 녀석.”

나를 마주 끌어안은 할아버지께서 마치 짐승이 목을 긁듯 으르렁거리셨다.

황망하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끌어안던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그리고 발견했다. 기사들의 너머에 쭈뼛거리고 선 여관의 주인을.

저 인간이구나.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로베릭에게 나의 소재를 알린 자가 누구인지.

나는 잇새를 악물었다.

이대로 저들의 잘 짜인 연극에 어울려 줄 생각 따위 없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디스!”

나는 할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뒤로 돌아섰다.

검집을 땅에 짚고 선 로베릭이 그런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치미는 역겨움을 간신히 참으며 외쳤다.

“따라갈 생각 없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왜 할아버지와 저를 붙잡는 거냐고요!”

나도 알고 있었다. 이래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이대로 벌벌 떨며 순종하기엔 너무 분했다.

이렇게라도 마구 고함을 질러야 간신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

그러나 로베릭의 시선과 목소리는 내가 아닌 할아버지에게 향했다.

그가 차분히 물었다.

“대체 이디스를 어떻게 교육시킨 겁니까?”

……뭐라고?

나는 뒷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기분으로 로베릭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에게 나에 대한 적의를 세뇌시키듯 교육해 왔겠지요.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혼자 망상에 빠져 제멋대로 확신하고 결론짓고 다른 이를 추궁하는 것을 세간에선 제정신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로베릭은 정녕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야! 아저씨가 찾아오기 전까지 저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고요!”

나는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내 팔을 붙잡은 할아버지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이디스.”

로베릭이 나를 불렀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를 똑똑히 노려보며.

“무슨 일이 있어도 아저씨를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죽을 때까지 할아버지랑 있을 거라고요!”

“이디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분기와 설움에 치미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로베릭을 노려보았다.

“……하.”

로베릭이 실소하듯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자신이 짚고 있던 검집에서 은빛의 검을 뽑아 들었다.

“!”

머리카락이 살랑일 정도의 바람이 일던 그 순간.

“할아버지!”

로베릭의 검 끝은 나를 지나쳐, 할아버지의 목을 겨누었다.

“감히 내 자식의 존재를 은폐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빼돌리려고까지 하였으니.”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로베릭은 검날을 비틀며 뒤이어 읊조렸다.

“그에 대한 대가는 과연 어떻게 치르실 생각이십니까?”

로베릭의 낯빛에 떠오른 기색은, 내가 처음으로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디스!’

‘다행이다, 드디어 아버지와 대화할 마음이 생겼구나!’

‘이디스…… 부탁이다. 왜 이러는 거니…….’

언제나 해사하게 웃거나 애처롭게 눈물짓던.

머리가 꽃밭으로 가득 찬, 제정신 아닌 인간.

분명 그렇게 여겼었는데…….

“예? 말씀해 보십시오.”

저 섬뜩한 얼굴은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꺼풀 하나 깜박일 수 없었다.

모든 가면을 벗어던진 그의 내면은 이토록 섬뜩하고 냉혹했단 말인가.

인격이 달라진 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무엇을 원하느냐?”

할아버지께서 힘없이 말씀하셨다.

……아니, 힘이 없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내 명예와, 가문과, 작위와, 끝내는 딸마저 앗아간 네가 아직도 내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더냐?”

할아버지께선 고요히 분노하고 계셨다.

“나도 이제 소유권을 주장해 보자꾸나. 이디스는 안 된다. 이 아이는 내가 길렀어. 제 어미의 배에서 피막을 두르고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친부니 혈육이니 하는 핑계는 대지 마라. 나에게도 이디스는 마리에트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니.”

할아버지의 손이 내 어깨를 꽉 감싸 쥐었다.

“……어찌할까요.”

로베릭은 할아버지의 말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아이인데.”

“…….”

“그것을 대신하여 무엇을 내어주실 겁니까? 아니, 이제 내어주실 것이 있기는 하십니까?”

끔찍했다.

진심으로, 끔찍했다.

“아,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단 하나, 가지고 계시는군요.”

저토록 노골적으로 할아버지의 목을 배회하는 칼끝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로베릭이 싫었다.

이젠 싫은 것을 넘어서 진저리나도록 역겨웠다.

할아버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고, 자신의 은인이자 스승이었던 이를 아무렇지 않게 조롱하는 그의 행태가 진정 치가 떨린다.

……하지만 그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토록 오만하고 추악하게 행동해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을 힘을.

그리고 그 힘은…….

“-그만 하세요.”

언젠가 나의 것이 될 가능성을 지닌 것이기도 했다.

빌어먹게도.

“제가, 아저씨를 따라갈게요.”

내가, 로베릭의 딸이 된다면.

“이디스!!”

할아버지의 외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로베릭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로베릭이 고운 아미를 설핏 좁히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두 눈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줄곧 외면했지만 나와 똑같은 빛을 띤 적안을 올려다보았다.

“대공가로 갈게요. 아저씨, 아니…… 아버지의 뜻대로.”

매섭게 늘어뜨려졌던 눈매가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나는 그의 동요를 묵묵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이어진 피의 유대는 이렇게나 확실하고 분명하다.

그러니 먼 훗날 당신이 쌓아온 그 힘은 온당하게 나의 것이 되겠지.

그때가 오면, 쇠약해진 당신이 감히 막아낼 수 없이 장성한 나는 끝내 이뤄낼 것이다.

할아버지의 복권을.

“이디스……!”

당신이 그동안 벌인 오만에 대한 단죄를.

로베릭의 낯에 호수의 수면에 꽃잎이 내려앉듯 아름답고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방금 전의 섬뜩했던 거죽을 기억하는 내겐 더없이 소름 끼치게 와닿는 미소였다.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나를 끌어안았다.

“아버지를 받아들여 주어서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네가 원하는 게 그 무엇이더라도 이루어주기 위해 노력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 줄게…….”

귓가에 절절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 장황한 목소리에 중요한 말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오직 뒤편에 있어 안색을 살필 수 없는 할아버지에게 향해 있었다.

내 선택을 분명히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괴로워하실 게 분명한데, 대체 어떻게 달래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그동안의 내 삶을 포근히 감싸 주던 평화가, 지금 이 순간 나를 돌아보며 종막을 고하고 있었다.

* * *

먼발치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페리온은 턱을 힘주어 악물었다.

금수의 길을 걷고 싶지 않았기에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가.

페리온에게 가장 증오하는 이를 꼽으라 말하면, 그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마리에트의 이름을 답할 것이다.

그녀가 사라진 지금 페리온이 가장 증오하는 존재는 마리에트의 아버지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과, 그녀의 딸이었다.

이디스 로넨 바스테반.

특히 마리에트의 딸은 더더욱 입에 박힌 가시 같았다.

현재 샤스티아와 알레아의 입지는 겉으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였으나, 그건 대공저를 한정할 뿐이었다.

‘천한 것들…….’

‘헤일리안 대공께서는 진심으로 저 피 섞이지 않은 의붓 여식에게 대공위를 물려주실 생각이시오?’

‘전 바스테반 공작 영애가 조금 심하게 투기하긴 했어도 그녀만큼 고귀한 출신이 없었거늘…….’

‘영웅의 딸을 뛰어넘을 여인이 제국 어디에 있겠습니까.’

‘평민에 불과한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대공비와 대공녀로 설치는 행태가 진심으로 보기 역겹군요.’

‘그 고귀한 헤일리안의 대가 이렇게 끊기게 된다니, 고작 과부 하나 때문에!’

대공저 바깥으로 몇 발자국만 나서도 들려오는 말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헤일리안 대공비를 악녀와 대적하여 끝내 승리한, 선하디선한 복 받은 여인이라 여기었지만 귀족들은 샤스티아와 알레아를 공공연히 멸시했다.

심지어 그 잔악한 마리에트가 샤스티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출중한 여인이었다며 회상하는 말을 두 귀로 듣는 순간, 페리온은 당장 검을 뽑아 그 망언을 지껄이던 이의 목을 베어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로베릭의 피를 이은 유일한 친자식이자, 죽은 마리에트의 딸이 등장한다면…….

귀족들은 더없이 환영할 것이다.

그리고 저 아이를 차기 헤일리안 대공으로 지지하겠지.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약 일이 그렇게 진행된다면 샤스티아와 알레아의 처지가 어디까지 추락하겠는가.

제 어미를 닮아 독살스럽기 그지없을 터인 저것이 샤스티아와 알레아를 그대로 둘 리 없었다.

‘……고마워요, 페리온.’

이제야 행복을 찾은 사람인데.

샤스티아가 모든 것을 잃고 내쫓기는 모습을 상상하면, 페리온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페리온은 증오로 물든 시선을 이디스에게 고정했다.

증오하는 마리에트의 딸이었음에도, 너의 피를 내 손에 묻히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내겐 이 길밖에 남지 않았구나.

이디스와 시오른이 로베릭에게 붙들렸을 때 사용할 최후의 수단.

페리온은 이디스 로넨 바스테반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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