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1)화 (12/141)

<11화>

* * *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은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발길을 멈추었다.

‘제가, 아저씨를 따라갈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의 손녀딸, 이디스가.

‘대공가로 갈게요. 아저씨, 아니…… 아버지의 뜻대로.’

떨림을 애써 내색하지 않고 내뱉었던 말이 천 개의 바늘이 되어 심장을 찔러 오는 듯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겠지.

그 어린 것이, 아비만도 못한 자를 따라가면서까지 못난 조부를 지켜 주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과 함께 그를 이렇게 추락시킨 자를 향한 분노가 발치에서부터 올라와 마음을 잠식했다.

끝내는 이디스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그 진절머리 날 만큼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놈의 손에.

‘바스테반 삼촌!’

증오에 몸서리치던 순간, 이제는 까마득히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는 과거.

쏟아지는 햇볕에 새하얀 머리칼을 눈부시게 빛내며 그의 바짓단을 붙들고 해맑게 웃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차가운 현실이 덧씌워지며, 추억은 덧없는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어쩌다 이렇게까지 치달았는가.”

시오른은 자조하듯 속삭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언젠가는 온전히 행복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었다.

“지오반…….”

시오른은 오래전 세상을 떠난 친우의 이름을 읊조렸다.

지오반. 지오반 아칸샤 헤일리안.

선대 헤일리안 대공이며,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의 아버지였던 자의 이름.

로베릭은 지오반이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외아들이었다.

광기에 젖은 선황의 칼날이 선대 헤일리안 대공에게 향하기 전까지, 지오반은 로베릭을 품에서 떼어 놓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며 소중히 길렀다.

그러나 행복한 시절은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질투에 미친 포악스러운 괴물은 끝내 헤일리안 대공가를 물어뜯었고.

어린 로베릭은 열 살의 나이에 홀로 내버려졌다.

‘살아서, 너만이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진정으로 다행이야…….’

그 참극을 뒤늦게 전해 듣고 달려온 시오른은 홀로 남은 로베릭을 거두었다.

선황은 헤일리안에 남은 유일한 후계자인 로베릭의 목숨까지 앗아 가야 직성이 풀릴 듯 광포하게 굴었으나.

‘폐하. 소신은 오래전 이 로샨과 황실을 향해 충성을 맹약했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나이다.’

그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이 비호하는 어린 소년을 끌어낼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부디 이생이 끝날 때까지 소신은 그날의 맹약을 지키고 싶사옵니다. 소신이 그리할 수 있도록 너른 아량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다행히도.

그렇게 로베릭은 시오른의 그림자에 숨어 목숨을 부지하고 무사히 자라났다.

미친 선황제에게 죽임당한 친우의 아들.

죽은 친우를 꼭 닮아, 보고 있자면 안쓰러워 무엇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었다.

그랬기에 시오른은 로베릭을, 사랑하는 아내가 남긴 딸 마리에트와 차별하지 않고 친자식처럼 길렀다.

그 노력 덕분일까.

어린 시절의 로베릭은 시오른을 삼촌이라고 부르며 곧잘 따랐다.

함께 정원을 뛰어놀며 재잘거리던 마리에트와 로베릭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기억이 생생한 상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망할 놈.”

기억을 되새기던 시오른의 손아귀에 바스러진 벽의 잔재가 한 줌으로 남아 우그러졌다.

과거를 되새길수록 로베릭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져만 갔다.

모든 것이 원만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로베릭의 배신으로 산산이 조각났다.

파혼.

오랜 세월, 그들 사이에 쌓여 왔던 모든 신의가 한순간에 부서졌다.

시오른은 최악의 선택을 내린 로베릭에게 더없이 실망하고 분개했다.

마리에트가 파혼의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원망이 시오른의 마음을 좀먹었다.

그러나 그것만이었다면.

시오른은 로베릭을 향한 그의 모든 애정을 찢어발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주었던 모든 사랑과 은혜를 저버린 로베릭이었으나,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이…….

친아들처럼 사랑하며 기르던 아이였으니까.

그 여인을 오죽 사랑했으면 이런 선택까지 하였을까.

마리에트에게 미안하게도, 어느 날에는 로베릭을 이해하려 노력해 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로베릭은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당시 즉위한 지 채 일 년도 넘지 않았던 새 황제, 오스발트 트리스탄 루에이리는 황가의 권위보다 드높은 과거의 영광을 모두 무너뜨리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새 황제는 자신의 친우였던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에게 제 뜻을 비쳤다.

새 황제가 아직 황태자였던 시절, 그의 친우가 될 수 있도록 황궁에 들여보내 준 이가 바로 시오른이었건만.

로베릭은 과거를 잊고 새 황제와 합심했다.

바스테반 공작가,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판을 꾸몄던 것이다.

교활한 새 황제는 권력을 탐하는 타락한 과거의 영웅을 대신할 새로운 영웅,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라는 이미지를 서서히 굳혀 나갔다.

그 일은 너무도 은밀히, 알지 못하게, 어두운 물밑에서 진행되었으며 예기치 못한 딸의 파혼과 떠나간 로베릭을 향해 온 마음이 쏠려 있던 시오른이 이상한 낌새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야만 했다.

‘바스테반 공작의 위명도 다 옛날 일이지.’

‘하나뿐인 딸을 얼마나 엉망으로 길렀으면. 바스테반 공녀가 참으로 오만하며 제멋대로라지?’

‘아무리 제 약혼자가 반한 여인이라고 해도, 그렇게나 학대하는 건 조금 심하지 않아?’

샤스티아 프라이움, 그 여자와 마리에트를 둘러싼 소문은 점점 악의적으로 각색되고 부풀려져 평범한 백성들의 여론을 적대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시오른은 뒤늦게 로베릭이 파혼으로 신의를 저버린 것뿐만 아니라 새 황제와 합심하여 아예 바스테반 공작가 자체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오른은 딸 마리에트와 함께 그들에게 대항하였으나.

‘이제 더 이상 로샨 제국에 그대는 필요치 않소.’

이미 판은 기울어진 뒤.

‘과거는 과거일 뿐. 그러나 그대의 공을 생각하여, 그대와 여식의 목숨만은 살려 주도록 하지.’

황제의 뜻 아래, 시오른은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시오른은 망연히 생각했다.

그대로 두었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 분명했던 소년을 구해 주었다.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주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그 소년은,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 신의를 저버리고 돌아섰다.

그럼에도 남은 미련을 끊어 낼 수가 없어, 제대로 원망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너에게 내 모든 것을 주었건만.’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시오른은 피눈물을 삼키며 씹어뱉듯 읊었다.

‘너는 끝내 내 모든 것을 앗아 가고야 마는구나.’

증오스러운 배신자를 향해.

‘…….’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로베릭은 더 이상 시오른과 마리에트를 돌아보지 않았다.

새 황제는 황권조차 침범하지 못했던 불가침의 영웅을 깨끗이 치워 낸 것에 만족했다.

시오른과 마리에트는 초라한 삶을 근근이 이어 갔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문으로 로베릭은 황제의 막역한 벗이자,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새로운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그 과부를 대공비를 맞이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 진정으로 완벽한 배신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왔던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내쫓긴 시오른의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증오가, 매일 매일 뼈를 갉아먹으며 제 존재를 각인시키는 듯했다.

시오른은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잔존하던 모든 애정을 찢어발겼다.

그리고 울분에 차 외쳤다.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너는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라고.

내 모든 것을 앗아 간,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일 뿐이라고.

그럼에도 불행은 끊이지 않았다.

딸이 떠났다.

그의 품에는 마치 과거에 그러했듯 작고 어린 생명만이 남겨졌다.

‘할아버지!’

마리에트를 닮았으나, 동시에 붉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로베릭을 닮은 손녀였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이.

‘이리 오려무나, 이디스.’

사랑스러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을 키우는 동안 시오른은 점차 피맺혔던 과거의 상처를 잊어 갔다.

이대로라면, 복수를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까요. 제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아이인데.’

악몽처럼 다시 찾아온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은.

‘그것을 대신하여 무엇을 내어주실 겁니까? 아니, 이제 내어주실 것이 있기는 하십니까?’

‘아,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단 하나, 가지고 계시는군요.’

또다시 시오른의 행복을 무참히 부숴 버렸다.

아, 그래.

시오른은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결코 끊어지지 않을 악연으로 맺어졌구나.

로베릭.

이 악연을 찢어발기지 않는 이상은 언제고 엮일 수밖에 없겠지.

“……당신은.”

“헤일리안 대공을 보러 왔다. 비켜라.”

어둠이 모든 빛을 잡아먹은 시간, 헤일리안 대공이 머무는 처소를 찾아온 시오른은 로베릭의 호위를 응시했다.

헤일리안 대공과 전 바스테반 공작 사이에 존재하는 껄끄러운 사연을 잘 아는 대공가의 기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기다리라.

“키우는 개만도 못한 취급이군.”

“예?”

시오른은 로베릭과 그의 사람들에게 더는 예의를 차릴 생각이 없었다.

쾅-!

나직이 속삭인 시오른은 단번에 기사를 밀어 치운 뒤, 로베릭의 방문을 걷어차 열어젖혔다.

“……무슨, 당신은?”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던 로베릭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그 낯을 마주하자 밀려오는 역겨운 감정에 시오른은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당신이 여긴 무슨 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디스에게 왜 찾아온 게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