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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0)화 (11/141)

<10화>

목표물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별채에 머무르는 이 중 암살 시도가 있을 만한 인물이 나밖에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나는 다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불길이 어디까지 번졌는지 봐야 했다.

[문가를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불이 번졌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렴.]

그러나 일리피아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파르르 경련하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돌아보았다.

[제대로 소개하마. 나는 생명의 정령왕 일리피아. 너를 축복한 정령이다. 보통의 인간들과 달리 정령의 축복을 받은 이들을 인간과 우리의 언어로 ‘정령사’라고 부르지.]

정령사. 이미 알고 있는 호칭이었다.

남주의 매력을 어필하기 위한 요소로 대부분을 날려 먹어서 그렇지, 원작은 정령물을 표방했으니까.

필사적으로 되새긴 끝에 겨우 떠올린 원작의 세계관에서, 정령사는 총 세 가지의 속성을 지녔다.

주 속성과 두 가지의 부속성.

그리고 정령사에 해당하는 인간은 세 속성의 정령들에게 소위 ‘축복’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보통은 하위나 중위 정령들에게 축복받는 것이 평범한 일이었지만, 로베릭은 무려 세 가지 속성 모두 정령왕들이 축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강 빛, 바람…… 그리고 한 가지는 뭐였더라.

아무튼 로베릭은 정말 대단한 재능충이었다.

……뭐야. 그렇다면, 설마 내가 로베릭의 딸이라고 정령사의 재능을 이어받은 거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너는 나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란다. 내가 도와주마. 너는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하지만 이 위기 상황에 그 무엇이 중요하랴.

누구의 의도로 벌어진 암살일지는 몰라도, 살아서 나가야 했다.

‘이디스. 이 할아비의 딱 하나 남은 소망은…… 네가 잘 자라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고 싶구나.’

아직 할아버지와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나는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일리피아의 손을 잡았다.

정령사든 암살이든 다 상관없다.

이대로 허망하게 죽을 생각은 없다, 절대.

[크하하학! 도망치는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활활 불타오르는 방 밖에서 전혀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람? 아니, 사람이라기엔…….

나는 의문 섞인 눈길로 문가를 응시했다.

[불의 중위 정령 이프리트란다. 성정이 매우 난폭하고 호전적이지. 자, 나를 따라오렴.]

일리피아는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앗, 바닥에는 불길이…….

“어?”

그러나 놀랍게도, 일리피아의 하늘거리는 옷자락이 닿는 부분마다 작열하던 불길이 하얗게 식어 사라졌다.

마치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에 닿아 소멸하는 것처럼.

[이디스?]

나는 멍하게 일리피아를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건 신경 쓰지 말자. 살아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나는 머뭇거리던 것을 멈추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발에 닿은 바닥은 멀쩡했다.

화염에 잠식되던 것이 마치 꿈이었다는 듯.

* * *

[시녀라는 인간들은 다 죽었고. 이제 목표물만 확인하면 되겠군. 지금쯤이면 타 죽었겠지.]

“……!”

심장이 떨렸다.

나는 두 손 모아 입을 가리고, 활활 불타는 복도를 활보하며 중얼거리는 불의 정령 이프리트를 응시했다.

시뻘건 빛깔의 정령은 불타는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짜증스레 헤집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을 보아하니, 아뿔싸. 내가 나온 방이었다.

아마 내가 죽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또한 목표물을 확인한다고 하였으니, 이 화재의 목적은 나를 암살하기 위함이었음이 분명해졌다.

[……뭐야, 어디로 갔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이프리트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 쥐새끼 같은 것이!]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제 작정하고 나를 찾아다닐 텐데.

나는 불안한 눈길로 여전히 평온한 기색인 일리피아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도망만 다녀서 해결이 될까?

“저기…… 일리피아 님.”

[그냥 이름으로 부르렴.]

일리피아가 다정히 말했다.

“아, 네. 그런데…… 혹시 저놈을 물리칠 능력은 없으세요?”

이프리트에게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쿠구구궁-

무엇보다, 이 건물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도 의문이었다.

이러다 무너지는 잔해에 깔려 죽는 게 먼저가 아닐까.

[미안하지만 나는 공격 가능한 권능이 없단다. 이프리트와 상성이 맞는 것도 아니고.]

“네……?”

맙소사, 나는 절망에 휩싸여 주르륵 쓰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녕 이대로 죽는 건가…….

그래도 일리피아가 생명의 정령왕이니까, 죽어도 되살아날 길은 있지 않을까?

……대체 어떤 새끼가 오밤중에 불을 지른 거야!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암살 시도의 배후에 나는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원작에서 이프리트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가 누구였지?

……로베릭의 속성들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데 내가 그 설정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후회의 눈물을 머금는 내 곁에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일리피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령사에게는 속성 유전이라는 것이 있지. 나는 네 아버지, 로베릭을 축복한 정령이고 네 어머니를 축복한 정령들을 모두 알지는 못하나…….]

어머니? 마리에트?

……게다가, 로베릭?

나는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일리피아가 로베릭을 축복했다고?

설마, 끝까지 기억나지 않았던 로베릭의 남은 한 속성의 정령왕이 일리피아였어?

[분명 그녀의 속성 중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가 있었지.]

휘몰아치는 정보의 폭풍에 멍하게 넋을 놓던 나는 그 순간 눈을 부릅뜨며 일리피아를 쳐다보았다.

물과 불.

어떤 것이 상성에서 더 우위인지는 명확했다.

[그러니 네 부속성 중 그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소환 주문을 알려줄 테니, 시도해 보겠느냐?]

일리피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할게요, 지금 당장.”

나는 대답했다.

[좋아. 등위가 높지 않은 정령의 축복을 받은 자는 소환 주문의 성공 확률도 낮은 편이지. 하나 너는 로베릭의 딸이고 내 축복을 받았으니 주문만 똑바로 읊는다면 실패 없이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콰앙-!

드디어 살길을 찾았다는 희망이 들었을 때, 천장을 받치던 기둥 하나가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아!

나는 겨우 비명을 삼켜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소사와 압사만은 피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시간이 얼마 없다. 네가 죽으면 내가 되살려낼 수는 있겠지만 네 정신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할 테지. 실수하지 말고 한 번에 따라 하렴.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검고 찬연한 일리피아의 두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그리고 네가 부를 정령의 이름을 읊거라. 지금 상황에서는……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

나는 나를 휘감은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할 수 있어.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나는 이를 꾹 악물고 입술을 달싹였다.

단 하나의 문장만 읊었다.

그런데.

우웅-

심장 부근에서 무언가 가득 차올라 넘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연유로 벅차오르는 감정.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물 밀듯 밀려오는 두려움.

[이곳에 있었구나! 죽여 주마!]

소환 주문으로 인해 기어이 내 기척을 찾아낸 것일까, 이프리트의 고함이 지척에서 울렸다.

머리 위로 뜨거운 열기가 넘실거렸다.

나는 두 손을 꼭 쥐며 간절히 외쳤다.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뜨거운 불길이 머리 바로 위에서 쇄도했다.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

우우웅-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외친 순간.

[드디어 나를 불러냈구나.]

따스한 물이 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지극히 자애로워,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음성이 고요히 울렸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나를 죽이려 들던 사나운 불의 정령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바닷속에 잠긴 듯 사위가 고요했다.

아니, 정말로 바다가 맞았다.

나는 푸르른 바닷물에 잠기어 있었다.

“아…….”

나는 바다 아래에 숨겨진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숨을 쉬는 것이 하나도 괴롭지 않았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순간.

“……!”

나는 나를 응시하는 물의 정령왕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은은히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은 짙푸른 바다의 색을 닮아 푸르스름했다.

짙푸른 속눈썹에 감싸인 은빛의 눈동자가 진주처럼 빛났다.

그의 눈가와 뺨은 보석 조각을 흩뿌린 듯 아름답게 반짝였고, 아가미의 형태를 띤 귓가에 색색의 산호가 자라나 있었다.

주홍빛, 푸른빛, 하얀빛의 거대한 산호들은 나이아드의 머리 위까지 드리워져 마치 정령왕의 왕관을 대신하는 듯했다.

등 뒤로 우아하게 물결치는 푸른 머리카락, 여신의 옷자락처럼 하늘거리는 복식 아래로 드러난 것은 두 다리가 아닌 물고기의 지느러미였다.

어디를 보아도 인간적인 외형은 아니었으나 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나이아드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느러미가 돋아난 팔을 뻗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손목을 휘감은 새하얀 산호가 알알이 엮인 팔찌가 쟁쟁 소리를 내며 영롱하게 울렸다.

[사랑스러운 마리에트의 아이야.]

나이아드가 나를 칭한 표현에 놀랄 새도 없었다.

“!”

그가 나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은 따듯하지도 않았고, 차갑지도 않았다.

딱 적당히, 미지근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던 나이아드의 행동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눈알만 굴렸다.

어째서……?

꼭, 지독히도 그리워했던 상대를 겨우 다시 만난 것처럼.

게다가 ‘사랑스러운 마리에트’ 라고 말했지. 분명히.

그게 무슨 뜻…….

[이제 그만해야지. 언제까지 아이를 가두고 있을 거니?]

일리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나이아드 주위로 펼쳐졌던 몽롱한 바닷속의 풍경이 꿈처럼 사그라졌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 나자, 나는 아까의 장소에 서 있었다.

쿵, 콰광-!

활활 불타오르는 저택의 복도 말이다.

끄아아아, 또 기둥이 무너졌잖아!

“꺄아아악!”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일까, 나이아드가 나를 휘감은 두 팔을 풀어 주었다.

나는 내 머리 위로 쇄도하던 불의 창을 떠올리며 퍼뜩 몸을 돌렸다.

그러나.

[끄아아아아악!!]

나이아드가 나타나자마자, 나를 삼키기 위해 주위를 서성이던 이프리트는 되레 내가 놀랄 듯 경기하며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고 있었다.

“……?”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에 어이가 없어졌다.

[작고 예쁜 마리에트의 아이야.]

내 뒤로 둥둥 떠 있던 나이아드가 몸을 숙이며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너도 네 어미처럼 누군가에게 미움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로구나.]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눈길이 마주친 나이아드는 조용히 웃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그의 뒤로 거대한 물기둥이 생성되었다.

어라?

[그러니 전부 쓸어버리자.]

나이아드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과격한 말을 그렇게 온화하게 말씀하시면……?

내 얼굴 위로 거대한 물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숨 참으렴, 이디스.]

상황을 관조하던 일리피아가 말했다.

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지만, 일리피아가 나를 끌어안는 것이 더 빨랐다.

쿠과아아앙-

고풍스러운 저택의 내부는 한순간에 바다 한복판으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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