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 *
로베릭은 나와 할아버지를 마차에 태웠다.
“이곳에서 더는 머무를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야지.”
로베릭이 웃으며 말했다.
“…….”
마차의 문이 닫혔다.
로베릭은 말에 올라탔기에 마차 안에는 나와 할아버지만이 남았다.
“…….”
뭐라고 첫말을 떼어야 할까.
참담한 상황에 할 말을 고르지 못하고 나는 애꿎은 옷깃만 쥐었다.
“……저, 할아버지.”
하지만.
나는 주먹을 꾹 쥐고 말했다.
이대로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떤 생각으로 로베릭을 따라가겠다고 선택한 건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말씀드려야 했다.
“……이디스.”
그러나.
“아무 말 말거라.”
할아버지께서 거부하셨다.
“……할아버지?”
나는 멍하게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그러시는 거냐고 물으려 했지만, 마차의 전등에 비친 할아버지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
모든 대화를 거부하는, 막막하고도 아득한 벽이 서린 얼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짓씹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것이 올라와 호흡기를 죄다 틀어막는 듯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 * *
“헤일리안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누추한 변방의 도시에 빛의 대공께서 방문하시다니, 무한한 영광이기 그지없습니다!”
도시의 시장이란 자가 로베릭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히며 외쳤다.
“사정이 있어 며칠 동안 관저에서 머물러야 할 듯싶네.”
“마음 편히 머무르십시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저, 그런데, 곁에 서 계신 작은 영애분은 누구신지…….”
흐리멍텅한 눈길이 내게 향했다.
“아.”
로베릭이 작게 탄식하며 답했다.
“내 딸일세.”
“……예?”
버퍼링이 걸린 듯 입을 벌리던 시장은 별안간 깨달았다는 듯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아, 그러면 이분께서 그 유명하신 알레아 대공녀님이시군요!”
“…….”
제대로 잘못 짚었다.
나는 차갑게 굳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주위 기사들의 안색도 일제히 당황으로 물들었다.
“알레아가 아닐세.”
로베릭은 미묘한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예?”
시장이 눈을 깜박였다.
“아직 공포하지 않은 내 친딸이지.”
충격적인 발언에 혼이 나간 시장을 내버려 둔 채 로베릭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끌었군. 아이가 많이 피곤할 테니 머무를 거처를 내어주게.”
“……예, 예!”
시장은 허둥거리며 시녀들을 불렀다.
“가자, 이디스.”
로베릭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고 뒤를 돌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보고 계시지 않았다.
“이디스.”
로베릭의 부름이 재차 들려왔다.
“…….”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관저의 시녀들에게 인도되어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찾아오지 않으셨다.
“……왜?”
내가 로베릭을 따라가겠다고 말해서 단단히 화나신 걸까.
……하지만 그렇게 안 했으면 로베릭은 분명히 물러나지 않았을 거야.
애초에 할아버지를 인질로 나를 협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
나는 깊은 한숨을 뱉으며 돌아누웠다.
샤스티아와 알레아는 지난 7년의 세월 동안 대공저에서 군림해 왔다.
대공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에게 위배되는 존재인 나를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샤스티아는 피해받은 선한 여인, 마리에트는 그런 선한 여인을 핍박했던 악랄한 여인이라는 이미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마저 공고히 씌워져 있으니.
그 이야기를 뒤엎고 벗어나기까지 앞으로 많이 힘겨울 것이다.
잘해 나갈 수 있을까.
나 혼자서.
“이젠 할아버지도 없는데…….”
로베릭이 할아버지까지 대공저에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할아버지께서 따라가려 하지도 않으실 테고.
“……대공저로 가도 할아버지를 계속 볼 수 있을까?”
로베릭이 그걸 허락할까?
“…….”
그 무엇도 확실한 게 없었다.
나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필사적으로 온기를 찾아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 * *
이디스 로넨 바스테반이 머무는 거처는 관저의 본관 사이에 작은 회랑을 두고 딸린 별채였다.
주변에 대공저의 기사 몇몇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관저 바깥에 병력이 포진되어 있었기에 별달리 신경 쓸 요소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페리온의 뒤로 지난번 마을의 방화를 주도했던 사내가 어둠에 가려진 수풀 속에서 걸어 나왔다.
“내가 명을 내려 기사들을 잠시 물리면 그때 들어가서 처리하거라.”
페리온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오늘로 이 지긋지긋한 악연은 비로소 끝을 맺는 것이다.
페리온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가 저지른, 또는 저지를 모든 죄악을 외면하기라도 하듯.
* * *
페리온이 기사들을 이끌고 자리를 비운 사이 페리온의 수하는 별채 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도시 안에 물의 정령사가 없지는 않을 터였다.
빠른 진화를 막기 위해서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내부에서부터 화재를 일으켜야 했다.
달칵-
가장 내밀한 곳에 위치한 방의 문을 열자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시 문을 닫은 사내는 나직이 읊조렸다.
“[이프리트].”
화르륵-
그를 축복한 불의 정령이 환한 빛을 발하며 나타났다.
불타오르는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청년의 형상을 한 정령이 사나운 웃음을 그렸다.
“이 건물을 불태워.”
나직한 명령이 떨어진 그 순간.
환하게 빛나는 주홍빛의 불씨가 이디스가 잠든 방의 문가에 옮겨붙었다.
* * *
타닥, 타닥.
무언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나는 잠결에도 의문을 느꼈다.
지금 계절은 꽃이 만발한 봄이었고, 벽난로는 불을 지펴 놓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무슨 걱정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뜨려던 눈을 다시 감았다.
깊은 수마로 빠져들었을 때,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쿵쿵 울렸다.
……지금 나는 집에 있는 게 아닌데?
로베릭을 따라가겠다고 말한 뒤, 테르마 시 관저의 별채에서 잠들었다. 분명히.
그렇다면 지금 느껴지는 이 열기는 뭐지?
다시금 이상함을 느끼던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코끝으로 밀려드는 매캐한 공기는 도저히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눈조차 뜨지 못한 채 몸부림쳤다.
그 순간이었다.
사아아-
나를 옥죄던 매캐한 공기와 뜨거운 열기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그 대신 시원하고 포근한 공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이디스, 일어나렴.]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순간 왠지 모를 그리움이 느껴지는…… 아름답고, 포근한 목소리.
“……헉!”
나는 비로소 눈을 떴다.
[드디어 눈을 떴구나.]
내 곁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던 목소리의 주인이 다정하게 웃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별빛을 쏟아부은 듯 반짝이며 그의 등 뒤로 물결쳤다.
먼 고대의 인간들이 입던 옷처럼 주름진 페플로스 위로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 가지각색의 천들이 화려하게 치장하듯 늘어뜨려져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동자는 검은색을 띠고 있었지만, 어둠이 아니었다.
검은 동공은 우주의 별빛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검은 눈동자는 끝없는 빛으로 찬란히 반짝였다.
“누구…….”
나는 방 안을 가득 채운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연히 정체 모를 이를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한 그가 가붓한 목소리로 내 물음에 답했다.
[나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자, 네게 가장 많은 축복을 내려준 자.]
아득한 세월이 깃든 눈길이 내 눈동자 위로 내려앉은 그 순간.
마침내 그의 진언이 울렸다.
[생명의 정령왕 일리피아란다.]
……네?
나는 망연히 입을 벌렸다.
“……일리피아?”
‘태고에 이 우주는 끝없는 어둠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로서는 알지 못하는 신비한 섭리로 인하여 그 어둠 속에서 생명의 일리피아가 태어났고, 그 뒤를 따라 죽음이 태어났지.’
할아버지께서 해 주셨던 이야기에 등장하던, 그 일리피아?
……당신이 여기서 왜 튀어나와?
자다 일어나니 온 방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인 것으로도 모자라 이야기 속에서나 들어오던 정령왕의 등장이라니.
나는 전후 관계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이 무지막지한 상황에 아무런 말도 토해내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네 당황을 이해해. 이제까지 평범한 인간으로만 살아왔으니 당연히 놀랍겠지.]
그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오늘 그를 처음 만나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게도 지극한 친애가 손길 가득 묻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디스. 지금은 당황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란다. 주위를 둘러보렴.]
황망하기 그지없었으나 일단 나는 일리피아의 말대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내 곁에 나타난 일리피아의 덕분인지 숨쉬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지만 불타 무너진 방문 너머로 보이는 형광빛 불길은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이게 무슨…….”
분명히 바깥에 대공저의 기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시녀들 또한 별채에 머무르고 있었을 텐데.
“꺄아아악-!”
“살려줘, 콜록, 아아악!”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거짓말처럼 시녀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말도 안 돼…….”
이토록 갑작스러운 화재는 말이 안 된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시녀들과 기사들이 그냥 놔두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바깥 사람들도…….
[바깥에서는 이 화재가 보이지 않을 거다. 아직까지는.]
나는 일리피아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맞추며 덧붙여 말했다.
[이 건물의 안쪽에서만 화재가 지속되도록 한 것이다. 일반적인 불이라면 불가능할 세밀한 조절. 그렇다는 건 정령을 이용해서 일으킨 화재겠지.]
……내가 정령에게 원수를 산 것도 아니니, 답은 하나밖에 없다.
[누군가 정령을 소환해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불길이로구나.]
암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