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서두를 자르고 던져진 날 선 물음에 로베릭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시오른은 분노를 숨기지 않고 외쳤다.
“염치 따윈 밥에 말아 먹기라도 했느냐? 왜 대답을 못 해. 애초에 이디스의 존재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냔 말이다!”
일을 되짚기 전,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었다.
로베릭은 어떻게 이디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인가.
마리에트가 죽어 황실에서 신료가 파견되었을 때, 시오른은 마리에트의 유언대로 갓 태어난 아기였던 이디스를 숨겼다.
그랬기에 마리에트의 죽음은 알려졌어도 그녀가 죽은 이유였던 이디스의 탄생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7년이나 흐른 지금에 와서, 대뜸 로베릭이 이디스의 존재를 알고 찾아온 것이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잠시 당혹스러워하던 로베릭은 무표정하게 낯을 굳히며 말했다.
“그놈이 찾아와 알려 주었습니다.”
그놈이라니?
하얗게 센 눈썹이 일그러지던 순간.
“마인하르트 시엘 아스트라페. 그놈 말입니다.”
시오른의 황금빛 눈이 커다래졌다.
로베릭은 시오른의 표정을 유심히 응시하다 조소를 머금었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당신들이 성도에서 추방된 이후 잠적했던 그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마리에트가 제 딸을 낳았다고 말하며 그 딸이 제 친자가 맞다는 감별서까지 내놓았으니까요.”
이건…… 시오른은 당황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침음을 흘렸다.
마인하르트, 그 아이의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옛 전우가 남기고 떠난 유일한 후손이자,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애타게 찾아 헤매던 때 마리에트가 찾아 데려왔던 아이였다.
로베릭과 같이 거두어 길렀던 그 소년은 로베릭과는 달리 시오른과 마리에트를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곁에 있었으나.
“……그 아이가 여태 어디 있다 나타나서 너에게 이디스의 존재를 알렸단 말이냐.”
가문의 몰락 이후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잠적한 인물이었다.
시오른은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로베릭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글쎄요. 확실한 것은 그놈은 이디스의 존재를 애초에 알고 있었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제게 숨길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로베릭은 붉디붉은 적안을 차갑게 빛내며 말했다.
“왜 숨기셨던 겁니까? 처음부터 밝히셨더라면 이디스는 그런 초라한 환경에서 힘겹게 살아갈 필요도 없었고, 대공녀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겁니다. 당신의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애꿎은 아이만…….”
“-그 입 닥쳐라,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
시오른은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며 말했다.
“네가 우리 부녀에게 했던 짓을 잊었느냐?”
이어지는 시오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보다 더욱 진득한 증오를 머금고 있었다.
“제 외가를 몰락시킨 친아버지를 어린 이디스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이디스에게 고개도 들지 못할 죄인이다. 그런데 이제 와 뻔뻔스럽게 아비 노릇을 하려 들어?”
정녕 네놈이 제정신이란 말인가.
“아까 네놈이 한 짓은 나를 인질로 잡고 한 저열한 협박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정곡을 찌르는 발언에, 로베릭은 힘줄이 돋도록 턱을 악물며 적반하장으로 대꾸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디스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이디스는 제 친자식입니다. 이디스도 당신과 살아가는 것보다는 저를 따라가는 것을 더 바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시오른은 이성을 잃고 득달같이 달려가 로베릭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뱉는다고 다 말인 줄 알아?!”
로베릭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찌 이리도 수치를 몰라, 내가 몇 번을 더 얘기해야 알아듣겠느냐, 이디스는 애초에 너 같은 부모 따위…….”
“가, 각하!”
그 순간, 이 상황과 관계없는 이의 목소리가 난입했다.
시오른과 로베릭은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낯빛이 퍼렇게 질린 기사 한 명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그…… 별채에, 별채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별채?
별채는…… 이디스가 머무는 처소였다!
“……뭐라?!”
“똑바로 말해라, 무슨 변고!”
예상치 못한 소리에 시오른은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고, 로베릭 또한 놀라 외쳤다.
기사는 바들바들 떨며 읊었다.
“벼, 별채가 불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부에서 시작된 화재인 듯한데, 그 기세가 무성한지라 이미 안쪽에 있던 사람들은…….”
시오른의 얼굴에 모든 핏기가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 로베릭과 시오른의 생각은 일치했다.
“안 돼, 이디스!”
“당장 물의 정령사를 불러라!”
그들은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방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 *
“안 돼-!!”
지난 몇십 년 동안 이리 다급히 뛰어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갈급하게 달려왔건만, 시오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눈이 아프도록 눈부신 화염에 휩싸인 건물의 형체였다.
‘……아버지. 비록 저는 이렇게 떠나지만…….’
“이디스!!!”
‘부디 제 아이를 반드시 지켜 주세요.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게…….’
“안 돼! 아가, 이디스!!”
시오른은 절규하며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안 됩니다!”
곁에 서 있던 기사가 질겁하여 그런 시오른을 붙들었다.
제정신이 아니기는 로베릭도 마찬가지였다.
“일리피아, 일리피아…… 제발…….”
그는 축복을 거두고 떠나갔던 생명의 정령왕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으나, 답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안 돼…….”
화마에 빼앗긴 줄 알았던 딸아이를 되찾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무엇 하고 있지?! 당장 물의 정령사를 불러오라 명하지 않았더냐!”
로베릭은 광분하여 외쳤다.
대공가의 기사들은 그저 송구한 듯 고개만 숙였다.
아, 눈앞이 붉게 물든다. 사방이 붉고 또 붉었다.
하늘에서 무수한 핏방울이 떨어져 온 세상을 적신 것 같았다.
“대, 대공 각하!!”
검을 뽑아 든 것 같은데, 그것조차 확실하게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악!!”
로베릭이 팔을 높이 쳐들자 공포에 질린 비명이 귀청을 찔렀다.
쿠구구구구-
그 순간이었다.
“……물?”
이질적인 감각이 로베릭의 심상에 파문을 일으켰다.
불에 타는 저택의 내부에서 거대한 물의 흐름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어린 날, 수없이 느껴왔던 감각.
‘로베릭, 이것 봐. 나를 축복한 정령왕 나이아드야.’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의 기운이었다.
콰광-!
“끄아아악!!”
“물, 물이!!”
로베릭은 떨리는 눈길로 저택을 바라보았다.
불길 속에서 푸른 물길이 터지듯 휘몰아쳐 나오고 있었다.
“각하, 피하십시오!”
대공가의 기사가 시오른과 로베릭을 이끌고 다급히 몸을 던졌다.
싸아아아-
거대한 파도가 몰아쳤다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울렸고.
“이게 무슨…….”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때, 실낱같이 미약하나 더없이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베릭은 눈을 부릅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디스?”
불이 사그라지고, 반이 다 타 버려 골조가 훤히 드러난 저택의 터.
그의 딸은 그 폐허 속에 오롯이 존재해 있었다.
* * *
이게…… 무슨 전개지?
[많이 젖지는 않았구나. 다행이다.]
나이아드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 나는 비로소 정신이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별채를 잡아먹던 화염은 모두 꺼졌지만, 저택은 처참하리만치 새카만 재로 변모한 채였다.
이프리트의 불길에 타 죽었을 시녀들과 기사들의 시신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주범, 이프리트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다 나이아드가 일으킨 거대한 물 폭탄에 얻어맞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순간 이프리트가 지르던 단말마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듯했다.
……살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막혔던 숨이 탁 트였다.
다리에 절로 힘이 풀려 휘청였다.
“……이디스?”
그 순간, 소름 끼치도록 낯익은 목소리가 멍하니 내 이름을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나를 망연히 바라보고 계시는 게 아닌가.
그 옆에 로베릭을 비롯한 기사 몇몇도 함께 있었으나, 내 눈에 그들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나는 다급히 할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다 타 버린 폐허는 감히 내 앞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디스…….”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을 만큼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눈썹, 깊은 주름으로 패인 얼굴.
그토록 세월이 짙게 내려앉았음에도 할아버지의 황금빛 눈동자만은 광명을 잃지 않으려는 듯 언제나 찬란히 빛을 발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은 전에 없이 흐려져 있었다.
“할아버지……?”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할아버지의 뺨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세상에…….”
그 순간, 덜덜 떨리는 할아버지의 입술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나는 할아버지의 시선이 내 옆쪽을 향하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이아드가 있었다.
“끄윽…….”
할아버지의 입에서 북받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디스!”
덜덜 떨리는 손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미처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
“장하다, 정말로 장하다, 마리에트를 닮았구나, 그래서 물의 정령왕의 축복도 물려받은 게야……!”
차마 나로서는 다 알지 못할 슬픔과 기쁨, 회한으로 물든 목소리로 할아버지는 절절히 울부짖으셨다.
……맞아. 나이아드는 마리에트를 축복했던 정령왕이라고 했지.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이토록…….
“마리에트가 너를 지켜 준 게야, 분명 그런 것일 테다…….”
나는 황망한 와중에도 할아버지를 마주 끌어안고 그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 피를 이어받아 정령사의 자질을 타고났구나.”
그리고 머리맡에서 로베릭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로베릭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이어 나이아드를 스쳤고, 종래에 일리피아를 향했다.
“……다친 곳은 없니, 이디스?”
일리피아에게 시선을 둔 채 로베릭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일리피아는 자신이 로베릭을 축복한 정령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어째서 로베릭이…… 저렇게 묘한 기색을 내비치는 거지?
순간 뜻 모를 불안감이 일어, 나는 할아버지를 더 꼭 끌어안고서 마지못해 답했다.
“정령왕들이 도와줘서 무사할 수 있었어요.”
“……그랬구나. 다행이다. 정말로.”
로베릭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일리피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전과 같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일리피아.”
로베릭이 일리피아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라니?
[오랜만이구나, 로베릭.]
일리피아는 차분한 어투로 로베릭의 인사에 화답했다.
“……이디스를 축복한 게 너인가?”
로베릭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그래. 이디스의 주 속성 정령이 나란다.]
일리피아의 답이 돌아온 순간, 로베릭의 붉은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아, 그래.”
고개를 살짝 까닥인 뒤, 로베릭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듯한 기색으로 시선을 배회하다.
“…….”
종래에 나를 내려다보았다.
똑같은 빛을 머금은 그와 나의 적안이 마주친 순간, 로베릭이 나직이 속삭였다.
“이디스.”
벅차오름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듯, 천천히.
느른하게.
“네가 바로…… 내 잃어버린 축복이었구나.”
……잃어버린 축복?
그게 무슨 말이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왠지 모를 불길함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지만, 나는 북받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할아버지를 달래느라 그 순간의 불길한 예감과 로베릭이 했던 뜻 모를 속삭임을 그냥 넘겨 버리고 말았다.